If You Remove the Kind Protagonist’s Mask RAW novel - Chapter (46)
46화
‘따뜻해.’
벌써 아침인가?
늦잠은 안 되는데!
허둥지둥 옷을 갈아입던 요이델이 무심코 창가를 보던 그때.
태양이 돌연 녹더니 요이델의 입을 향해 달려들었다. 용암이 입으로? 안 돼!
“못 먹어!”
푸웁.
눈을 뜬 순간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그리고 자신이 뱉는 바람에 수프를 잔뜩 묻힌 율리시스의 얼굴도.
요이델은 정적이 짓누른 주변 공기를 돌아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태양은커녕, 여긴 동굴 안이고 따뜻한 장작불만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었다.
“죄, 죄송해요!”
“…….”
그는 말없이 얼굴을 문질러 닦아 냈다. 딱히 화를 내지도 짜증을 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디가 이렇게 안락한가 했더니 그의 품 안이었다.
그가 자신의 머리를 받치고 묽은 수프를 입에 넣어 주고 있었다.
대충 쑤셔 넣을 줄 알았더니 입 주변까지 스푼으로 싹 긁어 제대로 먹여 주었다.
자애로운 성인을 방불케 할 만큼 상냥한 모습이나, 자신이 아는 그와 도저히 겹쳐 보이지가 않았다.
요이델은 반사적으로 수프를 받아 삼켰다.
‘모닥불이랑 수프가 다 어디서 난 거지? 그리고 왜 내가…… 아, 쓰러졌구나.’
“정신이 드셨습니까.”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의식을 완전히 깨웠다.
“성하?”
“네.”
“정말 성하세요?”
“네, 맞습니다.”
이 가까운 거리는 뭘까. 그의 체온이 지척에서 느껴졌다.
“보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탈출을 위한 협력입니다.”
그는 표정을 읽은 듯 바로 대답했다.
“저, 전 싫은데요?”
“그러는 저는 행복할까요. 당신이 저체온증으로 쓰러지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 하지만 성하께서는 두드러기가 생기시잖아요.”
“제 의사가 있으면 괜찮습니다.”
여전히 꿈같았다.
이게 현실이라면 아무리 저체온증이라도 감싸 줄 리 없고, 내게 수프를 먹여 줄 리가 없다. 그렇다면 혹시…….
“맛없을까 봐 저한테 먼저 먹여 보신 거예요?”
“정신이 덜 드셨나 봅니다.”
쿵!
율리시스는 단박에 요이델을 반대쪽으로 굴려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리깔아 보는 푸른 눈동자 안에는 싸늘함이 가득했다.
“그대의 가방에 있던 회복약도 함께 먹였으니 입안이 씁쓸하실 겁니다.”
다 거기서 꺼낸 거였구나.
몸은 여전히 으슬으슬 춥고 성하와는 어색하다. 바로 그때, 그가 자신의 옷을 요이델에게 툭 던져 주었다.
“체온을 올리는 데나 신경 쓰십시오.”
“이걸 저한테 주시면 그럼 성하께서는 뭘 입고…… 꺄악, 가, 감사히 입을게요!”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무심코 율리시스를 봤던 요이델은 포물선 그리듯 눈을 굴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똑같은 몸인데 자신의 것과는 너무 다르다.
우락부락한 연무장의 기사들과 비슷했지만 결이 달랐다. 그들이 거친 바위라면 그는 고고하게 정제된 보석이었다.
비스듬히 젖혀진 목선을 타고 흐르는 강직한 선.
호흡할 때마다 크게 오르내리는 단단한 가슴 근육과 그에 못지않게 바깥쪽으로 잘 다듬어진 어깨는 가뜩이나 너른 어깨를 더욱 떡 벌어져 보이게 했다.
단단한 몸을 두꺼운 옆선이 받쳐 주니 더욱 탄력적이었다.
반면 살결은 한눈에 보기에도 부드럽고 깨끗해서 스치면 좋은 향기가 날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양손 따위는 한 손으로도 휘어잡을 수 있을 듯한 큰 손으로 무심하게 모닥불의 불꽃을 더 키웠다.
그를 보니 왜 수많은 조각상들이 맨몸으로 만들어지는지 알 것 같았다. 하나의 작품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했다.
성하는 여러모로 대단하구나.
‘아니야, 왜 거기로 시선이 가는 거야? 지금 뭐 하는 거야, 정말.’
요이델은 빨갛게 열이 오른 얼굴을 땅에 닿을 기세로 더 푹 숙였다.
