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124
123화
장독대가 있는 풍원한정식의 뒷마당.
“오케이.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후…….”
임유나가 무릎을 짚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수고하셨어요. 생각보다 잘 따라오시던데?”
땀으로 반들반들해진 이마를 슥 훔친 임유나가 옆에 놓인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으, 시원해……. 이런 기초 체력 운동은 꾸준히 해 왔거든요.”
“그래요? 좋습니다. 일단 운동 능력은 대강 파악했으니까,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시작합시다.”
“좋아요.”
라세흠은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임유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사장님은 가게 일 안 보셔도 됩니까?”
“이제 가 봐야죠. 내일도 이 시간에 할까요?”
“그럽시다. 전 여기서 마저 운동해야겠네요.”
임유나가 뒷문을 통해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숨을 깊게 들이쉰 라세흠이 눈을 천천히 감았다.
‘오늘은 누구로 할까.’
라세흠은 항상 상상 속의 상대를 만들어 낸 뒤 머릿속에서 대련을 펼쳤다.
실제 대련을 하지 못하는 상황마다 이런 식으로 전투 감각을 유지하곤 했다.
이번에 라세흠이 택한 상대는…….
‘너로 정했다.’
최근 들어 눈에 띄게 강해진 이주혁이었다.
부대에 있을 때도 라세흠 자신을 제외하면 탑이던 놈이긴 하지만, 그 미국 갱과 주철수랑 싸우는 걸 보니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어딘가 벽을 넘고 있는 듯한 느낌. 과거 라세흠도 느꼈던 감각이다.
‘전역하고도 빡세게 훈련했나……. 그럴 거면 왜 전역한 거야?’
라세흠은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지웠다.
검은 배경 안 이주혁이 익숙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 열받게 할 때의 그 미소였다.
자세를 잡는 이주혁을 보며 감각을 날카롭게 끌어 올리던 그때.
‘음?’
라세흠의 예민한 귀에 무언가의 기척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신발 밑창에 흙이 밀리며 나는 소리. 근처에 누군가 들어왔다는 뜻이었다.
그냥 사람이 지나가는 거였다면 신경을 돌렸겠으나, 의도적으로 발소리를 죽이려는 느낌이었기에 눈을 번쩍 떴다.
“…….”
라세흠은 미세한 소리가 들리는 왼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게 담벼락이 보였다.
‘이 너머인가.’
날카로운 눈을 빛낸 라세흠이 완벽하게 기척을 숨기며 담벼락에 등을 대고 붙었다.
그러자 확실히 누군가가 담을 넘어 들어오려 한다는 게 느껴졌다.
사삭 소리와 함께 셔츠를 입은 놈 하나가 가게 안쪽으로 툭 내려왔다.
그리고 좌우를 둘러보며 상황을 살피는 남자를 라세흠이 불렀다.
“어이.”
“!”
침입자, 강두는 귀신을 본 듯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씨익.
“웰컴. 이 새끼야.”
라세흠은 당황한 얼굴로 품에 손을 넣는 강두의 턱을 향해 레프트 훅을 날렸다.
강두가 황급히 피하자, 라세흠은 그대로 다리를 차 놈의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
그리고 얼굴을 턱 붙잡고, 그대로 땅을 향해 내리꽂았다.
쿠웅!
“크악……!”
땅에 꽂힌 강두의 눈에는 흰자만 보였다.
“이 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손을 탁탁 턴 라세흠이 의식을 잃은 강두의 뒷덜미를 잡는 순간, 뒷문 안쪽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터벅터벅 걷는 소리가 임유나는 아니었다.
‘이런.’
이 꼴을 들켜서 좋을 건 없었기에, 라세흠은 다급하게 빈 장독에 강두를 구겨 넣고 뚜껑을 닫았다.
덜컹.
“어?”
문이 열리고, 풍원한정식의 여직원인 강예원이 빈 통을 들고 나왔다.
“아,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근데 여기서 뭐 하세요?”
뒷마당을 둘러보며 묻는 그녀에게 라세흠이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예. 뭐, 스트레칭? 중이었습니다. 몸이 뻐근해서요.”
“아, 그렇구나. 잠시만요. 고추장 좀 가져갈게요.”
라세흠은 슬쩍 비켜 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였나.”
장독 두어 개를 열었다 닫았다 하던 강예원이 고추장이 든 독을 찾았다.
“계속 깜빡한다니까요.”
“음. 저도 가끔 그럽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장독에서 고추장을 던 강예원이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탁.
“?”
문이 닫히자, 침입자를 넣어 놓은 장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벌써 정신 차렸냐.”
라세흠은 다가가서 그대로 뚜껑 위에 털썩 앉았다.
“숨구멍은 뚫려 있으니까…… 괜찮겠지?”
탁탁.
장독을 두드린 라세흠이 뚜껑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다시 눈을 감았다.
