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252
#252화
“후…….”
바다에서 흘러오는 짠 내를 맡으니 오묘한 기분이 되곤 한다.
어릴 적에는 그렇게 좋았는데, 부대에서 훈련할 땐 바다 냄새만 맡아도 치가 떨렸거든.
슥.
나는 눈 앞에 펼쳐진 인천 앞바다를 보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민지훈. 그놈은 지금쯤 물고기 밥이 됐겠지.
솔직히 그동안 보여 준 것에 비해 허무하게 당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놈도 뼈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다.
우리 측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것도 있고, 사람이 죽어 나간 현장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어서 빠르게 자리를 뜨긴 했다.
민지훈이 경찰 쪽을 매수해 항구 주변을 싹 다 비워 버렸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으니까. 당시엔 다급한 상황이었다.
‘아쉽단 말이야.’
마음 같아선 전생의 방식대로 확실히 공구리를 쳐 버리고 싶긴 했는데, 심장이 멎은 채로 생화학 무기와 함께 바다에 던져졌다.
정말 천운이 따르지 않는 이상 살아날 구석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만에 하나 조력자가 있었다면 말이 달라지긴 하겠지.’
H라고 했나. 그놈이 사라졌다고 했지.
후에 들키지 않게 항구 주변을 수색해 봤지만, 사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구심점을 잃은 공리회는 시간이 갈수록 결속력이 약해졌다.
정계의 인사들은 애초부터 떳떳하지 못한 관계였으니 다들 처음부터 관계없었다는 것처럼 모르쇠로 일관하는 분위기였고, 말단들은 어차피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었다.
그렇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조직은, 음식이 사라진 식탁 위 파리 떼와 같이 서서히 흩어져갔다.
민지훈이라는 리더의 부재만으로 말이다.
턱.
상념을 이어나가던 내 어깨를 누군가 뒤에서 붙잡았다.
“왜 바다 보면서 혼자 궁상이야?”
“아닙니다.”
뒤를 돌아보자, 라세흠 부장님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왜. 요새 잘 안 되냐?”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떨어져요.”
그날 이후로, 유나 씨와의 관계는 순조롭게 진전되고 있었다.
솔직히 연애 잘하고 다니던 사람들이 보기엔 좀 답답할 순 있어도…… 우리 둘 다 처음 겪는 과정이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히죽대는 부장님을 보며 반격했다.
“그러는 부장님은, 잘 돼 가세요?”
“뭣.”
“고상미 씨랑. 잘 돼 가시냐고요. 둘이 알콩달콩하게 헬스장 투어도 다니고, 대련도 자주…….”
“에, 에이 씨.”
당황한 부장님이 뒤돌아 성큼성큼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들었어요. 저녁은 단둘이 먹는다면서요?”
“시끄러!”
후다닥!
부장님이 어디론가 달려갔다.
조금만 건드려도 저렇게 부들거릴 거면서, 왜 나한테 이러는지 모르겠다.
부대원들 괴롭히는 게 삶의 낙이었던 양반이라 그런가.
피식.
나도 바다를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인천에 온 이유는 하나. 팀원들의 단체 휴가 때문이었다.
몇 주간은 각자 가족도 만나고 하느라 바빴지만, 휴가가 슬슬 마무리되는 이 시점에서 한번 다 같이 모이는 게 어떻겠냐는 부장님의 적극적인 어필이 있었다.
그래서 결국 을왕리해수욕장 근처의 펜션을 잡긴 했는데, 그래 봤자 아직 3월 중순이다.
밤이 되기 전에도 쌀쌀한 이 날씨에 해수욕장에 누가 있겠냐고.
저번에도 텅 빈 겨울 바다에서 자기네들끼리 놀더니, 이번에도 그러게 생겼다.
그래도 나쁘진 않네.
솔직히 애들이 전부 모이는 것도 오랜만이기도 하고.
고향인 통영에 한참 내려가 있던 후배 녀석들도 간만에 보겠어.
“흠.”
이제 4시가 조금 넘었다.
8시에 다들 펜션으로 모여 바비큐 해 먹기로 했으니, 그때까진 시간이 조금 남는다.
부장님이랑 나는 구경도 할 겸 미리 도착한 거라서.
‘구경이나 좀 할까?’
야쿠자들이 있는 인천이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뒷세계 이야기.
게다가 알아본 바로는 이 근처엔 야쿠자들이 많이 없다.
혹시 모를 사고도 걱정 없단 말이지.
