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256
#256화
끼익-
유흥가를 가로지르며 달리던 차가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그때 거기네요?”
나는 차에서 내리며 화려한 조명이 들어찬 건물을 살폈다.
스가와라와 처음 만났을 때 왔던 그곳이었다.
“가시죠.”
미우라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우선, 생각보다 체류 기간이 늘어나 유나 씨와 정태섭. 그리고 우재성을 비롯해 본진을 지킬 몇 명 정도는 먼저 서울로 돌려보냈다.
지금부터 할 일에 그렇게 많은 인원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사실 나 혼자서도 충분하긴 한데, 그래도 남고 싶다는 사람들은 남겨 둔 거다.
띵.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올라가니, 정면에 있는 커다란 문짝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도 저번에 봤던 거라, 앞장서 걷던 미우라에게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지금 안에 있습니까?”
“……잠시 기다려 주시길.”
미우라가 고개를 까딱하자, 문가에 서 있던 기모노를 입은 종업원들이 문을 열었다.
드르륵-
“들어가시면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는데, 안에 있던 종업원들이 다들 바깥으로 나갔다.
“들어오지.”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발을 걷고 들어섰다.
“오랜만이군.”
기다란 좌식 테이블.
상석에 앉은 중후한 인상의 중년, 스가와라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앉게나.”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에 나도 마주 미소를 보내며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털썩.
“선약이 있던 것 같던데. 이거, 내가 방해한 건 아닌가 몰라.”
“방해는 무슨.”
스가와라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동안 대가도 치르지 않고 연락도 없던 사람이 찾아왔는데, 당연히 우선으로 만나야지.”
나는 그 살벌한 표정을 보며 옆에 놓여 있는 사케를 한잔 따랐다.
“설마 내가 떼먹겠어? 여유를 좀 가지라고.”
뻔뻔하게 말하자, 스가와라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지금 그게 할 말인가?”
“그래서 왔잖아. 우리도 휴식이 조금 필요했다고.”
“후……. 어쨌든, 여길 제 발로 찾아온 이유가 뭔가.”
“한 가지 알려 줄 게 있어서 말이야.”
“흠. 뭐지?”
스가와라가 흥미가 생긴 듯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나는 그런 그에게 선언했다.
“누군가, 네 나와바리에 작업을 치고 있다.”
“……작업이라면.”
스가와라의 굳은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쪽의 거리를 망치려고 한단 소리야.”
“직접 ‘본’ 건가?”
미래를 본 거냐는 의미가 담긴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소식 못 들었나?”
“무슨 소식.”
“오늘 웬 양아치 하나가 가게들을 들쑤시고 다닌 거.”
“흠. 미우라!”
미우라가 곧장 문을 열고 성큼성큼 들어왔다.
“예. 카시라.”
“오늘 누가 업소에서 행패를 부렸다는데, 사실인가?”
내 눈치를 보는 건지, 미우라는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맞습니다. 안 그래도 조사 후 보고드리려고 하던 사안입니다.”
“특이 사항은?”
“…….”
“말해라. 이미 알고 있을 테니.”
날 힐끗힐끗 보던 미우라가 설명했다.
“의도적인 행동으로 보입니다. 양동철 사장이 저지른 짓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군. 자네도 같은 의견인가?”
자신의 수하도 같은 소리를 하자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 듯, 스가와라는 선뜻 나한테 물었다.
그에 나는 피식 웃으며 부정했다.
“그럴 리가. 그런 짓을 할 깡이 있었으면 진작 저질렀겠지.”
“그런가.”
“거기다, 놈의 배후는 고작 조폭 따위가 아니었어.”
“배후를 알고 있단 말인가? 누구지?”
“그것까진 나도 모르지. 다만, 고도로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파악했다.”
내 말에 스가와라가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훈련이라……. 뭐지? 설마 본토에서? 아니, 그럴 리가…….”
“이 정도면 도움이 됐으려나?”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스가와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설마, 이걸 알려 주고 넘어갈 생각인가?”
“뭐. 왜.”
“……양심이 없나.”
