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176
175화
화면 속 민기형이 미소를 지으며 가족들에게 말하는 게 들렸다.
-앉자.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걸 들은 내 표정은 썩어 갔다.
‘다르잖아.’
과거, 나는 선생으로 추정되는 놈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걸 통해 선생 놈에게도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걸 깨달았었고.
문제는 이거였다.
그때의 목소리와 방금 들은 민기형의 목소리가 달랐다.
그 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확실히 민기형보다는 젊은 느낌이었다.
“흠…….”
이러면 두 가지 가설이 나온다.
나와 통화한 게 진짜 선생이고, 민기형은 단순히 놈의 최측근일 경우.
아니면 민기형이 선생 본인은 맞지만, 나와 통화한 건 다른 사람인 거겠지.
일단 나는 화면에 집중했다.
민기형과 가족들은 방 안에 앉은 채 강예원에게 음식을 주문하고 있었다.
-항상 드시던 걸로 할까요?
-네. 그렇게 해 줘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주문을 받은 강예원이 문을 닫고 떠났다.
나는 어제 따로 조사해본 민기형의 가족들을 자세히 살폈다.
우선 아내 서윤희.
남편에 비해선 꽤 젊어 보이는 얼굴로, 실제로도 놈보다 15살 정도 어린 30대 후반이다.
민기형이 재혼한 여자로, 서윤희의 아버지가 의류와 화장품 사업을 크게 하고 있었다.
‘정략 결혼이지.’
그리고 그 옆에 앉아서 뚱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만지작대는 여자는, 저 집의 막내이자 고명딸 민수진이다.
음악하다 때려 치우고, 패션하다 때려 치우고.
이젠 미대 다니면서 논문 준비하는 것 같던데, 부모 등골 빨아 먹는 자식놈 중 하나다.
그리고 그 나머지 자식놈의 이름은 민지용.
이 식사 자리에는 없긴 한데, 이놈이 민기형의 첫째 아들이다.
‘망나니 쓰레기 새끼지만 말이야.’
부모 돈을 물 쓰듯 낭비하는 건 물론이고, 각종 여자 문제에다 날마다 사고가 끊이지 않는 놈이다.
예전에 내가 족쳤던 재벌집 망나니 이명학이랑 비슷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지.
-일주일 만에 어머니 아버지 얼굴 뵈니까 좋네요.
마지막으로, 부모님에게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둘째 아들 민지훈.
이 집 자식 농사의 유일한 희망으로, 소프트웨어 쪽 벤처기업의 사장이기도 하다.
민지훈이 가족들에게 물을 따라 건네자, 민기형 수석도 마주 웃으며 물었다.
-너는 회사에 무슨 일 없고?
-너무 평화로워서 걱정이네요. 아버지는 별일 없으셨죠?
-나야 뭐, 항상 똑같지.
그렇게 부자의 일상 대화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어느새 주문한 식사가 도착하고, 민기형의 가족은 밥을 먹기 시작했다.
국물을 떠먹던 둘째, 민지훈이 안경을 슥 올리며 물었다.
-아, 아버지. 식사는 잘 하고 다니시는 거죠? 얼굴이 안 좋으세요.
-음. 사실 요새 장이 좀 안 좋아서 잘 못 먹고 있긴 하다.
민기형 수석의 말에 둘째 아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요? 건강 관리는 잘하셔야죠.
-그러게, 말이다. 뭐가 자꾸 찌르는 것처럼 아파. 염증인 건지…….
-더 심해지기 전해 빨리 병원 가 보세요.
-그러마.
고개를 끄덕이던 민기형은 둘째 아들의 한숨에 움찔했다.
-제가 항상 말씀드리잖아요. 문제가 생겼을 땐 이미 늦은 거라고. 놔두면 큰 병 생겨요.
-내가 책임지고 병원 보낼 테니까 너무 뭐라 하지 마. 여보. 밥 먹어요.
-어. 그럴까? 하하…….
아내의 말에 민기형은 머쓱하게 웃으며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쭉 지켜보던 나는 얼굴을 쓸었다.
‘뭐지?’
수상한 점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너무 일상적인 대화였다.
선생으로 추정되던 민기형은 겉으로 보기에 그냥 가정적인 아버지였고, 다른 가족들도 특이사항은 없었다.
“흠…….”
그렇게 식사가 끝나기 전까지 건질 만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냥 가족 외식이었다.
