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189
188화
나는 우리 팀원들과 고상미 쪽 인원들이 알아서 놀게 냅두고 우재성의 사무실로 올라왔다.
“뭣 좀 나왔습니까?”
우재성은 살짝 피로한 얼굴로 커피를 홀짝이며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네. 확인해 보시죠.”
“피곤해 보이시는데, 괜찮은 겁니까?”
“버틸만 합니다. 이 근처에 수준 높은 음식점들이 있어서 다행이죠.”
그러고 보니 우재성의 취미 중 하나가 미식이었다.
그거라도 있으니 이런 과도한 업무도 잘 처리하고 있는 거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우재성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해 놔야 5년 뒤에 제 가용 자금이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한국에 JP모건 같은 대형 투자은행을 만든다는 우재성의 목표.
거기 쓸 자금을 나한테 얻어 내기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일한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라면 더 굴려 드려야겠네요.”
“음.”
5년 동안 소처럼 일만 해 준다면 돈이야 줄 수 있지.
우재성은 어쩐지 말실수를 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일단 우재성이 넘겨준 종이를 확인했다.
“이게 그 공장에서 나온 물건들이 이동하는 루트입니까?”
“그렇습니다.”
인천에 위치한 방직 공장.
밤에 가동되는 마약 제조 시설을 위장하기 위한 장소지만, 그렇다고 공장을 놀리는 건 아니다.
낮에 일하는 직원들도 있고, 그 물건들을 납품하는 곳도 있을 거란 말이다.
“거기 적힌 업체들, 전부 서윤희 소유입니다.”
“그 공장에서 직접 납품을 받는단 말입니까?”
“네.”
나는 서윤희의 업체들이 적힌 리스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과연 서윤희는 그 공장에서 마약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내가 고민하고 있자 우재성이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대표님. 민수진은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흠. 글쎄요. 아무래도 슬슬 손 터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우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게 최선입니다. 납치하고 고문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죠.”
“어쨌든 선생과 관련이 있다는 게 확실하게 밝혀지진 않았으니까요.”
슥.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음을 정했다.
“이번에 건질 것만 건지고 쳐내야겠습니다.”
여기서 더 깊숙하게 들어갔다간 민기형이나 다른 놈들이 눈치챌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만나고 손절하는 게 맞다.
“전 오늘 저녁 회식엔 참석 못할 거 같네요.”
“음. 알겠습니다.”
“그런 자리에 대표는 끼는 거 아니죠. 부장님 잘 챙겨 주세요.”
내가 히죽거리며 말하니 우재성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고상미를 정말 부장님한테 붙여 놔도 괜찮겠습니까?”
“뭐 어때요. 고상미를 이쪽에 묶어 놓을 수도 있고, 부장님은 고상미 때문에 막 튀어 나가지 못할 거고요.”
“일거양득이란 말이군요.”
“그렇죠. 그리고 부장님은 오히려 저한테 감사해야죠. 제가 솔로 탈출을 도와주겠다는데.”
우재성은 악마를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녀올 테니까 애들한테는 잘 말해 줘요.”
“알겠습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민수진에게 바로 문자를 보냈다.
[뭐 하나만 알아봐 줄 수 있나?]* * *
그날 저녁. SA시큐리티와 고상미 측 인원이 모두 한곳에 모였다.
친목 도모를 명목으로 만들어진 회식 자리였다.
치익-.
“어우. 냄새 봐라.”
삼겹살이 구워지는 냄새에 집게를 들고 있던 라세흠이 감탄했다.
여긴 최상층에 마련된 넓은 방.
공간은 있어도 용도가 없었는데, 사람도 많고 하니 넓은 이곳에서 회식을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불판 여러 개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들.
모두 다 고기가 익기만을 기다리던 그때.
“저희 왔습니다.”
배상훈과 백기준이 웬 상자들을 안고 등장했다.
상자에 적힌 문구를 본 팀원들이 히죽 웃었다.
[원소주]상자에 가득 든 건 술이었다.
마침 고기도 다 구워진 참이니, 더 이상 참을 필요는 없었다.
“먹자!”
누군가의 외침에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젓가락을 들고 불판에 달려들었다.
흐뭇한 미소를 짓던 라세흠이 싱싱한 상추 한 장을 집었다.
그 위에 잘 익은 삼겹살 두 점을 올리고, 바싹하게 구워진 마늘과 쌈장을 듬뿍 올렸다.
그리고 손안에 잘 말아 쥔 뒤, 쩍 벌린 입에 쑥 집어넣었다.
와그작.