씁. 은근슬쩍 빚 갚은 셈 치려고 했는데.
스가와라는 그래도 내 정보가 도움이 되긴 했는지, 한층 누그러진 투로 말했다.
“여하튼 고맙군. 누군진 몰라도, 놈에게 대응할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어.”
“들은 바로는 몸이 날래고 판단이 빠르다더라고. 아마 조직원들 푸는 거로는 잡기 힘들 거다.”
“흠…….”
스가와라의 시선이 미우라에게 향했다.
자신의 오른팔인 미우라와 상대를 가늠해 보는 듯 고민하던 스가와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감한 상황이긴 하군. 그놈이 왜 나를 건드리는 건지……. 과거의 원한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옆에 서 있던 미우라가 나를 은근히 노려봤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사케를 한 잔 더 따르며 스가와라에게 볼일은 이게 끝이냐고 물으려 했다.
하지만 스가와라가 선수를 쳤다.
“미우라. 둘이서만 나눌 이야기가 있다.”
“예.”
미우라가 군말 없이 사라지고,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스가와라가 입을 열었다.
“자네, 선생과 맞붙었지. 맞나?”
“…….”
이게 본론인 듯 스가와라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솔직히 그 자와 전면전을 벌인다는 말을 듣고…… 자네를 이 자리에서 다시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네.”
“그래서, 뭐가 궁금한 거지?”
“녀석의 마지막은 어땠나.”
그게 궁금한 거였군.
비록 갈라서긴 했지만, 어쨌든 민지훈은 스가와라와 꽤 가깝게 지내던 사이다.
놈이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알고 싶은 게 당연하겠지.
“자살했다.”
“……뭐?”
“자기 가슴팍에 이상한 주사기를 꽂더니, 이내 심장이 멎었다. 시신은 물고기 밥으로 던져 줬고.”
내 말에 스가와라가 충격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생각한 것과는 달라서 그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정말인가? 확실히 죽었나?”
“심장이 멈춘 채로 바다에 던져졌는데, 멀쩡히 살아 있는 것도 기적이지.”
“믿을 수가 없군……. 녀석이 자살했다니. 그동안 쌓아 올린 모든 걸 자기 손으로 걷어찼단 말인가?”
솔직히 나도 저 말에는 동감이었다.
처맞기 전에는 자기 목적을 그렇게 열심히 설파하더니만, 피떡이 된 채로 끌려가다 보니 생각이 바뀐 건지 죽어 버렸으니까.
나는 동요를 감추지 못하는 스가와라에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글쎄. 나한테 계속 두들겨 맞는 것보단 죽는 게 나았나 보지.”
“녀석을 두들겨 팼다고? 직접 말인가?”
“어. 얼굴을 아주 야무지게 다져 줬는데.”
“……그 경호대를 뚫고 말인가? 정말 대단하군. 믿을 수 없을 정도야.”
“경호대?”
경호대라.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그 배 안에서 마주친 건 아귀 그놈밖에 없었는데.
선상 위에 있던 무장한 놈들을 말하는 건가?
내 표정을 본 스가와라가 의아한 듯 물었다.
“경호대와 싸운 게 아니었나?”
“몇 놈들과 마주치긴 했는데, 선생의 곁에서 지키는 사람은 없었어.”
스가와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혼자 있었다고?”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가 경호대도 없이 자네를 기다렸다니…….”
저 말을 듣다 보니, 나도 그때 배를 지키는 인원이 조금 부족하지 않나 생각했던 게 떠올랐다.
“어지간한 조직도 몇 시간 안에 궤멸시킬 수 있는 게 선생의 경호대다.”
“…….”
나는 순간 떠오르는 불길한 상상에 눈을 부릅떴다.
그 상상이 이내 한 마디로 구체화되자 저절로 주먹이 꽉 쥐어졌다.
‘설마…….’
민지훈은, 어쩌면 아직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
.
.
.
“하…….”
스가와라의 업소를 나선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바퀴벌레 같은 놈이네.’
민지훈. 그놈이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불안감과 불쾌감이 감돌았다.
