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Remove the Kind Protagonist’s Mask RAW novel - Chapter (76)
76화
“어두워서 잘 안 보이네.”
왕궁의 복도는 어두컴컴하고, 여기저기 사람들이 있어서 길을 트기 힘들었다.
요이델은 재빠르게 원래의 옷이 있는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쿵.
“휴우…….”
방금 전의 일로 가슴이 콩닥거리고, 또 한편으로는 일이 해결됐다는 기분 좋은 설렘으로 들떴다.
‘하일 님도 오랜만이었어.’
오랫동안 안 보여서 걱정했는데, 걱정이 현실이 될 만큼 더 나쁜 안색으로 나타났다.
오랜 최면향 중독에 좋은 약초가 뭐가 있을까?
머릿속을 쉴 새 없이 굴리며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생각해 나갔다.
‘시그레틴 약초가 좋겠어. 시원한 시트러스 향이랑 섞으면 맡기에도 좋고, 독소를 빨리 빼내는 데 좋을 거야.’
그리고 정말로 성하께서 와 주실 줄은 몰랐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가 정말 상냥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물론 처음 만났을 때의 강렬한 기억이 잊힌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덮을 만큼 좋은 기억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방금 전에는 예전 성하의 얼굴을 본 것 같긴 했지만…….
‘아카코스가 이상한 말을 해서 그런가 봐.’
돌아갈 생각에 들떠서 그런지 이런저런 생각이 났다.
율리시스는 성황으로서 성국을 아끼고 사랑한다.
그리고 자신은 그의 관할하에 있는 신관.
‘성하는 책임감이 강하시니까.’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구였어도 똑같이 대해 줬을 게 분명했다.
오히려 그와 그런 일로 엮이지 않는 누군가였다면 더 잘 대해 줬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금도 요이델을 제외한 모든 신관들에게는 늘 상냥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아, 혼인을 압박하는 하일 님도 예외지. 깜빡했다.’
요이델은 가발을 벗고 등과 허리의 리본을 풀었다.
“아앗, 손이 안 닿아.”
이런 화려한 드레스는 어색하고 신기했다. 아카코스…… 아니, 아키스였을 때 리본을 묶어 줬던 것과는 또 달랐다.
입고 벗기 간편한 신관복만 입고 다녀서 그런지, 단추가 엄청 많고 다른 사람의 손이 필요한 이런 옷은 낯설고 신기했다.
백색 위주의 신관복이 아니라, 화려한 문양과 옷감 그리고 색감이 듬뿍 들어간 드레스.
어깨가 드러난 데다가 부드럽고 정교하게 짜인 레이스가 몸을 감싸고 움직일 때마다 사라락 펼쳐졌다.
‘……아카코스가 사 준 선물이지만, 가져갈 수는 없어.’
마음은 고마웠지만 자신은 남장 중이니까.
게다가 이걸 가져갔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요이델은 끙차, 뛰며 날개뼈 부근의 리본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앗, 아, 안 닿잖아……!”
굉장히 어정쩡했다.
이 상태로 나가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요이델은 낑낑거리며 창가에 다가가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 일이 있었으니 혼란스러울 만하지.”
저 창 너머로 성기사들이 떠날 준비를 하는 게 보였다.
그렇다는 건, 성하께서도 곧 떠나신다는 건데?
그가 더 빨리 자신을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 시간이 어그러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요이델은 다급해져 깡충깡충 뛰며 옷을 벗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유연함이 부족했다.
훌쩍.
시무룩해져 울먹이던 요이델은 뭔가를 발견하고 씩씩하게 일어났다.
“어떡해…… 아! 저쪽 고리에 걸고 풀면 되겠다!”
그녀는 창문의 양옆에 달린 커튼 고리를 향해 다가갔다. 저기에 리본을 걸어 풀어 볼 생각이었다.
“텔레파시는 좋았지만, 앞으로는 조금 곤란하겠어.”
요이델은 이후의 상황을 생각해 봤다. 아마 성하가 자신을 더 시도 때도 없이 부려 먹을 것 같다.
‘하지만 아무 일 없으셔서 다행이야.’
