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touch it, it'd all be profit RAW novel - Chapter (223)
11월 경매 당일.
>크리스티 서울> 경매장 3층, 특별 사무실.
미스터 빅은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테이블 위에 쏟아냈다. 잔뜩 심통난 얼굴로.
“······이거 보게.”
보래서 봤더니.
해외 유명 신문, 경제지들이었다.
>포브스>, >타임>, >뉴욕 타임즈>, >파이낸셜 타임즈>, >월스트리트 저널>······.
언론사마다 색깔도, 레이아웃도 다 달랐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긴 했다.
[ 승승장구의 아이콘에서 HN그룹 수장까지 ] [ 오랜 꿈에서 영원한 미래로, HN 신유원 ] [ 한국 재계에 부는 세대 교체의 바람: 역풍이 될 것인가, 상승기류가 될 것인가 ]전부 내 사진이 박혀있다는 거.
‘휴, 돌아가면서 인터뷰하느라 엄청 바빴었지.’
나는 대충 들춰보는 시늉을 하다가 말했다.
“봤어요.”
그러자 팔짱을 끼며 돌아앉는 미스터 빅.
“그럼, 나한테 뭐 할 말 없나?”
“이걸 언제 다 모으셨어요?”
“아니, 그 말이 아니지 않나!”
화가 났는지, 입술을 질끈 무는 미스터 빅.
이 양반은 나이가 들수록 귀여워지는 것 같다.
“내가 이런 걸로 자네 소식을 들어야 하나? 우리가 정말 친구라면, 이런 일이 있을 때 먼저 연락해주고 그래야 하지 않겠나!”
아니, 한 달 전 일을 지금 꺼내시네.
‘많이 속상하셨나?’
이럴 때 ‘삐졌어요?’ 한 마디면 완승인데.
영어로는 그 복잡미묘하고 개빡치는 뉘앙스를 완전히 살릴 수가 없어서 아쉬울 따름이었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대꾸했다.
“회장님 서프라이즈 좋아하시잖아요. 그래서 저도 서프라이즈 하려고 했던 건데. 이러면 좋아하실 줄 알고.”
“아······ 그런 거였나?”
“기분 많이 나쁘셨어요? 맞아요, 제가 먼저 연락할 걸 그랬네요. 저 회장 됐다고. 재미없게. 그쵸?”
“아니, 그런 걸로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그냥 좀 섭섭했다는 거지······.”
민망했는지.
스윽 시선을 돌리는 미스터 빅.
‘이제 좀 풀리셨나.’
나는 잡지들을 뒤적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이걸 직접 다 모으신 거예요?”
“······모으긴, 어디서 받았지.”
“받아서 그걸 또 여기까지 가져오신 거예요?”
“아, 됐네! 알겠다고!”
미스터 빅은 주섬주섬 잡지들을 챙겨서 소파 뒤에 숨기더니 선심 쓰듯 말했다.
“어쨌든······ 축하하네.”
“하하, 감사합니다.”
“됐어. 이 얘긴 그만하자고.”
미스터 빅은 헛기침을 하며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그래도 기분이 좀 풀린 듯한 얼굴.
중계화면 속에선 경매가 한창이었다.
한국 최고의 경매사, 이형욱이 다음 작품을 소개했다.
[ 최근 한국 미술계에서 주목하는 신예, 김형정의 >고착과 애착>입니다. 여기 서울경매에서밖에 볼 수 없는 작품이죠. ]김형정 작품도 좋지.
알아서 우리한테 찾아온 복덩이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지켜보다가.
미스터 빅에게 물었다.
“이번에 눈독 들이는 작품 있으세요?”
>크리스티>의 메인 스타디움은 뉴욕.
경매에 참여하려는 게 아니면 미스터 빅이 여기까지 올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예상과 달랐다.
“자네랑 일하는 게 이번이 마지막이지 않나. 마지막을 함께해서 나쁠 건 없지.”
아, 그랬구나.
그런데 뭐······ 마지막이라고 할 것까지 있나.
