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Remove the Kind Protagonist’s Mask RAW novel - Chapter (64)
64화
한 해가 바뀌었다.
탄신제를 맞아 각지로 흩어졌던 수많은 신관들이 모여들어 대연회장의 계단까지 사람이 빼곡히 들어찼다.
“엄청 많다, 플로. 그렇지?”
“꾸우우…….”
플로테스는 이미 자신을 물고 빨고 귀여워하는 사람들에게 기운을 쭉쭉 빨려 탈진해 있었다.
지친 신수는 요이델의 품을 파고들었다. 추운 겨울이지만 플로테스의 체온이 따끈따끈했다.
요이델은 잠시 연회장을 나와 근방의 정원으로 피신했다.
바로 원로원의 제1 정원. 마르셀리나가 언제든지 출입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준 곳이다.
‘시체꽃이랑 비슷한 꽃, 지금은 보이지 않아.’
화단을 확인하고 잠시 숨을 돌리던 순간, 정원 온실의 입구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 물정 모르는 신관님, 길을 잃으셨다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이오.”
순간 오싹한 기운이 든 요이델은 뒤를 돌아보았다.
흑색 머리에 곰처럼 대단한 풍채.
자신감이 넘치는 만면의 미소. 같은 느낌의 걸음걸이.
아슈레오가 작고 귀여운 곰이라면 그는 앞발을 마구 휘두를 듯 커다란 곰이었다.
무표정하던 그는 곧장 허허, 웃었다.
“농담이오. 기분을 풀어 주려던 것인데 많이 놀랐나 보오.”
탁한 붉은색 눈동자. 요이델은 플로테스를 품 안으로 더 가까이 끌어당겨 안았다. 왠지 위험한 기분이었다.
그는 요이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최대한 신사처럼 보이려는 것처럼.
“성하께서 입장하실 시간이 되었소. 신관으로서 그분보다 늦는 것은 예의가 아님을 신관님도 잘 알지 않소. 갑시다.”
“알겠습니다.”
요이델은 마지못해 다시 대연회장에 입장했다. 그 수상한 남자는 자신의 뒤를 따라왔다.
‘신관인가? 뱃지의 색을 먼저 봤어야 하는데, 그걸 못 봤어.’
요이델을 따라 느긋하게 걸음 한 남자가 대연회장에 발을 디딘 순간, 그를 알아본 기사가 크게 호명했다.
“원로, 지오르베니 대신관 예하 드십니다!”
그때 대연회장의 모든 이목이 한쪽으로 쏠렸다.
그에게선 다른 두 원로님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던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라나의 그 꽃 때문인가? 요이델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생각에 잠겨 연회장을 둘러보던 그 순간, 지오르베니와 눈이 딱 마주쳤다. 묘하게 석연찮은 탁한 붉은 눈.
왜 그럴까 고민하던 찰나.
“성황 성하 드십니다!”
커다란 악기 소리와 함께,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율리시스가 등장했다.
그는 평소처럼 차분하고 가볍지 않은 묵직한 미소를 띠고 들어와 모두의 인사를 받았다.
지오르베니는 곧장 율리시스의 아래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거룩한 창공의 주인, 성황 성하를 뵙습니다.”
묘하게 오만한 태도, 탁한 눈. 그리고 가슴에 달린 금색 뱃지.
원로원만이 달 수 있는 그 증표를 본 순간 머리에 섬광이 스쳤다.
“지오르베니.”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성하.”
가장 가까이 있던 측근의 배신.
‘잘못 생각했어, 분명히 이름이 지오르베니였어!’
요이델은 초조함에 플로테스를 꼭 껴안았다.
“꾸?”
“플로, 나 좀 쓰다듬어 줄래?”
“꾸웅, 꿍.”
플로테스는 얼마든지 그러겠다는 듯 앞발로 토닥였다.
“세상 구경은 즐거우셨습니까.”
“성하의 안배 덕분에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돌아왔습니다.”
지오르베니는 호쾌하게 웃었다.
‘그한테 그렇게 친절하면 안 돼요, 성하!’
속으로 외쳤지만 닿을 리 없었다. 요이델은 플로테스를 더 세게 껴안았다.
성하는 자신의 사람들에게는 다정하니까. 가장 가까운 삼 원로 중 하나인 그가 뒤에서 수를 쓰리라고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지오르베니 원로, 하일 원로는 함께 오지 않았습니까?”