나는 남자다. 아무렇지 않다. 저건 조금 늠름한 하얀 눈 여우일 뿐이야. 아니면 하얀 눈표범, 하얀…… 그만하자.
부끄러워진 얼굴로 폭 웅크리고 있다가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어쨌든 그가 덮어 준 옷은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 더 그가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됐다.
“저, 근데 성하, 그…… 옷이…….”
“그대가 눈을 감으시면 됩니다.”
“아! 그러네요?”
그런데 그걸 말하려던 게 아닌데? 요이델이 다시 눈을 뜨려던 찰나.
“몰래 뜨시면 안 됩니다.”
“아, 안 그래요.”
율리시스는 피식 웃었다.
하랬다고 정말 순진하게 눈을 감는다. 이 햇병아리는 참 곧이곧대로 행동한다.
요이델의 창백한 뺨에 서서히 붉은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좁히고 낯빛을 묘하게 바꾸었다.
이것저것 다 자그마한 신관이다.
체구도 작고, 하필이면 피부마저 하얀 탓에 안 그래도 작은 몸이 부스러질 듯 연약하게까지 보였다.
그러나 햇병아리는 저만 보면 부르르 떨어 댔다.
자신과 있는 게 저렇게 싫은 일인가. 상관없지만, 거슬린다.
한낱 기사 따위에게 손수건을 주기 위해 휴식 시간을 허비하지 않나.
그런데 제 상관의 것은 완전히 잊은, 햇병아리의 건방지고 용감한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침 기사들의 배치를 다시 할 시기가 됐군.’
지나친 긴밀함은 불필요하다. 호위기사를 바꿔야겠다.
“옷 감사해요, 성하.”
조그맣게 들린 목소리에 율리시스는 잠시 한숨을 쉬었다.
지금 배치를 다시 하면 상실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 기사단의 재배치는 차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꺄악!”
그때 요이델이 놀라서 눈을 떴다. 작은 도마뱀이 피부를 미끄럽게 훑고 지나갔다.
율리시스가 그것을 잡아 들고 멀리 놓아주자, 빼곡히 쌓인 돌 안쪽으로 쏙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성하, 도마뱀을 안 싫어하시네요?”
미끄러워서 싫어할 줄 알았는데 그의 표정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왜 제가 싫어하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럼 좋아하세요?”
“아니요.”
“……뭐예요?”
황당한 목소리에 율리시스는 피식 웃었다.
“특별히 좋아하진 않습니다. 다만 살아 있는 것을 기른 적은 있습니다.”
“와, 동물요? 토끼? 사슴?”
“검은 조랑말이었습니다.”
하긴 보통은 어렸을 때부터 승마를 배우니까.
조랑말을 선물 받고 기뻐하는 성하의 모습도 지금으로써는 잘 그려지지 않았지만, 왠지 귀여울 것 같았다.
눈을 반짝반짝 빛냈을 어린이 성하라니.
“이름이 뭐였나요?”
“레일루스, 그렇게 불렀습니다.”
“멋진 이름이네요. 성하의 조랑말이면 아주 늠름하게 자랐을 것 같아요.”
“습격에서 저를 보호하다 어린 나이에 죽었습니다.”
요이델은 순간 이대로 바닥을 뚫고 들어가 버릴까 생각했다.
“일전의 말씀 말입니다.”
“네?”
“그대가 말씀하신, 반려에 대한 걱정. 저는 동물에게도 신경을 써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도 동일합니다.”
그는 아까의 일을 상기한 듯했다. 요이델이 말한, 진짜 반려를 맞이하는 상황에 대해.
그러나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냉철했다.
“저는 아이도, 가정도 원치 않습니다. 부모가 될 생각도 없습니다.”
“…….”
“설령 후사가 생긴다 해도, 억지 혼인으로 태어난 그 아이의 삶은 어떻겠습니까. 전부를 불행히 만들 생각 없습니다.”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이상하지, 마지막은 왜 꼭 그의 이야기처럼 들릴까.
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도 일렁였다. 극도로 고요한 얼굴이었다.
“좋은 주인이에요.”
그를 조용히 바라보다 말했다.
“레일루스한테 안 물어보셨잖아요. 어떤 주인이었냐고. 레일루스가 성하께 그렇게 얘기했나요?”
요이델은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충성심 높은 동물이어도 주인에게 모든 것을 바치지는 못해요. 게다가 목숨인걸요. 레일루스에게 틀림없이 소중하고 좋은 주인이었을 거예요.”
