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261
#261화
우리는 다 같이 모여 백기준이 가져온 모스 부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비밀 회선이 있었단 말이지.”
“하긴, 그놈도 뭔 짓거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연락은 했을 테니까.”
나는 명함 크기의 철판 뒤에 모스 부호로 양각된 숫자를 매만지며 말했다.
“연락, 해 볼까요?”
“뭐? 진심이냐?”
“못할 게 뭐 있어요? 눈치채고 안 받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받으면 시원하게 욕이나 퍼부어 주면 되죠.”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잠자코 듣던 부장님이 씩 웃었다.
“좋은데? 어차피 연락이 끊기면 복면남이 붙잡혔다는 건 금방 알아채겠지. 그전에 한 번은 시도해 보자고.”
그 말에 팀원들이 낄낄대기 시작했다.
“좋았어. 일단 그놈 방으로 갑시다.”
벌컥!
우리는 복면남이 구속되어 있는 방으로 들어가 통신장비를 챙겼다.
그리고 복면남의 눈앞에 털썩 내려놨다.
“야. 비밀 회선이 있으면 있다고 얘기를 해 줘야지.”
“…….”
내가 얼굴에 대고 철판을 팔랑팔랑 흔들자, 놈은 반쯤 포기했는지 나를 말 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자. 누가 받나, 한번 볼까?”
탁. 찰칵.
나는 복면남이 보는 데서 주파수를 맞추고 통신을 시도했다.
삐-
짧은 기계음과 함께, 통신이 연결된 듯 치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니, 스피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가.
그런가는 무슨 그런가.
설마 바로 알아챘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한마디를 하려던 순간.
뚝.
바로 통신이 종료됐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가차 없이 끊어 버린 모양이었다.
두 글자로 손절.
나는 복면남을 내려다봤다.
“어쩌냐. 너 버려진 것 같은데.”
“…….”
“방금 목소리, 누구야? 내가 대신 복수해 주마.”
내 말에 복면남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개소리 집어치우고 죽여라. 더 이상 나한테 인질로서의 가치는 없지 않나.”
“쩝.”
틀린 말은 아니네.
고문해도 안 불어, 동료들한테 꼬리 잘려.
거기에다 성격도 더럽고 말이지.
사실 이놈을 계속 데리고 있을 이유는 없긴 하다.
그렇다고 죽이는 건 아닌 것 같고.
‘어떻게 써먹을 방법이 없나?’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 일단 짱박아 두면 언젠간 쓰겠지.”
“……뭐?”
“기준아. 네가 관리할래?”
내 말에 백기준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좋지. 튼튼해서 잘 망가질 것 같지도 않고.”
“오케이.”
자기를 두고 오가는 대화에 복면남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나는 그런 놈에게서 시선을 돌려 팀원들을 쳐다봤다.
선생이 살아 있다는 걸 안 이상, 휴가는 여기까지다.
“이제 복귀합시다. 서울로.”
.
.
.
-문제를 해결해 줘서 고맙네.
“별말씀을.”
나는 SA시큐리티의 사무실로 돌아와 스가와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살인 용의자로 몰린 것도 있고 해서 실질적으로 영업을 중단하긴 했지만, 어차피 현재 이 건물은 내 소유라 그냥 쓰고 있다.
-그래도 말없이 떠나니 아쉽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시네.”
-자네한테 물어볼 이야기가 많아서 말이야.
“그 새끼 살아 있는 거 알려 줬으면 됐지, 뭐 또 궁금한 게 있다고 그러시나. 숨기는 거 있을까 봐?”
-……그건 아니지.
“아니긴 무슨. 이 정도 한배를 탔으면 좀 믿는 것도 괜찮을 텐데, 참.”
내 핀잔에 스가와라가 머쓱한 헛기침을 뱉었다.
아무래도 내가 복면남에게서 빼낸 정보를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하고 있던 것 같다. 괘씸하게도.
“어쨌든, 이젠 알아서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더 이상 그쪽을 지켜 줄 생각은 없으니까.”
-우리도 마찬가지다. 알고 있는데 당하는 것만큼 멍청한 게 없지.
“더 할 말 없지? 그럼, 나중에 기회 되면 또 보자고.”
-알겠…….
탁.
통화를 종료하고, 핸드폰을 접어 책상 위에 올려뒀다.
이제 슬슬 SA시큐리티의 충실한 노예…… 아니, 직원들을 다시 불러 모을 시간이다.
