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271
#271화
쿵!
무릎이 바닥에 닿으며 큰 소리가 폐공장을 울렸다.
“야……. 도가니 관리 해야 될 나이 아냐? 그렇게 막 꿇어도 되는 거야?”
내 말마따나, 가네무라 용수는 손가락을 까딱임과 동시에 무릎을 꿇은 뒤였다.
살짝 당황한 듯한 내 말투에 가네무라가 눈썹을 까딱였다.
“내가 을인데, 당연히 내가 굽혀야지. 나도 사내의 자존심이 있는지라 존대는 못 해 주는 점 양해해 주고.”
“뭐, 그건 알아서 하시고. 생각보다 저자세로 나오네? 요새 많이 궁하신가 봐?”
그 말에 가네무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쪽도 이쪽 나름의 사정이 있단 뜻이지. 예쁘게 봐 달라고.”
“예쁘게 보긴 지랄. 근데 뭘 알아서 만나자고 한 거냐?”
“알 건 다 안다. 나도 정보통이 없진 않거든.”
“뭘 안다는 건데.”
가네무라는 잠시 미간에 주름을 만들다 답했다.
“네가 어떤 능력으로 선생을 축출했고, 거기엔 이유가 있다는 거.”
“능력이라면 무슨?”
“뭐…… 머리든, 세력이든, 돈이든. 뭐가 앞섰으니 네가 선생을 잡았겠지.”
내가 민지훈을 몰락시킨 건 사실이다.
그런데 단순히 그거 하나만으로 날 찾아와서 무릎까지 꿇는다?
‘뭔가 미심쩍단 말이지.’
그 이유에 대해 스스로 추측을 했건, 누구한테 언질을 받았건 간에 믿는 구석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게 아니면 굳이 나한테 먼저 숙이고 들어올 이유가 없으니까.
어렴풋이 뭔가 결론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아직 확신할 단계는 아니었다.
생각에 남긴 나에게 가네무라가 물어왔다.
“네가 서울 바닥 조폭들은 꽉 잡고 있다며. 인천에 있는 스가와라 놈과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고.”
틀린 말은 아니다.
주철수의 사후 서울을 접수한 서울광목파의 보스, 고광목이 일단 내 아래에 있으니 말이다.
“내 요구사항은 이거다. 서울에 내가 안전하게 사업할 자리를 만들어 줘.”
“무슨 사업인지 듣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보자. 넌 나한테 뭘 해 줄 수 있는데? 혹시 너네 따까리 증원이라면 줘도 안 받는다.”
“고작 그런 거였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겠지. 그나저나 슬슬 다리가 저려서 그런데, 일어나도 되겠나?”
“좋을 대로.”
“끙…….”
가네무라는 몸을 일으킨 뒤 뻐근한지 다리를 주물렀다.
“확실히 나이가 드니 몸이 예전 같지 않아.”
“미안하지만 내가 시간이 좀 비싼 사람이라. 딴소리는 그만 듣고 싶은데.”
“그래. 알았다. 본론만 바로 말씀드리지.”
척.
손가락을 치켜든 가네무라가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한인들은 살아남기 힘든, 거대 야쿠자 조직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시원찮은 인간인 데다가, 돈 굴리는 사업체도 일본에 있는 내가 어떻게 서울에서 선생과 대담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 적 있나?”
“글쎄다. 인력이 부족해서?”
“날고 기는 군인 출신들 보던 양반이, 어디 뒷골목 왈패 같은 놈들이 눈에 차겠나?”
“뭔데 그럼?”
“정보. 나는 특정 정보를 선생에게 제공했다. 그게 내가 각계의 거물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이유지.”
정보라.
저놈이 선생에게 제공할 만한 정보가 있나?
정보는 선생이 미리 볼 수 있을 텐데…….
“무슨 정보?”
“에헤이, 그건 미리 말해 주면 안 되지. 내 중요한 패인데.”
“그래?”
벌떡!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불안불안하던 의자가 부서지며 나뭇조각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혹시 아나 모르겠는데, 박광훈 사장도 사람을 시켜서 나한테 전한 말이 있거든.”
“……뭐?”
“그쪽도 나를 만나고 싶다던데.”
“더 할 말 없으면 가 봐도 되나?”
“잠깐.”