“마지막이라뇨. 앞날은 모르는 거죠.”
“맞아, 자네 때문에 >HN>이 쫄딱 망할 수도 있지. 그렇게 되면 돌아와. 언제든 받아주지.”
자기 스스로도 만족스러운 답이었는지.
개구쟁이처럼 웃는 미스터 빅.
나도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런 건 아니구요. 채연이가 그러더라구요. 언제든 물러나고 싶으면 물러나도 된다고. 그럼 언젠가······ 다시 같이 일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말없이 미소 짓는 미스터 빅.
“그리고 미스터 빅. 우리가 무슨, 일로 만난 사이예요? 저희 영원히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잖아요. 뭐, 원하시면 앞으로 마티 라니코 씨라고 정중히 불러드리구요.”
“어휴, 징그러워.”
미스터 빅은 손을 한차례 내젓더니.
뜬금없이 물었다.
“그래서 어디 주식을 사면 되나?”
“네?”
“>HN그룹>에 계열사가 엄청 많지 않나. 10년 보고, 제일 많이 오를 종목 몇 개 추천해주게.”
“투자하시게요?”
“투자해야지. 자네가 누군지 뻔히 아는데 이 기회를 놓치란 말인가? 세계에서 제일 빛나는 황금이 될 게 뻔한데 미리 좀 주워둬야지.”
싱긋 웃어보이는 미스터 빅.
‘참······ 멋있는 사람이란 말이지.’
워낙 짓궂고, 돌발적이라 곤혹스러울 때도 많았지만······ 이렇게 부담스럽지 않고 유쾌한 방식으로 날 지지하고 믿어줬던 사람이 바로 미스터 빅이었다.
‘인연이란 게 신기해.’
뉴욕 경매장에 처음 갔을 때만 해도.
그 옥상, 헬기 앞에서 이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게 가까워질 줄은 몰랐는데······.
나는 웃으며 답했다.
“엄선한 종목으로 알려드리죠.”
“고맙네.”
“제가 더 고맙죠.”
“아니, 내가 더 고맙네. 자네가 이렇게 된 거, 전 세계 80억 명이 다 아는데 나만 모르게 해줘서 아주 고마워 죽겠어.”
크큭, 진짜.
나는 실실 웃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보고 계세요, 저 좀 내려갔다 올게요.”
“응? 무슨 문제 생겼나?”
“문제 생길 게 뭐 있나요. 철저히 준비했는데.”
“그럼?”
눈이 동그래진 미스터 빅.
나는 재킷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
“오늘은 제가 사고 싶은 작품이 있어서요.”
미스터 빅, 제가 말했죠.
마지막이 아니라니까요.
여기 >크리스티>에 저는 항상 올 거고.
앉아있을 거예요.
다만 자리가 조금 달라질 뿐이죠.
*
2층 VVIP 전용 대기실.
문을 열자.
기다리고 있던 김규태가 내게 번호판 하나를 내밀었다.
“회장님, 여기.”
“감사합니다. 혼자 안 심심하셨어요?”
“전혀요. 스트레스가 다 풀립니다.”
아, 얼굴만 봐도 그래 보이긴 하네요.
나는 웃으며 비어있는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바로 옆 소파에 앉아있던 자가.
날 휙 쳐다보며 말했다.
“오랜만이군.”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인 >진성> 총수.
진승건이었다.
옆에 앉아있던 아트딜러 허진태도 내게 고개를 숙였고, 나도 가볍게 목례하고 답했다.
“예,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냈지. 정 회장은?”
“여행 가셨습니다. 제주도에.”
보내오는 사진만 봐도 장모님이랑 할머님이랑 요즘 엄청 재밌게 지내는 것 같더라구요.
“크흠······ 팔자 좋군.”
“그럼.”
인사를 마치고, 푹신한 소파에 자리잡았다.
훤히 내려다 보이는 경매장 전경.
[ 현재 7억 5천, 7억 5천······ 다음은 8억, 8억입니다. ]그러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내가 처음으로 큰돈을 벌었던 곳.
