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187
186화
“둘이 무슨 얘기 중이었어요?”
나는 민수진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서윤희 앞에서 차마 그럴 순 없었다.
“이주혁. 카드를 빌렸으면 언제 간다고 이야기를 해야 되는 거 아냐?”
또각또각 다가온 민수진이 내 손에 들린 쇼핑백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네가 산 거야?”
“어.”
“누구 주려고?”
민수진은 자연스럽게 묻는다고 하는 것 같은데,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질 못하고 있었다.
쟤 주려고 산 거 아닌데.
“그건 아니고, 그냥 마음에 들어서.”
“아, 그래……?”
정말 내가 자기한테 선물하려고 산 줄 아는지, 민수진은 모르는 척해 주겠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 꿀밤 마려운 행동을 보자 주먹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지금은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게 우선이겠지.
나는 민수진의 VIP 카드를 꺼내 민수진에게 건네고 서윤희에게 고개를 숙였다.
“전 먼저 가 보겠습니다. 사장님.”
“네? 손님이 수진이 부른 거 아니었어요?”
“우연입니다. 저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긴 한데, 제가 회사 대표라 업무가 밀려 있네요.”
서윤희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기회 되면 셋이서 식사나 해요.”
“좋습니다.”
물론 지켜지지 않을 구두 약속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민수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이상하네. 왜 내가 오니까 자리를 피하지? 혹시 둘이서 내 얘기라도 한 거니?”
“그런 거 아니다. 바빠서 그래.”
“진짜 이상해. 신입생인 척까지 하면서 접근해 놓고 이제는…….”
“쉿.”
민수진을 조용히 시키고, 이쪽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서윤희에게는 들리지 않게 말했다.
“너희 엄마한테는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마.”
“……할 생각도 없었어.”
“정말이냐?”
눈을 피하는 걸 보니 아닌 것 같은데.
“진짜야. 굳이 가족들한테 약혼자가 생겼다고 말해 봤자 네 집안이나 학벌만 따져 볼 테니까. 그런 건 싫거든.”
“그래. 뭐 알아서 잘해라. 귀찮은 일 생기면 이제 만날 일 없을 거야.”
“알았어. 걱정하지 마.”
음.
나도 모르게 방금 쓰레기 같은 남자가 할 법한 대사를 쳐 버렸네.
그 탓에 잠깐 멈칫하자, 민수진이 내 쇼핑백을 한 번 더 보곤 샐쭉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난 직접 걸어 주는 게 좋아.”
“뭐래.”
짜게 식은 눈으로 노려봐 준 뒤 발걸음을 돌렸다.
저벅.
그렇게 매장을 나서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명그룹으로 이어지는 민기형의 처가를 조사할 필요는 있지만, 서윤희와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다.
초면에 그런 정보를 캐내기엔 무리가 있지.
서윤희는 민수진과는 달리 이 자본주의 바닥에서 꽤 오래 굴러먹은 여자니까.
그래서 오늘은 안면만 튼 거다.
다음에 만났을 때 더 편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말이야.
띵.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오자, 백화점 내는 여전히 손님들로 바글바글했다.
‘확실히 사업 규모가 크긴 커.’
백화점도 서윤희 소유. 그 안의 매장들 대부분도 서윤희 소유.
지들끼리 다 해 먹는 구조지만, 그만큼 자본과 소비층이 탄탄하게 잡혀 있으니 가능한 일이겠지.
그리고 그 배경엔 서윤희의 조부이자 거물 사채업자, 서길석이 있을 거고.
“흠.”
어떻게 그쪽으로 빨리 침투할 방법은 없나?
그렇게 다시 회사로 돌아갈까 하던 그때.
우웅-.
우재성에게 문자가 한 통 왔다.
“음?”
[우재성 – 잠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우재성 – 제3의 인물이 난입했거든요.]제3의 인물?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우재성의 문자만 보면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내 감은 이게 좋은 기회라 알려 주고 있었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복귀해 보자고.
* * *
회사로 돌아온 나는 바로 회의실로 향했다.
왜인지 몰라도, 로비에 보수 같은 걸 하는지 사람들이 몇 명 보였다.
끼익.
“오셨습니까.”
회의실 안에는 우재성과 부장님, 두 사람만 앉아 있었다.
“둘밖에 없네요. 무슨 일입니까?”
내 물음에 우재성이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뭡니까?”
“아까 나랑 한판 붙은 녀석.”