물론 사고를 당하는 건 그쪽이겠지만 말이야.
“쓰읍…….”
나는 연신 추임새만 넣으며 고민했다.
같이 온 유나 씨는 고상미랑 구경하러 갔고, 부장님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쩌다 보니 혼자 남았는데…… 시간 때울 게 마땅치 않다.
우웅-
뭐 할지 고민하던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저녁까지 오기로 한 우재성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아, 대표님. 어디십니까?
“여기 해수욕장 근천데, 왜요?”
-펜션 근처에 도착해서 연락 드렸습니다.
“일 있다고, 시간 맞춰서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요. 출출한데 배나 채울까 해서 미리 왔습니다. 생각 있으십니까?
이거, 마침 적적했는데 잘됐네.
“반가운 소식이네요.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제가 미리 알아본 가게가 있습니다. 주소 찍어 드릴 테니 그쪽으로 오시죠.
“알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우재성이 문자로 보내온 주소를 확인했다.
미식이 취미인 우재성의 심사를 통과했다는 건 보장된 맛집이라는 거다.
그렇게 내 차로 향하려다, 한창 쇼핑 중일 유나 씨가 떠올랐다.
기왕 맛있는 거 먹으러 가는 김에 같이 들면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문자를 보내자 금세 답장이 돌아왔다.
[유나 씨: 좋아요! 상미 언니랑 같이 갈게요.]상미 언니라. 언제 친해졌대.
솔직히 둘이 잘 맞을까 걱정도 있었는데, 기우였던 것 같네.
나는 어디로 간지 모를 부장님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보내 드린 주소로 와요.”
-왜.
“맛있답니다. 횟집.”
-회?
“예. 회요. 고기 구워 먹기 전에 예열이나 합시다.”
-오케이. 바로 간다.
뚝.
부장님은 바로 출발하려는지 그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큭.”
미소 지은 나는 내 차를 향해 움직였다.
.
.
.
드륵-
“왔냐?”
“오셨습니까?”
문을 열고 들어가니, 미리 도착해 있던 부장님과 우재성이 나를 맞이했다.
“아이고, 먼저 들고들 계시지.”
“얀마. 그래도 네가 대푠데 먼저 맛은 봐야지 않겠냐.”
참. 분명 처음에는 직책 같은 거 맡을 생각 없었는데.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네 이름으로 큰 방 하나 빌렸다.”
“잘하셨어요.”
“아, 주문은 미리 해 뒀습니다.”
“그래요?”
우재성이 자신만만하게 설명했다.
“이 근처 가게는 대부분 어시장 산인데, 여기는 낚싯배와 직접 계약해 항상 신선한 해산물로 공급받는답니다.”
“오호.”
같은 사람이 뜬다는 가정하에, 회는 신선할수록 무조건 맛있다.
괜히 낚싯배에서 잡은 고기를 바로 회 떠 먹는 게 아니거든. 그게 제일 진미라 그런 거지.
기대감에 손을 비비며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던 중에 문이 열렸다.
드륵-
“죄송해요. 조금 늦었죠?”
나는 벌떡 일어나 유나 씨를 맞이했다.
“오셨어요?”
“나도 왔어.”
“어떻게, 구경은 잘 하셨어요?”
내 물음에 고상미가 뒤로 묶은 머리를 팔랑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뭐, 딱히 흥미 가는 건 없더라고.”
“전 그래도 재밌었어요.”
“다행이네요.”
착. 착. 착.
유나 씨의 앞에 수저와 양념장을 세팅했다.
“우재성 씨가 추천한 가게예요.”
“오. 정말요? 기대되는데요?”
밑반찬들을 집어 먹고 있자니, 커다란 접시에 예쁘게 담긴 회가 눈부신 자태를 드러냈다.
“캬…….”
광어, 우럭, 참돔 등.
나는 내로라하는 생선들이 소복이 쌓인 자태를 흐뭇하게 쳐다봤다.
“잘 먹을게.”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먹읍시다.”
스윽.
그렇게 입안으로 간장에 살짝 찍은 광어를 한 점 가져가던 순간.
-어이, 아저씨.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바깥에서 누군가를 위협하는 목소리와 함께, 가게 사장님의 겁먹은 음성도 들려왔다.
-시, 싫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제가 아는 선장님과 따로 계약한 건데, 왜 그걸 파기하고 당신이랑 거래를 해야 합니까?
-토 달지?
그 소란에 부장님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나가 볼까?”