한동안 안부만 묻고 지내던 경찰, 검사 양반한테도 다시 접촉해 봐야 하고.
“하.”
당분간 바쁘겠어.
복면남의 통신장비는 구식에다가 아날로그 방식이라, 고세운이 해킹해서 상대 좌표를 특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이윤종 박사의 행방이나 조사해 달라고 했는데, 이게 최근에 성과가 하나 있었다.
‘미국에서 흔적이 발견됐지.’
‘닥터 리’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한 호텔에서 체크인했다는 게 딱 걸렸다.
이놈이 어떻게 출국했나 찾아보니, 가명을 사용해 비행기 타고 날아갔더라고.
그것도 내가 선생을 족치기 일주일 전에.
‘분명 뭔가를 알고 있어.’
그게 아니라면 먼저 미국으로 떠났을 리가 없다.
민지훈이 사장으로 있던 IT 회사. 알아보기로 놈은 미국 출장이 잦았다.
박사가 미국에 있다면, 선생도 거기 있을 확률이 높겠지.
“쓰읍. 또 미국에 가 봐야 하나.”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유나 씨부터 찾아가 이 비보를 전해야겠다.
***
[아, 아. 들리십니까?]DS컴퍼니의 이사, J는 화면 위로 띄워진 얼굴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윤종 박사.
선생 측의 인물 중 하나로, 최근 실종된 선생에게서 물자를 탈취해 DS컴퍼니와 협상하려 들고 있다.
선생이라는 뒷배를 가진 것도 아니면서 저렇게 거들먹거리는 게 보기 불쾌했지만, 이윤종 박사가 그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 이상 함부로 대할 순 없었다.
거기다 그의 지식. 충분한 자금 지원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런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닌가.
J는 진심으로 이윤종 박사가 왜 군사 연구에 몸담지 않고 일개 교수 생활을 했는지가 의문이었다.
꾹.
이런 의문을 접고 버튼을 눌러 자신의 얼굴 또한 상대의 화면에 보이게 만들었다.
“들립니다.”
[오. 보이는군요.]“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굳이 더 말을 섞고 싶진 않았다.
상대도 그와 마찬가지였는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내부 조율은 다 끝났나 봅니다?]“그렇습니다. 상부는 닥터 리의 제안이 ‘과하다’라고 판단했습니다.”
그 말에 화면 안의 이윤종이 인상을 살짝 구겼다.
[하하……. 이거, 제가 생각한 답변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제 사견이 들어가진 않았습니다. 객관적인 사실만 전달했을 뿐.”
[그런데도 그런 결론이 나왔다라……. 이해할 수 없군요.]“원하는 답변을 들려드리지 못해서 유감입니다.”
[……시 갈아치우는 게…….]“뭐라고 하셨습니까?”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던 이윤종이 고개를 들었다.
[아닙니다.]“그럼, 상부의 추가 의사를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지분의 7% 정도는 양도가 가능하며, 닥터 리가 가진 생화학 무기의 사용 권한은 DS컴퍼니에게…….”
[개소리는 집어치웁시다. J.]“……뭐?”
이윤종은 굳은 표정으로 유리로 된 작은 바이알을 들어 화면에 보여 줬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모릅니다.”
[인간을 병기로 만들어 주는 ‘의약품’입니다.]“각성제 같은 겁니까?”
[시중에 나도는 그런 저열한 수준의 것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모르핀의 통각 억제와 코카인류의 신경 자극. 그 두 효과가 상충하지 않고 작용해 복용자를 인간 병기로 만들어 주는 게 바로 이 ‘성수’란 말입니다. 중독성도 극도로 낮은 최종 타입입니다.]이윤종의 설명을 들은 J가 미간을 좁혔다.
“그게 정말입니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습니까? 참고로, 이 약품은 양산이 가능합니다.]“…….”
[조건을 바꿀 생각이 드십니까?]J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조직원들의 무력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DS컴퍼니의 특성상, 저 약품만 있다면 집단의 전력을 두 배 이상은 끌어 올릴 수 있다.
‘제기랄……. 함부로 결정하기 힘든 제안이다. 또 그 늙은이들과 입씨름을 해야 하는 건가.’
갈등에 빠진 J에게 이윤종이 말했다.
[J, 당신이 거래가 잘 성사될 수 있게 도와준다면…… ‘개인적인 거래’를 할 생각도 있습니다.]그 은근한 말에 J가 멈칫했다.