***
고광목은 흐려지는 시야를 붙잡고 두 사람을 눈에 담았다.
‘……괴물이야.’
왕후성도 엄청난 강자다.
마치 고양잇과 동물을 보는 듯한 유연한 움직임과 스피드.
맨손 격투도 뛰어나지만, 연장을 잡으면 감당하기 버거운 기세로 급소를 노린다.
아마 그 주철수를 상대해도 할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놈은 그보다 더한 임자를 만나 버렸다.
“큭.”
라세흠을 등에 업고 위세를 떠는 애새끼인 줄 알았다.
주철수가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당연히 라세흠이 족쳤겠거니 했다.
고광목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저놈도 괴물이었구나.’
고광목은 곰이다. 자신의 힘을 믿고 싸웠지만, 스피드를 겸비한 호랑이에게 찢겼다.
그래서 왕후성을 찍어 누를 라세흠이라는 괴물을 기다린 것이다. 그 정도 강자가 아니면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그러나 저 강하던 왕후성이 이주혁에게 당하고 있었다.
쩍!
“크아악!”
이주혁의 발차기를 팔로 막은 왕후성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이 개새끼가……!”
이주혁은 횡으로 휘둘러지는 칼날의 옆면을 쳐올리며 왕후성의 옆구리를 한 번 더 발로 찍어 찼다.
“끄으으으-!”
왕후성의 입에서 피거품이 끓어올랐다.
눈이 시뻘게진 왕후성이 한계까지 힘을 짜내듯 거칠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주혁은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왕후성을 상대했다.
반대로 놈은 눈에 띄게 지쳐가고 있었다.
휙!
이주혁은 칼을 휘두르며 무너진 자세를 놓치지 않고 왕후성의 무릎 옆을 발로 찍었다.
콰직!
한쪽 무릎을 털썩 꿇은 왕후성이 발악하며 칼을 내질렀다.
“흐으!”
“참나.”
손을 턱 붙잡은 이주혁은 힘을 줘 그대로 왕후성의 손을 으스러뜨렸다.
으직!
“아아악-!”
고광목은 그를 보며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가지고 노는 수준이군.’
산을 지배하려던 호랑이가 사냥꾼의 탈을 쓴 괴물에게 당하고 있었다.
출혈로 인해 몸을 덜덜 떨리는데도 자꾸 웃음이 튀어나왔다.
“크흐흐…….”
평생을 함께한 오른손을 잃었다는 절망, 큰형님 구실도 제대로 못 한 자신에 대한 자조와 동생들은 살 수 있을 거라는 안도감이 섞인 웃음이었다.
***
땡그랑!
놈이 꽉 쥐고 놓지 않던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관절이 다 부서질 때까지 버티다니, 이놈도 어지간한 독종이네.
“슬슬 끝내자. 보는 사람도 지루하겠어.”
“누구 맘대로…….”
팔다리가 걸레짝이 된 왕후성이 멀쩡한 손으로 내 옷을 붙잡으려 했지만, 나는 그 손을 거칠게 쳐냈다.
탁!
“새끼가, 어딜.”
왕후성은 자신이 털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일그러진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나도 내가 상상하던 놈의 실력에 비해 빨리 승부가 나서 의외였다.
대충 보니 팔 상태가 영 별로던데, 아무래도 고광목이랑 한판 하다가 맛이 간 모양이네.
주철수와 싸울 때 느꼈던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끝나 버리니까 뭔가 허무하다.
“야.”
나는 쭈그려 앉아 왕후성과 눈을 마주하고 물었다.
“후까시는 존나게 잡더니, 이게 다냐? 그 실력으로 삼합회는 어떻게 들어간 거야?”
“이주혁……. 그 입을 찢어 주마!”
휘청이던 놈이 악을 쓰며 덮쳐 왔다.
물어 뜯기라도 하려는지, 입을 쩍 벌린 채 내 고간을 노리는 게 보였다.
이 새끼. 같은 남자끼리 너무한 거 아냐?
나는 한 발짝 물러나 가볍게 피하고, 땅으로 넘어지는 왕후성의 턱을 발로 후렸다.
입 안에서 팝콘이 터진 왕후성이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질기다, 질겨.”
주변을 둘러보니 삼합회 따까리들은 우리 팀한테 대충 다 정리되어 있었다.
“야. 주혁아.”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온 배상훈이 바닥에 침을 탁 뱉으며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얘네들은 또 뭐냐? 어디 애들이야?”
“삼합회. 서울 먹으러 왔단다.”
“하, 뭐? 삼합회? 서울을 먹어?”
배상훈이 담배에 불을 붙이다 화가 났는지 쓰러진 왕후성의 등짝을 퍽퍽 밟았다.
“쳐, 돌았나, 쉐끼들이!”
“뒈지겠다, 인마.”
“하…….”