“허어…….”
라세흠은 짜릿한 표정으로 쌈을 순식간에 씹어 삼켰다.
까드득.
이어 원소주를 까고 병째로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꿀꺽.
“캬아……! 이거지!”
그렇게 쌈을 하나 더 싸 먹으려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고상미가 다가와 물었다.
“술 잘 마시나 봐?”
“음?”
라세흠은 찾아온 불청객에 살짝 움찔했지만, 회식 자리에서까지 까칠하게 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순순히 대답했다.
“뭐, 이중에선 내가 제일 잘 마시겠지.”
자신만만한 그 말에 고상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건 아닐 텐데.”
“뭐?”
“난 지금까지 살면서 나보다 오래 버티는 사람을 본 적이 없거든.”
“참나.”
라세흠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그 웃음에 고상미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대결해 볼까? 누가 더 잘 마시는지.”
“됐다. 결과가 뻔한데, 뭐.”
고상미가 라세흠이 마시던 소주병을 집어 들고 그대로 병나발을 불었다.
“어, 야.”
벌컥벌컥.
순식간에 한 병을 다 비워 버린 고상미가 입을 슥 닦으며 도발했다.
“이건 핸디캡.”
“…….”
“쫄았냐?”
라세흠의 표정이 굳었다.
‘원래는 뭔 짓을 해도 반응해 주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이건 남자의 자존심이 달린 문제.
여기서 한발 물러선다면, 라세흠은 그걸로 끝이다.
씨익.
라세흠이 이빨을 드러내며 옆에 있던 새 소주 한 병을 까 그대로 마셨다.
탁.
“크……. 밸런스는 맞춰야지?”
“좋아. 시작해 보자고. 대머리야! 술 가져와!”
“예, 누님!”
조금 전 배상훈과 붙었던 대머리가 고기를 먹다 고개를 번쩍 들고 뛰어가 상자를 챙겼다.
그걸 들은 라세흠이 황당한 마음에 물었다.
“……혹시 쟤 이름이 대머리는 아니지?”
“이름? 몰라. 그냥 그렇게 부르는 건데?”
라세흠은 어쩐지 이주혁의 후배들이 떠올랐다.
그 와중에 술이 든 상자 하나를 통째로 들고 온 대머리가 책상 위에 그걸 올려놨다.
쿵.
고상미가 그걸 보더니 손짓했다.
“이걸로 되겠어?”
“더 갖고 오겠습니다!”
라세흠은 내심 살짝 당황했지만, 티 내지 않고 호탕하게 웃었다.
“감당할 수 있겠냐? 집까지 기어가야 할 텐데.”
그 말에 고상미가 입술을 비죽이며 소주를 깠다.
“닥치고 마셔.”
땅.
두 사람은 병 째로 건배한 뒤 술을 쭉 마셨다.
그리고 안주를 집어 먹으며 호승심으로 가득한 눈빛을 부딪쳤다.
흥미진진한 상황에 주변에서 고기를 먹던 팀원들이 슬금슬금 다가와 구경했다.
“맞짱입니까?”
“오. 둘이 하는 거야?”
“재밌겠네.”
까득.
라세흠과 고상미는 불판 하나를 두고 대작을 시작했다.
“크…….”
“후.”
두 사람이 마신 술이 각자 소주 세 병을 넘어갈 무렵, SA시큐리티의 작전팀과 고상미의 부하들도 불이 붙었다.
“딱 보니까 부장님이 이기겠네?”
“뭐? 뭔 개소리야?”
“저렇게 마시면 오래 못 가지. 차라리 내가 더 많이 마실 것 같구만.”
“지랄도 풍년이군. 너희 다 합쳐도 누님한테 안 돼. 나한테도 안 되는 새끼들이 무슨…….”
옆에서 훈수를 두던 배상훈이 인상을 찌푸렸다.
“딱 봐도 X밥 같이 생긴 놈이 뭐라는 건지 모르겠네. 한판 붙어?”
그 말을 들은 대머리가 발끈했다.
“X발. 붙어. 야! 술 가져와!”
“병신. 발라 줄게. 안 그래도 질척대다 끝난 게 마음에 안 들었어.”
태클만 당하고 때리진 못했던 일을 담아 두고 있던 배상훈이 입꼬리를 올렸다.
“마셔!”
그렇게 술판을 가장한 자존심 대결이 곳곳에서 시작됐다.
* * *
나는 민수진을 만나기 위해 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저번에 갔던 정운라운지였다.
뭐 이렇게 고급을 좋아하는지.
끼익-.