가네무라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역시, 이 새끼들 싸웠네.
조금 레벨 낮은 단어로 표현하긴 했지만, 분명히 가네무라과 박광훈 사이에 모종의 트러블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박광훈과 만나는 걸 꺼리는 거다.
“아니면 셋이 보던가. 나야 시간 아끼고 좋지.”
“잠깐, 잠깐만. 네가 확언만 하면 나도 내가 가진 정보가 뭔지 말해 줄게.”
“됐어. 지금은 별로 안 궁금해.”
“이주혁!”
나는 분노와 경악, 그리고 번뇌가 가득 담긴 눈빛을 마주하며 미소를 지었다.
“너무 걱정하진 마라. 대체 그쪽은 뭔 소리를 지껄이나 한번 들어 보려고 만나는 거니까.”
“…….”
“다음에 만났을 땐 대답이 달라야 할 거야. 가네무라 용수.”
그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옆을 스치며 언뜻 보니, 가네무라는 이를 어찌나 세게 악물었는지 뿌득거리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툭툭.
어깨를 두드려 주고 공장을 나왔다.
“야. 족치는 거 아니었어?”
“조금만 기다려 봐요. 조만간이니까.”
그렇게 가네무라의 따까리들까지 지나쳐 부지 바깥으로 나서자, 뒤에서 악에 받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어렴풋이 들려왔다.
-으아아아-!
씨익.
털어먹을 대로 다 털어먹고, 그렇게 쭉정이만 남았을 때 버려 주마.
***
다음 날, 나는 이른 시간부터 다짜고짜 호정기획 사옥으로 찾아갔다.
“사람 많네.”
호정그룹은 굴지의 대기업이다.
그 계열사인 호정기획의 창 너머엔, 직원으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남녀가 무표정하게 로비를 오가고 있었다.
저벅.
걸음을 옮겨 회전문을 통과해 로비로 들어갔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한 번씩 힐끗 쳐다봤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넥타이도 매지 않은 모습이니 당연히 튈 수밖에 없겠지.
나는 눈앞에 있는 데스크로 다가가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혹시 박광훈 사장님, 지금 자리에 계십니까?”
“네. 계십니다.”
“그럼, 제가 하는 말 좀 전해 주시겠어요?”
직원은 웃으며 응대하면서도 살짝 당황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죄송합니다만, 먼저 신분을 밝혀 주시면 제가 사장님께 연락을 드려 보겠습니다.”
“이주혁이라고 합니다.”
“네.”
“…….”
“…….”
“그냥 그렇게 전해 주시면 될 겁니다.”
직원은 슬슬 난감함이 얼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뭐 어떡해.
SA시큐리티의 이주혁입니다,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리고 박광훈 이 새끼는 만나자고 했으면 미리 준비를 해 놔야지.
“그……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옙.”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데스크에 팔을 올리며 뒤로 기댔다.
그러고 잠시 기다리니, 누군가와 전화로 뭐라 대화하던 여직원이 나를 불렀다.
“저, 이주혁 님?”
“아, 네.”
“사장님께서 사장실로 올라오라고 하십니다.”
“지금 통화 연결된 거예요?”
“네. 맞는데…… 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직원의 손에서 수화기를 낚아채, 거기에 대고 말했다.
“네가 내려와라. 왜 사람을 오라 가라야?”
그와 동시에 정적이 생겨났다.
탁.
수화기를 놓고 고개를 들자,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경악한 직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고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 친하거든요. 하하.”
.
.
.
그렇게 뻔뻔하게 로비에서 죽치고 기다리다 보니, 진짜로 저기 엘리베이터 쪽에서 잘 빼입은 놈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깔끔하게 반만 넘긴 머리에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정장.
거기다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까지.
100m 바깥에서 봐도 잘 나가는 기업인 같은 모양새였다.
놈은 경호원처럼 보이는 남자들을 대동하고 이쪽으로 똑바로 다가왔다.
그에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자, 불곰같이 생긴 경호원이 인상을 찌푸리며 앞을 막아섰다.
“뭐야?”
“사장님께 함부로 접근하지 마라.”
그 말과 함께 나는 놈의 조인트를 까버렸다.
빡!
“끕!”
“이 새끼가 낄 데 안 낄 데 구분 못 하네.”