흥분을 가라앉힌 배상훈이 담배를 깊게 빨았다.
“X발.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니고, 어딜 중국 놈들이 기어들어 와?”
“어차피 모가지 날아갈 놈들이니까 괜히 힘 빼지 마라.”
한국에서 처벌할 것 같진 않고, 아마 중국으로 송환할 텐데.
그럼 이 새끼들 죄질을 봐서 사형은 확정이다.
“얘들아. 이 새끼들 한데 모으자. 타이 꺼내.”
“오케이.”
백기준이 씩 웃으며 케이블 타이 묶음을 꺼내 들었다.
“아악!”
“X발! 놔라!”
누구 묶어 놓는 덴 저게 최고긴 해. 나도 수갑이나 밧줄 없을 때 애용했었지.
경찰에 넘기기 위해 따까리들을 묶는 사이, 나는 왕후성에게 다가가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들어봤다.
“크…….”
그렇게 처맞고도 아직 눈빛이 살아있네.
“곧 공안에 끌려갈 텐데, 뭐 할 말 없어?”
“…….”
내 말을 들은 놈의 눈빛이 흔들렸다.
머리가 좀 식었으니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상상이 될 거다.
침묵하던 왕후성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 살려 줘.”
“하. 뭐? 네가 죽인 사람들이 몇인데, 너는 살려 달라고?”
“젠장……!”
아까는 뒤가 없는 것처럼 마구잡이로 달려들더니만. 이 새끼 웃긴 새끼네.
“공안이 그렇게 무섭냐?”
“공안?”
왕후성이 실핏줄이 다 터진 눈깔을 부라리며 발작하듯 말했다.
“내가 그깟 놈들이 무서워서 이러는 것 같나! 멍청한 새끼. 넌 아무것도 몰라.”
“선생이냐?”
그 단어가 내 입에서 나오자 왕후성의 눈이 커졌다.
“어, 어떻게 그걸……!”
“당연히 알지. 선생이 널 처리하라고 지시했는데.”
“뭐?”
당연히 구라다.
그냥 이 새끼 머리 좀 아프라고 던지는 말이거든.
그런데 왜인지 왕후성은 내 말을 덥석 믿었다.
“X발. 어쩐지…… 널 건들지 말라고 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나…….”
음? 이건 처음 듣는 소린데.
선생 놈이 날 건드리지 말라 지시했다라. 아마 내가 자꾸 놈의 예상과 다른 행동을 해서 그런 것 같다.
앞으로 뭘 할지 궁금해서 지켜보려는 게 아닐까.
“이 개 같은 새끼……. 뒤통수를 쳐?”
피가 섞인 침을 튀기며 이를 박박 갈던 왕후성이 내 뒤를 보고 흠칫했다.
기절해 있던 놈 하나가 날 보고 있었다.
아마 왕후성이 풍원한정식을 찾아왔을 때 같이 있던 놈 같다.
깨어났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뭘 하려는 거지?
“양호!”
왕후성이 이름을 부르자, 도끼를 들고 있던 놈이 투척 자세를 취했다.
나는 자세를 낮추며 피할 준비를 했다.
기습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대놓고 던지면 피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양호라 불린 놈이 팔을 휘둘렀다.
그리고 나는.
‘응?’
놈의 목표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후웅-!
던져진 손도끼는 대비하고 있던 내 옆으로 지나갔다.
콰직!
그리고 왕후성의 두개골을 쪼개며 틀어박혔다.
“커억…….”
툭.
왕후성이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옆으로 넘어갔다.
“무슨……!”
저 새끼, 왕후성 부하 아니었어?
놈은 그대로 땅에 떨어진 칼을 주워 자기 모가지에 꽂아 넣었다.
푸욱!
“큽.”
양호가 무릎을 털썩 꿇었다.
어떻게든 숨을 붙여 보려고 다가가려 하자, 양호가 꽂혀 있던 손잡이를 잡고 자기 목을 죽 그어 버렸다.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져 웅덩이를 만들었고, 그 위로 양호가 얼굴을 처박았다.
어딘가 익숙한 전개. 내 생각은 한 가지 결론에 닿았다.
‘이런 X발. 또냐?’
저 새끼도 선생 놈 따까리였던 거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선생 놈은 절대, 자신의 정보가 노출되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왕후성도 죽었고, 양호도 자결했다. 그놈에 대해 알아낼 만한 놈이 없단 뜻이다.
유선규도 아마 이놈이 죽였을 텐데…….
착잡한 마음이던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부장님이었다.
“아, 네. 부장님.”
-어, 주혁아.
“무슨 일이에요?”
내 말에 부장님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여기, 그 새끼 따까리 하나 잡아 놨다.
“……큭. 부장님.”
-음?
“맛있는 거 먹으러 갑시다.”
이러면 얘기가 다르지.
이번 생은 빌런이다
지은이 : 글빌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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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949-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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