생각보다 실망스러운 결과였지만, 일단 녹화는 해 놨으니 나중에 다시 확인해 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결국 식사를 마친 민기형의 가족은 풍원한정식을 떠났다.
탁.
나는 헤드폰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겉옷을 챙기며 우재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예. 대표님.
“사무실이에요?”
-네. 무슨 일이십니까?
월요일부터 빡세게 일하고 있었구만.
“혹시 사람 하나만 좀 조사해 주실 수 있어요?”
-누구 말입니까?
“민지용이라고. 민정수석 첫째 아들입니다.”
씨익.
일단, 제일 접근하기 쉬운 놈부터 족쳐 보자고.
***
“합!”
기합 소리와 함께, 임유나의 발차기가 미트에 꽂혔다.
팡-!
“호오.”
미트를 들고 있던 라세흠이 감탄성을 뱉었다.
가르쳐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발차기 자세가 잡혔다.
아직 피지컬적인 부분은 부족하지만, 기술적인 면은 진도를 꽤 잘 따라오고 있었다.
“임 사장. 폼 좋은데? 파워도 세졌고.”
라세흠의 칭찬에 임유나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퇴근하고 웨이트 열심히 하고 있거든요.”
임유나의 말대로 지금 그녀는 근육을 증량하기 위해 매일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있다.
기초 체력만 다지는 건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는 라세흠의 판단이었다.
“몸풀기는 여기까지 하고, 바로 실전 들어갑시다.”
“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정태섭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라 여유가 있긴 해도, 매일 불려와서 대련 상대를 해 주는 게 보통 일은 아닌 탓이었다.
‘기름도 갈고 냉장고도 채워야 하는데…….’
정태섭은 내심 불만스러웠지만, 두 명의 상사 앞에서 뭐라 말을 꺼낼 순 없었다.
슥.
호구와 헤드기어를 쓴 정태섭이 뚱한 표정으로 임유나와 마주 섰다.
두 사람 다 태권도장에서 쓸 법한 보호구들을 착용했고, 발밑에는 기다란 매트가 깔린 상태였다.
대련 준비가 끝난 걸 확인한 라세흠이 앞으로 손을 뻗었다.
“오케이. 준비.”
그 말에 임유나와 정태섭이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임유나는 다리를 앞뒤로 벌린 채 자세를 잡았다.
“시작!”
라세흠의 신호와 동시에, 임유나는 스텝을 밟으며 정태섭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정태섭은 속으로 감탄했다.
‘벌써 간격을 재는 법을 익히다니……. 확실히 재능이 있으셔.’
정태섭도 자세를 살짝 낮춘 채로 거리를 조절했다.
그의 베이스가 되는 무술은 유도.
주로 그래플링을 사용하기에 항상 정태섭은 방어를 위주로 대련하곤 했다.
이주혁의 그녀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으니 말이다.
탓-!
그러던 순간, 임유나가 땅을 박차며 몸통 쪽으로 돌려차기를 날렸다.
그와 동시에 정태섭은 방어 대신 임유나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었다.
늘 그랬듯 가까이 붙은 뒤 호구를 잡고 넘어뜨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정태섭의 생각은 이어지는 임유나의 행동에 막혀 버렸다.
후욱!
“……!”
몸을 낮춘 채 달려드는 정태섭의 얼굴을 향해 임유나의 손가락이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타닷!
정태섭은 당황한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방금 임유나가 쓴 기술은, 태클로 밀고 들어오려는 상대의 눈 주위를 공격하는 엄연한 살수(殺手)다.
분명 라세흠이 가르쳤을 테지만, 정태섭이 더 당황스러운 건 이걸 배웠다고 바로 써먹는 임유나였다.
아무리 배웠다 해도, 실제로 남의 얼굴을 향해 손을 찔러넣기는 힘든데…….
“아, 죄송해요. 무의식적으로 그만…….”
“…….”
정태섭은 자신도 놀란 듯 사과하는 임유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끄덕.
옆에 있던 라세흠 부장이 그런 임유나를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정태섭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부장님……. 대체 사장님한테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
달달달.
한적한 카페 안.
멀끔하게 생긴 놈 하나가 내 맞은편에서 다리를 떨고 있었다.
놈은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날 보며 불안한 듯 입술을 잘근거렸다.
“넌 커피 안 마시냐?”
“아, 예. 전 커피는 별로…….”
“그래? 약은 끊었지?”
그 질문에 푸른기업의 장남, 이명학이 몸을 움찔 떨었다.