율리시스의 시선이 요이델을 향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말의 수명은 보통 30년쯤 된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성하는 천 년을 넘게 사셨잖아요?”
요이델은 손가락을 펼쳐 보여 줬다.
“벌써 수십 배예요. 레일루스는 평균 수명의 수십 배는 더 산 셈이네요, 그렇죠? 성하의 기억 속에서 오래오래 살았으니까, 신수보다도 장수한 거예요.”
요이델은 활짝 웃었다.
“성하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장수한 말이 됐네요.”
요이델은 다시 무릎에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
“오늘은 꼭 성하가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져서…… 신기해요. 그러고 보면 성하께서도 다치실 수 있고, 피곤하거나 지치실 수도 있는데 당연한 사실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요?”
“…….”
“아까 팔을 다치셨을 때 걱정했어요. 그래도 페어링 때문에 오늘은 제가 성하를 도와드릴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
너무 많이 말했나? 율리시스에게서 들리는 답이 없었다.
민망해진 요이델은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괜히 동굴 안을 서성였다.
그래서 몰랐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지어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율리시스를.
“아! 페어링이 좋다는 건 아니에요.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좋았다는 거예요. 절대 다른 뜻은 없어요.”
잠잠한 그의 반응에 혹시나 오해를 했나 싶어 얼른 덧붙였다.
전적이 있으니까 그에게 검은 마음을 품었다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당부하신 대로 페어링을 풀고 나면 성하와의 일은 전부 잊고 조용히 지낼게요. 신경 쓰실 일 없게요.”
그 말로 그도 모르게 더 험악한 표정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도.
요이델은 저 먼 동굴 안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저곳, 아까 들어간 도마뱀이 안 나오지 않았나?
‘설마 저기에 길이 있나?’
“성하, 저 안쪽에…….”
바로 그때, 근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요이델은 숨을 죽이고 소리에 귀 기울였다.
“이쪽이…… 없는…… 도대체.”
“……샅샅이 뒤져!”
“저 폭포는 뭐지? 기운이 심상치 않은데.”
호의적인 기운도 아니고, 성국의 억양도 아니었다.
요이델은 모닥불을 끄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 제 입을 막곤 숨을 죽였다.
“성하, 적들이 코앞까지 와 있어요. 이 동굴을 찾아내면 위험해요. 안쪽으로 가야 해요! 성하?”
속삭이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크게 울렸다.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차가운 빗물이 공기의 냉각을 가속시켜 초조함이 커졌다.
서성이는 말소리, 발소리. 그리고 몸의 떨림.
뒤는 막혔고, 퇴로는 없다. 점점 더 뒷걸음질 치던 바로 그때.
덜컹.
“꺄아아악!”
등 뒤의 돌들이 무너져 추락했다.
━━━━⊱⋆⊰━━━━
라이오스와 휘스테론은 요이델을 잃어버린 그 자리에 내려왔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원 위.
하얀 눈밭을 점령한 수많은 기사들 중에서도 그들은 눈에 띄었다.
이어 비명이 들렸으나, 물론 그들의 것은 아니었다. 손안에서 쉽게 부스러지는 제국 마법사들의 것일 뿐. 으득.
“으아악! 사, 살려 주십…… 끄아아악!”
연이어 비명이 들렸다.
굳이 대검까지 휘두를 필요가 없는 잔챙이들이었다.
“있잖아, 갑자기 마수 늘어나게 한 게 너야?”
휘스테론은 살랑살랑 웃으며 마법사에게 질문했다.
“말해 주면 너는 살려 줄게. 진짜야.”
“아니, 아, 아닙니다. 저희는 성황을 노리고 파견된 것이 아니라.”
“변명은 많이 아파질 거야. 난 그러고 싶지 않은데.”
“지, 진짭니다! 성황을 찾으러 온 게 아니라, 다, 다른.”
“찾아? 아하.”
휘스테론은 씩 웃었다.
“좋아. 살려 줄게. 입이 싼 놈은 좋아. 너 같은 배신자는 딱 고문관 취향이거든. 난 약속은 지켜. 살아만 있겠지만.”
“꾸?”
바로 그때.
요이델이 없어 눈물을 글썽이던 플로테스도 작은 뿔을 쫑긋 움직였다.
“신수님, 무서웠어? 델은 곧 돌아올 거야. 걱정하지 마.”
“꾸우! 꾸! 꾹!”
파바바박 얼굴을 할퀴었다.
이 바보들! 플로테스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신수는 느낄 수 있었다.
요이델이 바로 저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