>크리스티 뉴욕>.
처음엔 정말 기겁했었다.
손 한 번 들면 1억, 2억씩 가격이 뛰고.
그 릴레이가 조금만 길어지면 집 한 채가 왔다갔다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처음부터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에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했었는데.
······이제 내가 그곳에 있었다. 그것도 가장 높은 자리, 가장 호사스러운 좌석에.
“회장님, 이제 나올 차례입니다.”
“아, 예.”
물론 이번 경매, 가장 뛰어난 작품도.
내가 거머쥘 생각이었다.
[ 자, 많은 분들이 기다리셨던 작품입니다. 불과 두 달 전에 마무리한 걸로 알려져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죠. 추상회화의 대가, 서이수 작가의 신작! >무감>을 소개합니다! ]서이수의 >무감無感>.
이탈리아에서 내 눈으로 작업과정을 목격했던 바로 그 작품이었다.
경매사 뒤편 대형 스크린으로.
>무감>의 작품사진과 영상이 흘러나왔다.
그랬다. 전반적으로 >무음>과 매우 흡사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 그렇기에 >무감>은 지난 10년, 서이수 작가의 작품세계에 나타난 변화를 오롯이 관찰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무음>이 소리 없는 세계의 양면성, 결핍과 충족을 모두 표현한 작품이었다면.
>무감>은 절망과 고독 그 자체.
영감이 사라진 예술가가 느끼는 좌절을 한 치의 여과없이 그대로 드러낸 작품이었다.
‘······.’
>무감>을 보고서야 깨달은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 덤덤하게 고민을 털어놓던 서이수가 속으로는 피를 토하며 절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 이 그림에 다 버렸어요. 다 쏟아냈고. 이제 괜찮아요. ]이탈리아에서 헤어지기 직전, 그 어느때보다 후련해 보이던 서이수의 얼굴.
[ 미켈란젤로도 그랬는데 저라고 별 수 있나요. 다시 시작해야죠.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그리고 서이수.
지금 생각해도 운명 같은 만남이었다.
‘정말 다행이지······.’
그러는 사이, 작품 소개는 이어졌고.
김규태는 내게 작게 물었다.
“회장님, 그런데 이번엔 왜 이렇게 빨리 내놓게 된 겁니까?”
“저 작품이요?”
“네.”
서이수가 원했어요.
“무감각한 상태는 이제 질색이라고. 경매에 빨리 내놓길 바라더라구요.”
“······그랬군요. 그런데 지나가다 들었습니다만, 진 회장님도 관심이 많더군요. 꽤 큰 판이 될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경매사는 시작을 알렸다.
[ 놀라지 마십쇼. 시작가는······ 250억, 250억 원입니다! ]나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1층에서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대리인에게.
“565억, 응찰해주세요.”
[ 아······ 회장님. 시작가 250억입니다. 혹시 265억 말씀하신 건가요? ]진승건이 >무감>에 관심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직도 서이수의 작품 하나를 못 가지고 있으니 안달이 났겠지.
그러나 아쉽게 되었지.
그가 어느 가격대에서 물러날 계획인지는 「매의 눈」으로 이미 확인했다.
“아뇨, 500 더하기 60이면 몇이죠?”
[ 560입니다. ]“네, 560억. 응찰해주세요.”
[ 아······ 확인했습니다. ]이내 경매장에 울려퍼지는 우렁찬 목소리.
[ 560억! ]경매장 전체에서 쏟아지는 탄성.
경매사는 바로 기름을 부었다.
[ ······560억! 시작부터 560억입니다! 페라리의 런치 컨트롤을 켜도 이렇게 화끈한 출발은 할 수 없을 겁니다! 현재가 560억! ]고개를 돌렸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의 진승건과 허진태.
그러나 차마 아무말도 뱉지 못하고 있었다.
‘더 안 하십니까?’
혹시 충동적인 응찰이 나올까 싶었는데.
진승건은 역시 원칙주의자.
‘그렇다면······.’
제 30대, 마지막을 추억하는 의미에서.