원작의 배신자를 처리한 것만으로도 참 다행이었다. 그의 안위에 위협이 되는 건 없애야 성하도, 자신도 안전하니까!
“아얏!”
그때, 등이 커튼 고리에 주욱 긁혔다.
“아, 따가워…….”
분명히 붉은 상처가 났을 거다. 요이델은 잠시 아파하다가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힐!”
놀란 요이델은 재빨리 응급 치료 마법을 걸었다.
간단한 마법으로 몸을 치료한 요이델은 깨끗이 사라진 통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아프면 성하도 아프니까.’
요이델은 커튼이 반쯤 쳐진 발코니 창에 몸을 기대고 한숨 쉬었다.
드레스 위에 신관 옷을 덮어 입을 수는…… 없겠지?
하는 수 없지.
그럼 아깝지만 이 예쁜 드레스를 찢는 수밖에.
“고마웠어, 아카코스.”
날카로운 게 보이지 않아, 요이델은 화병을 넘어뜨렸다.
쨍그랑!
“휴우…….”
바로 그때.
방문이 조용한 소리를 내며 침착하게 열렸다.
‘어?’
요이델은 깜짝 놀라 커튼 안으로 쏙 들어갔다.
이 불길함은 뭘까?
그냥 시종일 수도 있는데. 그런데 왠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요이델은 커튼과 발코니 사이에 숨어 다시 드레스를 고쳐 입었다.
“……요이델 님?”
열린 발코니 밖에서 바람결에 나뭇잎들이 차르르― 흩날렸다.
“요이델 님.”
그곳에 율리시스가 있었다.
그는 어딘지 급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아주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안 돼!’
요이델은 기지를 발휘해 더 깊이, 발코니로 들어가 커튼을 치고 숨었다.
하마터면 크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하지만 너무 놀라니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몸이 덜덜 떨렸다.
커튼은 발끝까지 가려 주지 못한다. 그리고 드레스는 커튼보다 길다.
마침 달빛은 오늘따라 찬란하기 그지없었다.
구름이 잔잔히 흘러 방 안이 가려진 달빛에 어두워지고 드러나기를 반복하는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이델 님.”
벌써 세 번의 부름이었다.
요이델은 입을 떼려다 말았다. 긴장으로 바짝 마른 입술만 겨우 축였다.
율리시스가 요이델의 이름을 세 번 불렀을 때, 그 목소리의 온도는 각각 달랐다.
첫 번째는 안도였다.
두 번째는 의문이었고.
‘세 번째에는 분노가 있었어.’
요이델은 커튼을 구명줄처럼 꼭 붙잡고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바라보려 했다.
눈만 빼꼼히 내밀고, 저 어두운 방문 앞에 서 있는 그를.
달칵.
방문이 닫혔다.
덜컹.
그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잠갔다.
더 밝은 곳에 있는 요이델에게는, 율리시스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드레스 차림만으로도…… 알아채셨을까?’
그의 발아래에 붉은 가발이 있는 게 보였다. 그때 그의 발걸음이 움직였다.
그녀를 향해.
“어디에 계신가 했습니다.”
“…….”
“여기 계셨군요.”
율리시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는 오히려 잔잔히 미소 짓고 있었다. 안도한 듯이. 그러나…….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오래 보지 못한 듯하여. 괜찮으실지 염려되어.”
손바닥 위의 물체를 보며 속눈썹을 내린 채 미소 짓던 율리시스가, 다음 순간 요이델을 직시했다.
“아.”
짐승 같은 시선에 놀라 딸꾹질이 새어 나왔다. 요이델은 입을 막고 연신 어깨를 들썩였다.
그의 푸른 눈에선 흡사 안광이라 할 수 있는 기묘한 광채가 느껴졌다.
“그런데 오래 보지 못한 이가 아니라, 처음 보는 이가 계시는군요.”
요이델의 동그란 눈이 점차 크게 뜨였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짙은 분노가 묻어 나왔다.
커튼 뒤에 숨었던 요이델은 고개를 들고 율리시스를 올려다봤다.
그의 짙은 눈길을 피할 수가 없었다.