“제가 볼게요.”
내가 몸을 일으키자 유나 씨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무 과하게 하시면 안 돼요.”
“아, 그래야죠.”
유나 씨는 어지간한 일로는 이쪽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싫어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씁.”
우선, 신성한 식사 시간을 방해하는 게 대체 어떤 놈인지 얼굴이나 한번 봐야겠다.
드륵.
살짝 방의 문을 열어 내다보자, 번들거리는 머리를 싹 넘긴 양아치같이 생긴 놈들이 건들대고 있었다.
놈은 사장님의 면전에 대고 손가락질하며 으르릉댔다.
“오늘은 내가 일이 있어서 금방 가는데, 다음에 찾아왔을 때는 대답이 달라져야 할 거야.”
“…….”
“가자.”
척 봐도 깡패처럼 보이는 남자들이 우르르 가게를 떠나고,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사장님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놈들은 뭡니까?”
“아……. 그, 이 동네에서 유명한 건달들입니다.”
“의도치 않게 사정은 대강 들었습니다. 거래처를 자기네들이 관리하는 어시장으로 돌리라고 협박하는 겁니까?”
내 말에 사장님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예……. 원래는 이 근방 다른 가게들도 저랑 비슷하게 운영했습니다만, 저놈들이 오고 나서 다들…….”
“흠.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거래하는 가게가 잘 되든 안 되든, 그냥 물건이나 납품하고 돈이나 받겠다는 심보인가.
감사하다는 소리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사장님을 뒤로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어시장이라…….’
궁금해하는 부장님에게 사정을 설명해줬다.
“이 새끼들이. 안 그래도 먹고 살기 힘든 자영업자를 건드려?”
수원 왕갈비 집을 운영하는 부모님이 생각났는지, 부장님은 분개한 표정으로 회를 한 움큼 집어 먹었다.
“어시장에 있댔지? 다 먹고 한번 가 봐야겠구만.”
“나도.”
“쩝.”
고상미도 흥미를 느꼈는지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말리긴 힘들 것 같은데……. 그냥 둬야 하나?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나는 일단 접시를 향해 손짓했다.
“일단, 먹을까요?”
음식을 이렇게 내버려 두는 건 실례지.
***
조금 전 횟집에서 행패를 부린 남자.
유정태는 부하들과 함께 한 건물로 향했다.
“여기서 대기해.”
저벅.
혼자 계단을 올라간 유정태는 바로 보이는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접니다.”
-들어와.
끼익-
“아직 멀었나?”
유정태는 들어가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움찔하며 대답했다.
“그, 아무래도 갑작스럽게 바꾸려니 반발이 심…….”
“그 반발을.”
창가에 등을 보이고 서 있던 남자가 몸을 돌렸다.
“무마하는 게 네 역할 아닌가?”
무기질적인 남자의 한쪽 눈을 마주한 유정태가 황급히 허리를 접었다.
“죄, 죄송합니다.”
“고작 사과나 받자고 부른 것 같나?”
유정태의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눈앞의 남자가 자신의 부하들을 맨손으로 박살 내는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다행히도 남자는 처벌이 아닌 다른 용건으로 이야기를 꺼낸 듯했다.
“이제 어시장은 됐다. 다음으로 할 작업을 알려 주지.”
“예. 맡겨만 주십쇼!”
남자는 씩씩하게 답하는 유정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동인천에 있는 유흥가. 알고 있나?”
“아, 예. 예전에는 자주 놀러 갔었는데, 야쿠자들이 밀고 들어온 후로는 간 적 없습니다.”
“너희가 그쪽으로 가 줘야겠다.”
“가서 뭘 하면 되겠습니까?”
“그건 나중에 알려 주겠다. 바로 이동해.”
“옙!”
고개를 팍 숙인 유정태가 황급히 방을 나섰다.
남자는 그 뒷모습을 보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후…….”
그의 정체는 민지훈의 경호대 2인자, 부대장 모재욱이었다.
모재욱의 머릿속에는 ‘인천 야쿠자를 정리하라’는 민지훈의 마지막 지시만이 맴돌고 있었다.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그 전까지 그의 성대한 복귀를 위해 길을 닦고 있으리라.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걸 상기한 모재욱은 창틀에 손을 얹었다.
‘이곳 인천을, 당신을 위한 장소로 만들어 두겠습니다.’
그리 다짐한 모재욱의 의안이, 비쳐 드는 햇빛에 하얗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