그리고 제가 레오나르도보다, 미켈란젤로보다 더 애정하는 작가를 응원하는 의미에서.
[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다음은 570, 더 없습니까? ]이 작품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진 회장님.
경매사는 낙찰봉을 휘둘렀고.
경매장 전체에 기분 좋은 공명음이 울려퍼졌다.
[ 낙찰! 축하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내 눈앞에······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지난 기간의 데이터를 재정렬합니다.
──당신에 대한 데이터가 추가, 삭제, 갱신되었습니다.
딱딱하고 건조하기 그지없는.
시스템 메시지.
‘이게 얼마만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울컥하는지.
──수집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다음 스테이지의 정체성이 변경됩니다.
그런데 그건 무슨 말이야.
다음 스테이지의 정체성이 바뀐다고?
원래 《영광의 40대》 아니었어?
무슨 게임 속편처럼 협박했잖아.
높아진 난이도, 험난한 여정, 필연적인 이별과 노화, 어쩌구 저쩌구.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러자.
그에 답하듯 떠오르는 다음 메시지.
──축하합니다! 대단하군요!
──당신은 이미 《찬란한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
──《영광의 40대》를 초과 달성하였습니다!
──초과 달성 보상은 다음 스테이지가 시작되는 대로 지급됩니다.
아······ 초과 달성해버린 거야?
찬란한 영광이라.
좋아. 너무 듣기 좋은 말이네.
──다음 스테이지는 충분히 대비하셨습니까?
──각오는 다졌습니까?
당연하지.
그때 엄청 무섭게 협박했잖아.
그래서 열심히 살았어.
찬란한 영광? 거기까진 잘 모르겠지만.
내 30대.
뜨겁긴 했어, 엄청.
──좋습니다.
──그럼 《군림하는 40대》에 대비하십시오.
군림하는 40대······라고?
──《군림하는 40대》는 당신에 필적하는 영광을 얻은 자들이 당신의 앞길을 가로막을지도 모릅니다.
──그 어느때보다 혹독한 시련과 강력한 경쟁자가 당신을 기다리겠지만, 그것을 뛰어넘는다면 당신은 이 세계의 미래를 바꿀 수 있습니다.
──쟁취하십시오. 그리하여 군림하십시오.
──그럼 조만간 튜토리얼에서 뵙겠습니다.
그러더니 단번에 사라진 메시지.
군림이라······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말은 아닌데.
그치만 까짓 거.
내 식대로 군림해줄게.
자신 있어.
“더 보실 겁니까?”
“아, 아뇨. 사무실에 올라가 있을게요. 마저 보시고 먼저 가셔도 됩니다.”
“예, 회장님.”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며.
경매장을 바라보았고.
‘탐코코, 조만간 또 재밌어지겠는데?’
두 여우는 여유로이 공중을 유영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오늘도.
*
허공을 날던 순백의 여우는 무심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붉은 여우는.
어느새 코코 곁으로 날아와 말을 걸었다.
[ 들었어? ] [ 뭘. ] [ 새로 시작된대! 퀘스트 있잖아, 퀘스트! 벌써 9년이 지났나 봐! ]잔뜩 신이 난 탐.
마구잡이로 곡예비행을 펼치며 소리를 질렀다.
[ 그래서 내가내가내가 튜토리얼 미리 보고 왔거든? 장난 아니야, 엄청 어려워! 우리 주인이 잘해낼지 모르겠어! 잘하겠지? 역시? ]그러나 코코는 덤덤할 뿐.
[ 쳇, 또 귀찮아지겠네. ] [ 코코, 왜 또 그렇게 뿔났어! 너도 예전에 재밌게 했잖아! ]신유원이 《상점》에서 얻어낸 이름 변경권.
여우들이 서로를 ‘탐’과 ‘코코’로 인지하고,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 내가 퀘스트를 재밌게? 전혀. ] [ 에이, 거짓말한대요. 나는 다 알지. 너 우리 주인 만나기 전에는 주인들한테 막 대했잖아! ] [ 우리 주인은 무슨, 저 녀석이. ]코코는 걸어가는 신유원을 일별했고.