커튼을 꼭 잡은 요이델의 손을 잠시 내려다본 율리시스는, 이어 피식 웃었다. 상황이 우스워서가 아니었다. 분노가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미소였다.
살기에 가까운 묵직한 분노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지금의 당신께 가장 필요한 물건이겠군요.”
율리시스의 손바닥 안에는 요이델의 반지가 있었다.
“이것.”
율리시스는 요이델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는 아주 가까이에서 요이델의 눈과 코, 뺨, 목젖이 도드라지지 않은 부드러운 목선을 훑어보았다.
“이제 알겠습니다. 강력한 환각 마법 반지군요.”
“…….”
“그리 귀중한 유품이었다면 잃어버리지 마셨어야 합니다.”
“…….”
“끝까지 저를 속이실 생각이셨다면, 영원히 들키지 마셨어야 합니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너진 미간과 할 말을 참는 붉은 입술. 시린 파란 눈동자.
그의 눈빛은 얼음보다 차가웠다.
얼음은 빛을 반사하기라도 하지만, 그의 시선은 한없이 짙고 가라앉아 있었다.
율리시스는 해석하기 힘든 얼굴로 요이델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등에 상처를 내셨습니까? 제게 들키기 전, 드레스를 벗기 위해? 이 차림은 대체.”
그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하, 숨을 뱉었다가 눈을 찡그렸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니고, 자조라기에는 너무 허무한 듯했다.
“왜 모르는 사람 같은 당신이, 제가 가장 잘 아는 사람과 똑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까.”
“아…….”
“목소리는 더 똑같군요. 입매도, 입술을 깨무는 습관도.”
율리시스는 요이델의 생각보다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요이델 너머의 무언가를 보는 듯 허전해 보였다.
요이델은 직감했다. 분노보다 무서운 게 세상에 있다는 걸.
화를 내고 혼을 내는 것만이 분노가 아니라는 걸.
“모두에게 가장 진실한 당신이 제게는 비밀을 감추고 계셨군요. 제 생각이 틀리길 바랍니다.”
율리시스는 그녀의 하얗고, 남자치고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고 생각한 손을 잡았다.
그의 푸른 눈이 그녀를 제대로 마주한 순간.
쿵.
요이델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메말라 갔다.
율리시스는 어떤 질문도 더 하지 않았다.
다만 요이델의 작은 손을 쥐고 율리시스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그러나 그의 검이 아닌 그녀의 손톱으로.
그녀의 목이 아닌 자신의 목에 한 줄기 선을 그었다.
그와 그녀의 거리를 구분 짓는 것처럼.
살결이 긁혀 빨갛게 오른 그 한 줄기 붉은 선은 목에서부터 쇄골로 내려와 율리시스의 목에 붉은 흔적을 남겼다.
요이델의 목도 마찬가지였다.
율리시스는 자신의 상처와 똑같은 상처가 생기는 하얀 목덜미를 보면서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가슴이 저미는 통증은 이런 것인가.
목이 따끔따끔 아파 왔다. 이 작은 손톱의 할큄이 죽음을 넘나들던 전투보다 힘겨웠다.
겪은 고통 중 가장 거대한 아픔이었다.
목이 베일 뻔해도, 몸이 관통당할 위기를 겪어도 고통이라 여긴 적 없었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고통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 숨 막히는 두려움과 배신감은 분명 고통이었다.
“…….”
율리시스의 눈빛에는 분노를 초월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당신을 어디서부터 믿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제게…….”
“…….”
“그대가 제가 찾는 사람이 맞습니까?”
궂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막 쏟아지기 시작한 작은 물방울들이 그들에게로 가 흩날렸다.
이 작은 입자의 채찍질이 유난히 쓰라렸다.
그러나 더 심장을 콕콕 찌르는 건 율리시스의 얼굴이었다.
그는 얼핏 슬퍼 보일 만큼 허탈하게 미소 지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겨우 뜬 그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가장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아무 감정 없는 표정. 모르는 사람을 보듯 경멸 섞인 차가운 눈빛으로.
“이게 당신의 진짜 모습입니까, 요이델 님.”
그가 조용히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