부장님이랑 붙었다고?
혹시 구속영장인가 싶어 확인해 봤다.
“고상미? 혹시 여잡니까?”
“어.”
“…….”
경악한 표정을 짓자 부장님이 손을 내저었다.
“야. 끝까지 읽어 봐라.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니까?”
“흠.”
내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우재성이 거들었다.
“부장님이랑 동수를 이룰 정도의 실력자였답니다.”
“그 정도라고요?”
나는 깜짝 놀라 부장님을 쳐다봤다.
평소 티가 잘 안 나서 그렇지, 라세흠이라는 사람은 이 바닥 전체를 따져도 최상위의 실력자다.
괴물들만 모아 놓은 HID의 교관 출신이자, 그 부대에서도 가장 강했었다.
실제로 저기 북쪽에 침투한 적도 있는 양반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지 누구한테 지는 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런 부장님한테 비볐단 말이지?’
고상미라는 여자의 화려한 전적을 쭉 읽어 보니 대충 감이 왔다.
잘만 한다면 우리에게 강력한 패가 되어 줄 거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부장님. 다짜고짜 공격했다고 했죠?”
“어. 맞고 뒈지라는 파워였다.”
그건 바로, 우리 쪽에서 고상미를 통제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
원래 인연이 있거나 나한테 약점이 잡혔으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 과연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내가 고민하던 그때.
“그리고 이거. 그 여자가 주고 간 거다. 너한테 직접 연락하라던데?”
“그래요?”
명함 정도 사이즈의 작은 종이에, 전화번호로 보이는 숫자와 [불만이 뭐지?]라는 문장이 거친 필체로 적혀 있었다.
“흠.”
이 문구를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했다.
불만이라니. 무슨 말이야?
그러다 얼마 전 누군가와 나눴던 대화가 머리를 스쳤다.
-혹시 같이 일해 볼 생각 있으면 말해.
-뭔 개소리를…….
-사회에 불만이 많은 것 같은데, 나는 이 사회를 뒤에서 움직이려는 놈한테 불만이 있는 사람이거든.
민지용을 잡기 위해 참석했던 사교 모임.
거기서 미래에 붙잡히는 해커 녀석과 마주쳐 그런 얘기를 한 기억이 나네.
그럼 이건 그놈이 나한테 던지는 질문인가?
번호까지 적어 놓은 걸 보니, 어쨌든 나와 접촉할 의사가 있다는 거겠지.
“바로 연락해 봐야겠네요.”
꾹.
나는 지체없이 명함에 적힌 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전화를 걸려는데, 뭔가 일반적인 전화번호와는 숫자 구성이 조금 달랐다.
전화번호가 아닌가 싶어 의아한 마음으로 수신 버튼을 부르자, 이상하게 전화가 걸리지 않고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당신 컴퓨터로.]내 컴퓨터?
무슨 말인가 했지만, 이놈의 정체를 생각해 보니 답이 나왔다.
‘해킹했구나. 이 새끼.’
초면부터 매너가 없네.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말했다.
“잠시 대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어, 그래.”
“다녀오시죠.”
저벅.
회의실을 나와 내 사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컴퓨터가 놓인 내 자리에 앉자, 화면이 갑자기 켜지며 가면을 쓴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걸 본 나는 한쪽 손을 들며 인사했다.
“또 보네.”
-……이주혁.
“목소리 변조까지 했어?”
-대화를 좀 나누고 싶다.
“무슨 대화?”
가면남이 변조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이 언급했지 않나. 사회를 뒤에서 움직이려는 사람.
“왜. 뭐 아는 거라도 있어?”
-있지. 그것도 꽤 많이.
“호. 그래? 나돈데.”
-아무래도 우린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 같더군.
서로 떠보기만 하니 대화에 진전이 없네.
“그냥 까놓고 말하자고. 너도 짐작 가는 게 있겠지?”
-없는 건 아니지.
“그래.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탁.
나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찍으며 선언했다.
“난 그놈을 이 세상에서 치워 버릴 생각이다.”
내 말에 가면남이 화면 너머로도 당황한 듯 물었다.
-진심인가?
“진심이지. 너도 비슷한 목적 아니었나?”
-음……. 우리는 그저 치부와 약점을 드러내 놈의 사회적 지위를 떨어뜨릴 생각이었다.