만약 민지훈이 진짜로 목숨이 붙어 있다면, 아마 약물 같은 걸 이용해서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게 심장 박동을 극단적으로 줄였을 거다.
다만 의문인 건, 우리는 바다를 통해 침투하는 과정에서 수상에는 적이 없다는 걸 확인했었다.
심장이 멈춰 있던 놈이 헤엄을 쳐서 빠져나갔을 리는 없고, 누군가 건진 걸 텐데…….
‘H였나, 그놈이 빼돌린 건가?’
골치 아프네.
정말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
복면남이 경호대의 일원이라고 쳤을 때.
그놈은 왜 인천까지 기어들어 와서 이런 작업을 치는 걸까.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
‘스가와라를 축출하기 위해서다.’
자신을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한 스가와라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인천의 유흥가를 시작으로 새로운 계획을 꾸미는 것일 수도 있다.
전자라면 그나마 낫지만, 후자라면 복잡해진다.
앞뒤로 맞물리는 상황으로 미루어 봤을 때, 민지훈은 자살이 아닌 의도적인 ‘퇴장’을 했을 가능성이 크니까.
다른 이들의 눈을 가리기 위해 나를 ‘선생을 무너뜨린 사람’으로 만들어 놓을 생각이었던 거다.
‘이게 사실이면 진짜 미친놈이야.’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목숨을 건 도박을 한 거다.
자신이 구축한 공리회라는 조직을 버려 가면서.
“하, 씨…….”
솔직히 정말, 정말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과 당시의 정황.
그리고 무엇보다 내 직감이 의견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었다.
놈이 정말로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우선, 놈의 주변 사람부터 조사해 봐야겠지.’
복면남의 추적은 저쪽에 맡겼으니, 나는 하나 남은 민지훈의 측근을 찾아낼 생각이다.
‘이윤종 박사.’
민지훈의 지도 교수이자 화학, 생리학, 생물학 분야의 저명한 과학자.
놈들이 사용하던 약물의 다수를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놈을 우선으로 잡는다.
‘놈이라면 민지훈의 행방에 관한 단서를 알고 있겠지.’
그리고, 민지훈이 살아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관뚜껑에 못을 박아 줄 것이다.
***
한편, 그 시각.
이윤종 박사는 은신처 안에서 자신이 만든 작품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통각을 마비시키고, 신경전달물질의 수치를 늘려 복용자를 단시간에 각성상태로 빠지게 하는 ‘성수’.
그리고 심장 박동을 극단적으로 낮춰 가사 상태에 빠지게 하는 가사약 ‘십자가’와, 심장을 큰 부작용 없이 다시 원상태로 복구시키는 ‘이스터’.
마지막으로 이윤종과 민지훈이 공동 제작한, 그들이 가진 최강의 패이자, 기화 성질이 있는 비말 형태의 독가스와 탄저균을 베이스로 만든 세균을 광범위하게 퍼뜨리는 최악의 무기.
거기다 지속적으로 연구 중인 옵션을 더 붙이면 가히 하나의 팬데믹이 될.
“하르마게돈.”
종말이라는 광오한 이름을 붙일 정도로, 이윤종 박사는 자신이 만들어 낸 무기에 강한 애착을 지니고 있었다.
이윤종은 병원체를 배양 중인 실험실의 문을 쳐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민지훈이 기폭시킨 생화학 무기는 어디까지나 프로토타입. 아직 완성되지 못한 미숙아일 뿐이었다.
‘기대되는군.’
제대로 만들어진 ‘종말’이 세계를 공포로 지배하는 것.
그 광경을 상상한 이윤종이 광기에 찬 눈빛으로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흐하하하!”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그의 진짜 본성이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 비밀 안가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십시오.”
이윤종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한 뒤 표정을 갈무리했다.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와요. 선생.”
무표정하게 들어온 선생, 민지훈은 다른 말 없이 한 마디를 뱉었다.
“시작합시다. 거래.”
이윤종이 찢어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려 가며 답했다.
“그 말을 기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