“아하하, 성하께선 전부 알고 계셨군요.”
요이델은 저쪽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만일 귀가 코끼리처럼 컸다면 그쪽으로 펄럭 움직이는 게 보였으리라.
‘하일 원로님? 일 때문에 가신 거 아니었어?’
자신이 알기로 하일은 성하를 대신해 지상 대륙에서 여러 일을 해결하고 오기 위해 내려 보내졌다고 했다.
그런데 지오르베니와 함께 있었구나.
‘하일 님도 성하를 배신할까?’
그럴 리 없겠지만, 그런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쩐지 불길했다.
평소 하일의 성품이나 욕심을 떠올리자면 절대 그럴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 지오르베니는 그럴 만한 사람인가?
‘확실하지.’
지난번에 율리시스가 지적했던 대로, 요이델은 시종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거기엔 다 이유가 있었다.
‘라나가 지오르베니의 이름이 나올 때 안색을 어둡게 바꿨으니까.’
다른 원로들이나 대신전의 이모저모에 대해 얘기할 때는 나오지 않던 반응이었다.
요이델은 과거 많은 아이들과 다 같이 자랐기에 일찍이 눈치를 터득했다.
‘지오르베니는 표정 관리를 참 잘하는구나.’
내심 감탄했다.
지금 성하에게 말을 거는 저 태도…… 낯빛만 보자면 그저 호탕한 남자 같아 보였다.
“하일 원로신관은 지상 대륙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늦춰져 이번 탄신제에는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성하. 부디 성하께서 제 동료의 모자람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율리시스는 자비로운 미소로 수긍의 뜻을 밝혔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하나, 저도 성하께 소박한 진상품을 하나 올리려 합니다. 보여 드려도 되겠습니까? 성하께서 마음에 들어하실지 알지 못해 감히 의견을 여쭙습니다.”
지오르베니는 뭔가 대단한 걸 준비한 듯한 얼굴로 겸손한 척했다.
율리시스도 그의 자신감을 흥미롭게 보았다.
허락이 떨어지자, 연회장으로 품에 안아야 할 만큼 큰 상자가 들어왔다.
“저건……!”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은 선물에 모두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르륵.
“와!”
그건 주먹만 한 크기의 진주였다.
율리시스를 제외한 대연회장 내 모두에게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저렇게 큰 진주는 동화책 속에서조차 본 적 없었다.
‘내 선물은 저거에 비하면 훨씬 작구나.’
그리고 요이델은 지오르베니를 보면서 골똘히 다른 생각을 했다.
이 탄신 연회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율리시스였다.
신년제를 겸한다곤 하나 율리시스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도, 다른 주인공도 없었다.
그런데 지오르베니는 율리시스를 위한 선물을 통해 자신의 주목도를 높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성하, 못 보던 아름다운 부토니에를 착용하셨군요. 성황 성하와 아주 잘 어울리는 푸른 보석입니다.”
부토니에?
요이델은 놀라서 율리시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생일 때 건넨 푸른 보석을 착용하고 있었다.
요이델은 어안이 벙벙해 그를 쳐다봤다.
율리시스는 요이델을 바라보지 않고 지오르베니에게 옅은 형식적 미소로 화답했다.
‘저 뜻은 그건데, 설명하기 귀찮은데 왜 물어보냐는 얼굴.’
그래도 대외용 가면에 익숙한 그라서, 요이델이 아니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능숙해 보였다.
“그건 보통 승급할 때 받는 전통적인 부토니에 아닙니까?”
율리시스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지오르베니는 감탄했다.
“누군가의 선물이겠군요. 저로서는 상상 못 할 재치입니다. 정말로 성하께서 보유하고 있지 않은 선물일 테니 놀랍습니다.”
지오르베니는 진심으로 몰랐다는 듯 굴었다.
“직접 착용하신 것을 보면 신임하는 이에게 받으신 선물인가 봅니다. 정말 부럽습니다.”
지오르베니는 감탄을 표방했으나, 기저에는 누구에게 받은 선물인가 하는 물음이 숨겨져 있었다.
‘즉, 그는 성하에게 특별하게 생각하는 이가 있는가에 대해 묻고 있다.’
요이델은 그간 시종들에게서 들은 소문이 틀린 게 아니었음을 절감했다.
그는 교활한 남자라고.
시종들은 대체로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상당히 권위적이라고 하면서.
요이델은 순간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맞아, 이름이 지오르베니였어!’