갑작스레 펼쳐진 상황에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쳐다봤다.
하지만 이내 박광훈이 주변을 눈으로 슥 훑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직원들은 황급히 다시 제 갈 길 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차가운 눈빛으로 지켜보던 박광훈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짓입니까. 조용히 얘기해도 모자랄 상황인데.”
놈은 어쩐지 경호원이 처맞은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끌린 게 더 불만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박광훈.”
나는 박광훈을 노려보며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됐나 본데, 대체 뭘 믿고 그렇게 건방진 짓을 한 거냐?”
“예?”
“내 사람을 협박해서 불러내 놓고, 하는 말이 뭐? 날 만나고 싶다고?”
“그건.”
대놓고 불쾌한 티를 내자, 박광훈은 뭐라 설명하려는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일방적으로 두들겨 팰 타이밍이다.
“그리고, 분명히 내가 만나고 싶으면 네가 찾아오라고 하지 않았나?”
“…… 아직 약속을 잡지도 않았습니다만.”
“그럼 연락해서 약속을 잡든가. 지금 너 때문에 한 사람이 매일 밤 덜덜 떨며 피해를 호소하고 있어. 알고 있냐?”
물론 민수진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잠깐, 이주혁 씨.”
박광훈은 내 큰 목소리에 인상을 구기며 손을 들었다.
“조용한 곳에서 마저 얘기하시죠.”
“내가 왜?”
“……남들이 들어선 안 되는 이야기니까요.”
역시, 예상대로 그놈에 관련된 얘기를 꺼낼 생각인가 보네.
“그래. 그러자고. 대신…….”
스윽.
“얘네들도 떼는 걸로.”
그 말에 놈의 옆에 서 있던 경호원들이 발끈하려 했다.
“그만, 그만. 괜찮습니다.”
“하지만 사장님.”
“둘만 이야기하겠습니다.”
경호원들을 제지한 박광훈이 나를 힐끗 보며 말했다.
“따라오시죠.”
“그러지.”
피식.
옆을 지나치며 비웃어 주자, 경호원들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사실 얘네들도 나 같이 훈련받은 놈들일 거다.
‘모임’에 관해 잘 알던 스가와라가 말하길, 박광훈의 경호원들도 특수부대나 용병 출신의 실력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이놈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띵-
엘리베이터까지는 동행했지만, 경호원들은 결국 사장실 앞에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끼익.
“앉으시죠.”
나는 사장실 중앙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런 내 맞은편에 자리한 박광훈이 운을 뗐다.
“우선, 제 경호원이 저지른 무례하고 불미스러운 행동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겉치레는 집어치우자고.”
“…….”
저런 의도가 뻔한 말을 받아 줄 만큼 시간이 넉넉한 건 아니거든.
“나에 관한 정보는 어떻게 얻은 거지?”
내 물음에 박광훈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사업가’로서의 면모는 모두 내려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뭐, 선생의 사업체들을 알고 있는 이상 어려울 거 없는 일이었습니다.”
“내 뒷조사를 했단 소린가?”
“저급한 단어로 표현하면 그만한 게 없겠네요. 맞습니다.”
하긴, 내 행적을 조사하면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을 거다.
내가 팀원들을 데리고 다니며 조진 곳은 대부분 선생 놈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주철수도 그렇고, 성자가 있던 새사람 교회까지.
그리고 강화도의 항구로 향한 것까지 확인했다면, 당연히 선생의 실종에 내가 관여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이주혁 씨. 대체 선생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대충 알고 있잖아. 안 그래?”
내 말에 박광훈이 여유로운 투로 말했다.
“정말 죽었을 리가 없습니다.”
“이상하게 확신이 담긴 말인데.”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아는데도 사지로 걸어간 꼴이 되니까요. 그러니까 말해 주시죠.”
턱.
테이블에 손을 얹은 박광훈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당신도 미래를 볼 수 있는 겁니까, 아니면…… 선생의 협력자인 겁니까?”
놈은 모종의 추리를 통해 저런 결론을 내린 듯했다.
‘잠깐, 이거…….’
저 말을 듣고 한 가지 계획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것도 아주 거대하고, 위험한 계획이 말이다.
피식.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나는 다리를 꼬며 몸을 뒤로 기댔다.
그리고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글쎄. 네 생각엔 어느 쪽일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