지금쯤 애들은 잘 놀고 있으려나.
혹시 누가 사고 치는 건 아닐까 걱정되긴 했지만, 그 정도 분별력 없는 놈들은 아니니 안심해도 되겠지.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 안으로 향했다.
딸랑.
“왔어? 오늘은 차려입었네.”
“내가 말한 건 알아왔어?”
민수진은 앉기도 전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조금 섭섭한 눈치였다.
“응. 알아 왔어. 온 김에 저녁 먹고 가.”
“고민해 볼게.”
“오늘도 밥만 먹고 바로 갈 거니?”
눈치 빠르네. 어떻게 알았지?
“글쎄다. 일단 그것부터 듣고 싶은데.”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민수진이 냅킨을 만지작대며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그 펜던트는 네가 보내준 주소의 공장에서 납품받는 건 맞아.”
“그래?”
역시 그랬나.
조금 전에 민수진에게 알아 오라고 시킨 게 이거였다.
내가 직접 서윤희한테 사업적인 뭔가를 물어보긴 뭐하니까, 그래도 가족인 민수진을 이용했다.
원래는 조금 더 시간을 들여서 서윤희도 작업할 생각이었는데, 마약 제조 시설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그럴 필요는 없다.
다음 단계를 알게 된 시점에서 굳이 길을 돌아가는 건 멍청한 짓이니까.
나는 민수진의 말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추리할 수 있었다.
‘어쩌면 서윤희도 가담했을 가능성이 있겠어.’
애초에 자기 업체에 납품하는 공장에서 마약을 생산하는 걸 몰랐다?
솔직히 그건 납득하기 힘들지.
그리고 별자리 펜던트까지 그 공장에서 만든다고 하니, 서윤희에 대한 내 의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거, 아무래도…….’
나는 묘한 눈빛으로 민수진을 쳐다보다 물었다.
“혹시, 서윤희 사장님한테 뭐 들은 거 없어?”
“음? 그냥 잘하고 오라고…….”
“혹시 서길석에 관해 아는 거 있나?”
“아니? 그건 왜?”
“오케이.”
더 볼 거 없네.
드륵.
자리에서 일어나니 민수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
“아직 메뉴도 안 나왔는데 어디 가?”
“민수진.”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르자 민수진은 뭔가를 느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이제 내가 연락할 일 없을 거다. 너도 연락하지 마.”
“…….”
내 선언에 민수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이내 눈가가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를 숙이고 그런 민수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야, 우냐?”
……이러면 내가 나쁜 사람 같잖아?
* * *
“크어…….”
끝까지 버티던 대머리가 의자 뒤로 우당탕 굴러떨어졌다.
배상훈은 그걸 보며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겼…… 욱.”
쿵!
결국 혈중알코올농도를 이기지 못한 배상훈이 책상에 머리를 처박고 기절했다.
라세흠은 반쯤 풀린 눈으로 그걸 쳐다보다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푸흐…….”
소주병으로 가득한 테이블 너머로, 고상미가 고개를 꾸벅거리고 있었다.
거의 기절 직전으로 보였지만, 어떻게든 정신력으로 버티는 모양새였다.
‘독하다, 독해.’
라세흠은 그런 고상미에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야. 이제 그만해라. 승부는 난 거 같은데…….”
그 제안에도 고상미는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내가 먼저 가면 안…… 욱.”
고상미가 완전히 그로기 상태라는 걸 파악한 라세흠이 울렁거리는 속을 견디며 히죽 웃었다.
“자라.”
쾅!
억지로 정신을 붙잡던 고상미는 이내 테이블 위에 머리를 처박았다.
“끙……!”
라세흠은 무거운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최종 승자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 라세흠도 순간 지끈거리는 머리에 테이블을 붙잡았다.
“으윽…….”
하지만 이대로 쓰러져 잘 순 없었다.
자는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라세흠은 비척거리는 발걸음으로 열린 문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몇 분 뒤.
슬쩍.
쓰러져 있던 고상미의 눈꺼풀이 열렸다.
“으…….”
머리가 깨질 것 같았지만, 몸의 회복력이 워낙 빨라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기절했나……?’
고개를 들어보니 라세흠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
고상미는 주량 대결에서 졌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동시에 묘한 감정이 들었다.
‘이것도 못 이겼다는 건가.’
호승심인지, 호감인지 모를 그 감정에 고상미가 열린 문 쪽을 쳐다봤다.
그리고 혀로 입술을 살짝 핥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내가 찍은 남자야.”
이번 생은 빌런이다
지은이 : 글빌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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