만약 저 성수라고 불리는 물건이 있다면, 자신의 ‘고아원’에서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손가락을 까딱이며 고민하던 J가 화면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더 보여줄 패는 없습니까? 이번에도 상부에서 반려하면 입장이 난감해지실 텐데.”
[14%. 14%의 지분을 요청한다고 전달해 주시죠.]“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생화학 무기에 병기화 약물과 14%의 회사 지분.
늙은이들의 대가리가 장식이 아닌 이상, 이번 제안은 받아들여질 확률이 높다.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예.”
화상 통신이 종료되고, J는 몸을 의자 뒤로 기대며 피로한 눈을 문질렀다.
“제길.”
J는 신중한 성격 탓에, 외부와의 협상과 대외 활동에 자주 나서곤 한다.
그리고 휘하 조직원들도 꽤 많아 공작, 암살 등의 업무 처리도 맡고 있다.
거기에 이윤종 박사의 거래 내용을 상부에 전달하고 설득하는 역할까지 맡으니, 최근 들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주혁, 그 남자도 우선순위에 있는데 말이지.’
선생의 몰락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
그의 일거수일투족까지는 아니더라도, 행동 패턴이나 주변 사람들 정도는 현지의 수하들이 파악하고 있다.
현재는 한 항구도시에서 휴가를 즐긴다던데, 무슨 의도가 담긴 건지는 아직 보고받지 못했다.
‘지원을 보내야겠군.’
첩보와 정보수집의 베테랑.
그를 보내면 아마 약점이 될 뭔가를 찾을 수 있을 터.
그 후에 회유든, 협박이든 해서 선생의 행방을 알아내면 된다.
씨익.
J가 옅게 웃음을 지었다.
계획대로만 일이 돌아간다면…….
‘수뇌부부터 싹 다 갈아 치워 주지.’
사고방식부터 글러 먹은 늙은이들을 전부 제거하고, DS컴퍼니의 수장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꿈은 아닐 것이리라.
J는 그를 상상하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어? 주혁이?”
풍원한정식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얼굴이 나를 맞이했다.
여기 직원이자, SA시큐리티의 프론트 담당.
강예원이 나를 반갑게 맞이하다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 오랜만이다. 인천 놀러 갔다며?”
“어.”
“왜 나 빼고 가? 나도 직원인데. 섭섭해?”
“음.”
“우리 사장님만 쏙 빼 가고.”
크흠.
듣고 보니 조금 미안하긴 하네.
풍원한정식은 휴업에, SA시큐리티는 당분간 영업 중지였으니.
어디 출근할 데도 없었을 것이다.
“뭐, 그래도 덕분에 푹 쉬면서 엄마랑 오래 대화도 했으니까. 한 번은 봐줄게.”
사이비에 빠져 있던 강예원의 어머니는 현재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
강예원은 거길 시간 날 때마다 왔다 갔다 하며 어머니를 찾아뵙는다.
입원비는 내가 전액 지원해 줬고, 각종 클리닉을 동원한 결과 상태가 조금 호전되셨다고 들었다.
“그래, 고맙다. 그래서 사장님은?”
“안에 계셔. 지금 바쁘실걸?”
“하긴, 그런가.”
마침 저녁 시간이니 한창 피크일 때다.
“자리 있어? 온 김에 밥이나 먹자.”
“있지. 늘 먹던 걸로?”
“아니. 오늘은 좀 단출하게. 적당한 걸로 하나 주라.”
“알았어.”
주문을 받은 강예원이 떠나고, 나는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손님은 여전히 많네.’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니 음식이 나왔다.
“맛있게 드세요.”
“예. 감사히 잘 먹도록 하지요.”
탁.
강예원이 내려놓는 소갈비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때깔 봐라…….”
젓가락을 집어 들고 한 점 크게 베어 물려는데.
‘음?’
어딘가에서 이쪽을 향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에 고개를 살짝 돌리자, 한 백발노인의 건너편에 앉은 꼬맹이 하나를 발견했다.
끽해 봤자 고등학생도 안 됐을 것 같은 녀석이 국수를 열심히 먹고 있었다.
나는 소갈비를 한입 뜯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 꼬맹이에게서 뭔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부분을 발견한 탓이었다.
‘아. 이거, 싸한데…….’
녀석의 살짝 벌어진 품 안에, 무언가가 날카롭게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