탐은 들은 체도 안 하고 제말만 했다.
[ 주인들이 재료 가져와도 다 뱉었잖아? 일부러 세게 뱉어서 재료 깨뜨리고, 부수고, 난리도 아니었잖아? 코코, 완전 성격 최악이야! ] [ ······아, 시끄러워. ]코코는 수다쟁이에게 벗어나려 속도를 높였지만, 탐에게 따라잡히는 것도 금방이었다.
[ 맞잖아, 맞잖아! 아니면 아니라고 하든지! ]코코는 참다참다 못해 휙 멈춰서고는.
탐에게 쏘아붙였다.
[ 너도 그랬잖아, 왜 나만 그런 것처럼 말해! 너도 엉망진창이었잖아! ] [ 내가······ 엉망진창? ]탐은 고개를 처들고 고민하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 맞아! 우리 주인 말고는 다 엉망진창이었지, 매번 그냥 도망쳐버렸다구! 히히히힣! ] [ ······멍청이. ] [ 맞아맞아! 넌 늦게 와서 모르지? 난 우리 주인 처음 만났을 때, 이 사람도 엉망진창인 줄 알았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입에서 알콜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양질 전환」을 제대로 이해는 했나 싶었거든? ]정신없이 말을 늘어놓는 탐에게.
코코는 표독스럽게 말했다.
[ 그럼 그때 버리지 그랬어. 그랬음 이렇게 귀찮지도 않았을 텐데. ]하지만 붉은 여우는 혀를 쭉 내밀며.
해맑게 웃을 뿐이었다.
[ 그런데 난 처음이었거든. 나한테 이름을 지어준 주인도. 나한테 사랑한다고 했던 주인도······. 우리 주인, 아무래도 너무 로맨틱하지 않니? ]탐은 온몸을 배배 꼬며 신유원을 바라봤고.
코코는 눈매를 찌푸리며 물었다.
[ 저 녀석이······ 너한테 사랑한다고 했다고? ] [ 응응, 넌 늦게 와서 모르지? 나한테 그랬다니까. ] [ ······정말로? ] [ 응! ]코코는 꼬리를 말며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저 녀석이 자신에게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런 코코에게 몸통을 부딪치며.
짓궂게 묻는 탐.
[ 왜? 신경 쓰여? 어차피 넌 상관없지 않아? 항상 주인한테 틱틱대잖아. 주인보다 다른 걸 더 좋아하잖아! 무슨 위대한 존재에 존경을 보내느니, 숨겨진 모순성을 밝히느니, 어쩌고 저쩌고, 어려운 말 투성이! ]장난이 과했을까.
코코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탐의 주둥이를 밀어붙였다.
[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 [ 오오오, 싸우자고? 주인, 이것 봐! 코코가 나 괴롭혀! 주인! ]탐이 엄살을 부리는 사이.
코코는 시선을 돌렸다.
벽과 벽, 그 뒤의 벽과 벽 너머.
>크리스티 서울> 경매장 보관실에 있는 커다란 캔버스. 서이수의 >무감>.
코코는 도도하게 코를 들며 말했다.
[ 그래, 난 원래 그래. 멋지고 세련된 거라면 환장해. 순수한 향기를 좋아하고, 절묘한 촉감을 사랑해. 환상적인 맛이라면 으으······ 절대 못 넘어가지. ] [ 인정했다! 인정해버렸다! ]탐은 호들갑을 떨었지만.
코코는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 근데 저 녀석, 저 녀석이 그래. ] [ 저 녀석? 우리 주인? ] [ 그래, 인정하기 싫지만. 근사한 향이 나고 맛이 나······ 촉감도 좋아. 미치도록. 저 녀석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행복해져. ] [ ······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운 탐.
[ 코코, 너······ 방금 거짓말한 거 아니지? 우리, 거짓말하면 사라져! ] [ 거짓말 아니야. 그렇잖아. 안 사라졌잖아? ] [ 어, 그러네? 진짜네? ]탐은 혼자 뱅글뱅글 돌면서 난리를 쳤고.