“고작 그 정도로 해결되는 건 없을 텐데. 그 조직은 동아시아를 넘어 다른 대륙까지 닿아 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조직을 와해시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비관적인 놈의 말에 뭐라 한마디를 하려던 순간.
-아니, 불가능한 일이었지.
“음?”
-이주혁. 당신 조직의 존재를 알기 전까진 말이야.
“그 말은……. 지금은 현실적으로 가능하단 소린가?”
끄덕.
가면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래. 봤다시피 우리도 무력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거대 조직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모자라지.
“상미 누나 말이냐?”
내가 히죽거리며 묻자 가면남이 가면 위로 이마를 턱 짚었다.
-젠장. 내가 이름은 까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그래. 당신 말대로 그 사람이 우리의 전력 중 하나다.
“다른 사람들도 있단 거냐?”
-그래. 그와 비슷한 수준의 실력자들이 우리를 위해 일하고 있지.
피식.
‘허세는.’
부장님이랑 비빌 정도의 녀석들이 그쪽에 여러 명이 있다?
저놈 조직이 어디 남파 간첩 이런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하지.
아마 고상미라는 여자가 저쪽에서 가장 강한 인물일 거다.
나는 뒤로 기대며 여유롭게 말했다.
“그래서. 네 신상을 밝힐 생각은 없는 건가? 협력 의사를 보였으면 얼굴 정도는 보여 주는 게 예의 아냐?”
-……그건 당신네의 능력을 보고 결정하지.
“뭐, 임무 수행 능력은 대충 알고 있지 않아? 나에 대해 꽤 조사했을 텐데.”
-직접 확인해야 풀리는 성격이라.
“그럼…….”
까딱까딱.
“정보나 내놔 봐.”
-뭐?
“우리 능력을 검증한다며. 그럼, 뭐라도 던져 줘야 내가 움직이지.”
-…….
가면남은 뭔가 손해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을 거다.
내 말이 맞는 말이거든.
시험 문제를 줘야 내가 풀 거 아냐?
결국 고개를 끄덕인 가면남이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내가 알아낸 정보를 하나 넘길 거다.
그와 동시에, 영상 화면이 내려가며 바탕화면에 어느새 다운로드된 사진 파일 하나가 보였다.
“아주 자기 것처럼 쓰시는구만?”
-걱정하진 마라. 다른 건 건들지 않았으니까.
딸깍.
좌표 같은 숫자로 이루어진 제목의 파일을 눌러 열었다.
그러자 웬 붉은 점이 찍힌 지도가 튀어나왔다.
“이게 뭔데?”
-인천에 있는 마약 제조 시설의 위치다.
“마약 제조 시설?”
예전엔 항구에서 수입하더니, 이젠 아예 직접 만들고 있다고?
하긴, 다른 곳에서 사오는 것보단 재료만 들여와서 제작하는 게 더 싸게 먹히긴 할 거다.
“시설의 주인은 파악했나?”
-추측이지만, 그래.
그 말과 함께, 지도 파일의 아래에 다른 파일이 하나 더 생겼다.
“이게 그 주인의 정보?”
-맞다.
국산 마약을 만들려는 놈이라. 상판 한번 확인해 보자고.
타닥.
“음?”
파일 안에 담긴 사람의 얼굴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이라고?”
-마약 제조 시설은 밤에만 운영한다. 낮에는 방직 공장으로 위장하고 있지. 그가 그 공장의 소유주다.
“호오…….”
그 말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화면에 띄워진 얼굴은, 마침 내가 털어 보려고 준비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서길석.’
민기형의 아내 서윤희의 조부이자, 과거 악명을 떨쳤던 거물 사채업자.
내가 민기형의 활동 자금을 대고 있다고 추정하고 있던 놈이라, 안 그래도 서길석의 자금 루트를 조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침 서길석의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되는 마약 제조 공장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러면 또 조지지 않을 수가 없거든.
-여길 조사해 줬으면 한다.
“그래?”
당연히 조사할 거긴 한데, 뭔가 저놈이 내 윗사람처럼 구는 게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근데, 아무래도 우리끼리 가기엔 좀 위험한 것 같아서.”
-뭐?
“사람 좀 빌리자고.”
-그게 무슨…….
나는 웃으며 당황한 가면남에게 말했다.
히죽.
“고상미. 그쪽의 최대 전력을 파견해 줘.”
-…….
함께해야지. 어딜 날로 먹으려고?
이번 생은 빌런이다
지은이 : 글빌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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