내 가정방문을 받은 후로 나름 조용히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긴 한데.
“당연히 끊었죠. 그 이후로 클럽도 잘 안 갔어요.”
“가긴 간다는 거네?”
“아, 아예 안 갈 순 없고…….”
제 버릇은 개도 못 준다더니, 여자 문제는 계속되는 모양이네.
이 새끼, 약 끊은 건 맞아?
“또 코카인 손대고 있는 거 아니지?”
내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이명학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요새는 진짜 조용히 살고 있어요……. 믿어 주세요.”
“그래. 알겠고, 뭐 하나만 물어보자.”
“예?”
“민지용이라고 알지?”
잠시 고민하던 이명학이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지용이 형이요?”
“친하냐?”
“음……. 막 가까운 사이는 아닌데, 오다가다 마주치면 같이 놀고 그랬죠.”
“어디서 뭐 하고 놀았는데?”
이명학은 우물쭈물하며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하긴, 더럽게 놀았던 일을 남한테 이야기하긴 좀 꺼려지겠지.
“클럽에서만? 아니면 다른 데서도 만난 거냐?”
“예. 뭐, 주로 나이트나 클럽에서 만났고…….”
말을 잇던 이명학이 갑자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걸 말해도 되나…….”
“뭔데?”
“아니, 사실 이게 아무한테나 말하면 안 되는 거라서요.”
“아, 그래?”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손으로 주먹을 꽉 쥐며 미소를 지었다.
“이명학이.”
“네?”
“내가 아무냐?”
“당연히 아니죠, 형님.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명학은 다소곳하게 자세를 바꾼 뒤 설명했다.
“그, 사실 제가 가끔 참석하던 모임이 하나 있습니다.”
“모임?”
“예. 돈 많은 집 애들끼리 하는 사교 모임 같은 겁니다.”
사교 모임이라.
이거 수상한 냄새가 풀풀 나는데?
“걔네들끼리 모여서 건전하게 보드게임이나 하진 않을 거고. 듣기만 해도 불건전한 것 같은데?”
“아, 그 정도는 아니고…….”
“아니긴. 거기서 뭔 짓 할지 뻔하구만.”
이명학도 딱히 변명할 건 없는지 괜히 입맛만 다셨다.
“그 사교 모임은 어떻게 참석하는 거냐?”
“그건 왜요?”
“자세한 것까지 알 필요는 없고, 장소는 어디야?”
“음. 장소는 주로 호텔이긴 한데…… 할 때마다 바뀌는 편이에요.”
“비용은 각출?”
“아뇨. 어지간하면 호스트가 내는 편이죠.”
나는 의자에 뒤로 기대며 생각에 잠겼다.
민정수석의 장남이 참석하는 사교 클럽.
온갖 정·재계 거물들의 자식놈들이 모여서 불건전한 짓거리를 하는 모임일 테니, 그 일원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꽤 질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거기 있는 녀석들의 부모는 다 상류층이다. 난 해당 사항이 없단 말이지.
잠시 고민하던 중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야. 넌 내가 어떤 사람 같냐?”
“예? 갑자기요?”
“봐 봐.”
내 말에 이명학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날 훑어봤다.
“그냥 뭐…… 잘생기고 돈 많은 사람 같은데요.”
“어디 재벌집 아들 같진 않고?”
“그렇게 보면 또 그런 느낌이긴 하죠.”
“오케이.”
난 지금 어리고, 돈도 많다.
이명학이 말한 사교 모임에 참석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거다.
잘만 하면 거기 모임의 일원으로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비록 내가 고위층 자제는 아니지만, 그러니 오히려 어린 망나니 새끼들은 날 호구 잡으려고 하지 않을까?
이걸 잘 이용만 하면…….
드륵.
자리에서 일어난 나를 이명학이 올려다봤다.
“야. 아직 클럽 VIP 회원권 같은 거 있지?”
“예?”
“오늘 밤에 시간 내. 오랜만에 같이 놀자고.”
내 말에 이명학이 당황했다.
아까 그렇게 갈궈 놓고 이젠 갑자기 클럽에서 놀자고 하니 인지 부조화가 온 듯 손을 마구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놀긴 무슨…….”
“함정수사 아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이명학은 과거 클럽에서 나한테 처맞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표정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진짜 같이 가자고요?”
“그래. 그러니까…….”
씨익.
“민지용 불러. 오랜만에 같이 놀자고.”
이번 생은 빌런이다
지은이 : 글빌런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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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949-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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