그때야 생각났다.
그럼 지오르베니에 대한 소문이 단순한 낭설이 아니게 된다. 원작에서 그를 배신했던 최측근.
‘원작의 배신자, 지오르베니!’
요이델이 혼란스러움에 힘을 불끈 쥐던 그때, 율리시스가 가만히 미소 지었다.
“그렇습니다. 제가 가장 신임하는 신관에게 받은 부토니에입니다.”
“호오, 그렇다는 건…….”
“그리고 지오르베니의 진주를 받는다면, 그 역시 제가 가장 신임하는 신관에게 받은 진주가 될 겁니다.”
율리시스는 더 짙게 미소 지었다.
“이 망토의 라펠 체인 장식 역시 가장 신임하는 신관에게 받은 것입니다.”
“…….”
“지오르베니 원로는 기억하십니까? 그대가 어렸을 적, 제게 손 편지를 쓰며 반드시 높은 신관이 될 테니 기억해 달라고 하신 말씀.”
그는 정말 풋내기 신관을 귀여워하듯, 외관상 자신보다 나이가 두 배는 많을 듯한 지오르베니를 내려다보았다.
“원로는 진실되게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 편지는 아직 제게 있습니다. 역시 가장 신임하는 신관에게 받은 손 편지였으니.”
지오르베니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목의 핏대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썩 기분 좋은 상태가 아니란 걸.
“이 대신전의 모두가 제가 신임하는 이들입니다. 그대들이 아니었다면 천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성국은 유지될 수 없었을 겁니다.”
율리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잔을 들었다.
그를 따라 모두가 술잔을 머리 위로 들며 그에게 경배했다.
율리시스는 그런 위치에 있었다.
‘웃으면서 물 먹이시는구나.’
요이델은 안도했다.
그는 겉으로는 모두에게 감사한 척했으나, 결과적으로 지오르베니에게 서열을 알려 준 셈이었다.
율리시스는 지오르베니의 어린 시절부터 모두 봐 왔기에, 그는 자신의 상대조차 안 된다고 공식적으로 망신을 준 격이었다.
성황보다 훨씬 나이 든 외관과 원로라는 성황 바로 아래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율리시스에게는 손 편지를 쓰던 코흘리개에 불과하다는 뜻.
그의 귀여움을 부각하는 건 전혀 칭찬이 아니었다.
‘성하께서는 무례한 사람을 싫어하시는구나.’
말은 안 해도 그 자리의 모두가 느꼈을 거다.
아마 지오르베니는 티도 못 내고 속으로 분을 삭이고 있겠지. 그는 오랜만의 귀환으로 인한 피로를 핑계로 먼저 연회장을 떠났다.
딸꾹.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 성하…… 저는 괜찮아요…….”
요이델은 가물가물한 정신을 겨우 다잡았다.
“술을 혼자 다 드시면 어쩌자는 것인지.”
율리시스는 햇병아리 겸 주정뱅이를 보며 혀를 찼다.
요이델은 방금 전, 연회에서 율리시스의 잔에 채워진 술이란 술은 몰래몰래 족족 마셔 버렸다.
‘성하는 술을 한 잔만 마셔도 취하는 체질이시니까.’
그러나 이런 연회에서는 형식상 먹어야 할 때가 있었다. 요이델은 그의 곤란함을 알기에 플로테스를 율리시스에게 앉히고, 졸린 척 유리잔을 깨거나 투정을 부려 자신에게 달라고 부탁했다.
“꾸.”
플로테스는 그의 무릎에 앉는 걸 불쾌해했으나, 요이델의 부탁이니 들어주었다.
“푸힛, 제가 술이 잘 들어가는 체질인가 봐요. 성하, 술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아세요? 증류수나 발효주 같은 게 있죠. 그런데 이 냄새, 이상하지 않아요? 병원 냄새 같아요. 술을 또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알콜이요. 알콜이 무슨 원소 기호인지 아세요? 저는 알아요. 저는 다 알아, 흡.”
율리시스는 취해서 주절거리는 요이델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연회가 파한 뒤 율리시스는 마법으로 몰래 요이델을 끌고 나왔다.
이대로 두면 술을 흡수하는 천이 될 게 분명해서.
어디 가서 추태를 부리는 걸 두고 보는 것보다 자신이 데리고 오는 게 나았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목격한 시선이 있었다.
‘하일의 기억 속 성하의 반려가 바로 저 소년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