코코는 피식 비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무감>에서 신유원에게로.
[ 그렇잖아. 안 그랬으면 내가 벌써 도망쳤지. 저 녀석을 따라다니겠니······. ] [ 그러네? 맞네! 계속 따라다니네! ] [ 그래. 저 녀석이 보여준 것도, 들려준 것도, 먹여준 것도······ ]코코는 문득 떠올렸다.
유럽 최초의 백자와 웃고 있는 기사.
생존보험과 갓냥이.
그리고 서이수,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그 위대한 존재들의 편린을.
[ ······다 최고였고. ] [ 정말? 최고였다고? 우와! ]탐은 코코의 등과 배를 오가며 날았고.
코코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 아, 저리 좀 가! ] [ 알았어! 저리 갈게! ]다시 거리를 벌린 탐은 뭔가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 아, 맞아! 8년 전에 시스템이 나한테 물어봤었어! 주인 옆에 영원히 남을 거냐고! 내가 동의해야 된다고! ] [ ······그러니까. ] [ 그럼 너도 동의한 거구나! ] [ ······그래. 그랬다니까. ]탐은 천연덕스럽게 웃더니.
휙 몸을 날렸다.
[ 가자, 코코! 주인 집으로 돌아가나 봐. ] [ 아, 집에 가기 싫은데. ]코코는 못마땅해하며 그 뒤를 따랐다.
[ 왜 가기 싫어? 아, 까미 때문에? ]코코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탐은 고개를 내저었다.
[ 아니야, 싫어하지 마! 사나워 보여도 괜찮은 녀석이야! 그냥 아직 낯선 거뿐이야! ]사나워 보여도 괜찮은 녀석이라고?
글쎄, 코코의 본능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았다.
[ ······또 괴롭히기만 해봐. 내가 죽여버릴 거야. ] [ 누굴 괴롭혀? ] [ 누구겠어. ]그 대답에 탐은 코코의 시선을 따라갔고.
그 끝에는 신유원이 있었다.
[ 코코, 우리 주인 진짜 좋아하는구나? ] [ ······이제 그만해. 입 아파. ] [ 히히히힣! ]마치 자기 일인 양 만족스럽게 웃는 탐.
코코는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 탐, 저 녀석 너무 좋아하지 마. ] [ 왜? ] [ 영원히 남기로 한 건 우리 선택이었지? ] [ 우리 선택이었지. 그런데? ]영문을 몰라 되묻는 탐에게.
코코는 말했다.
[ 하지만······ 저 녀석은 영원하지 않을 거야. ]어느새 축 늘어진 두 귀와 꼬리.
[ 나도 알아! 주인은 영원할 수 없어! ]여전히 즐거워 보이는 탐.
코코는 그런 탐이 미웠다.
[ 그게······ 그렇게 즐거울 일이야? ] [ 어쩔 수 없잖아! 사라진다는 건! 그치만 주인이랑 같이 있으면 즐겁다고! 그건 영원해! ] [ ······멍청해가지고. ] [ 멍청한 건 너고! ] [ ······뭐라고? ] [ 일단 가자! 주인이 찾아! ] [ 알았어. ]팽그르르르──
동시에 몸을 말며 날아가는 두 여우.
[ 근데 탐. ] [ 왜왜? ] [ 저 녀석이 나한테도······ 사랑한다고 한 적 있었어? ]눈알을 굴리는 것도 잠시.
탐은 얼른 답했다.
[ 응! 있었어! ] [ ······그래? ] [ 당연하지! 엄청 많았어! ] [ ······. ] [ 좋아? ] [ 아니. ] [ 코코, 거짓말하면─ ] [ 응, 좋아! 좋다고! ] [ 히히히! ]그렇게 아웅다웅하는 사이, 좁혀진 거리.
눈앞에 나타난 한 남자.
“탐코코, 이리 와 봐!”
그 청량한 목소리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여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언제나처럼.
오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