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273
#273화
항상 ‘모임’을 진행하던 호정기획 건물의 최상층.
그곳에서 두 사람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허전해진 공간, 중년의 한 남자가 먼저 입을 뗐다.
“그래서, 박 사장님이 어쩐 일로 나를 부르셨을까.”
모임의 일원이자 한인 야쿠자, 가네무라 아키라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최후까지 남은 둘이었지만, 사실 그들은 서로를 그리 달갑게 생각하진 않았다.
박광훈은 야쿠자인 가네무라를 천박하다고 여겼으며, 그는 박광훈을 고상한 척 위선 떠는 미친 도련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충 짐작은 하고 왔지 않습니까?”
“이주혁 말인가? 안 그래도 만났다고 들었는데.”
“그랬죠.”
박광훈은 정보의 우위에 의한 우월감을 느끼며 말했다.
“뭐, 썩 내키진 않지만…… 저는 협력을 위해 당신을 부른 겁니다.”
“협력이라면?”
“선생은 죽지 않았습니다.”
“……뭐?”
“그가 죽음을 가장한 것도 계획에 있던 일이었다는 소립니다.”
“…….”
잠시 고민하던 가네무라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그럼 이주혁은 뭐지? 내가 잘못 이해한 게 아니라면, 애초부터 짜고 치는 거였단 말인가?”
“선생의 퇴장 또한 계획의 일부였던 겁니다.”
그 말에 가네무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선생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박광훈과는 달리, 그는 선생이 정말 당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이주혁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선생이 살아 있었다니,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박광훈이 자신을 여기 부른 이유는 협력이었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지?”
“따로 말이 있기 전까진, 굳이 나서서 뭔가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뭐야. 그냥 대기하라 이건가?”
“이주혁 씨가 조만간 자리를 만들자고 하더군요.”
“어이, 박 사장님. 하나만 묻지.”
“뭐죠?”
가네무라는 굳은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무슨 생각인지는 대충 알겠는데, 설마 이주혁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가? 박 사장 성격에?”
“…….”
그 물음에 박광훈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게 사실인지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뭐라고?”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린 가네무라가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싫은 성격이구만.”
“이하 동문입니다.”
“느낌이 싸해. 좋지 않다고. 그동안의 정이 있으니 경고하는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박 사장.”
박광훈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도 없는 걱정은 해 줄 필요 없습니다.”
“허, 참. 배배 꼬이셨군. 미천한 나는 이만 사라져 드리겠수다.”
탁.
더 이상 대화를 나눠봤자 손해라고 생각한 가네무라가 자리를 떴다.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광훈이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온 한 남자에 대해 생각했다.
‘재밌네.’
앞으로 일어날 상황에, 박광훈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가네무라의 말마따나, 박광훈은 이주혁이 한 말을 전부 신뢰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머리가 좋다 한들, 그가 한 추측이 전부 맞아떨어지는 일은 쉽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사소한 건 박광훈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주혁이 앞으로 무슨 짓을 벌일지.
그의 관심사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큭.”
운이 좋았다.
선생이든 이주혁이든, 목적에 방해가 된다면 얼마든지 박광훈을 치워 버릴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주혁도 겉으로는 별거 없어 보이지만, 사실 SA시큐리티에는 특수부대 출신의 강한 전력들이 즐비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요청을 받아들였으니, 당분간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드륵-
박광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를 불렀다.
“최 실장님.”
끼익.
“부르셨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 사람들과 제가 동등한 눈높이로 마주 볼 수 있을까요?”
최 실장이라 불린 중년 남자가 잠시 고민했다.
그가 모시는 박광훈은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 브레이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금은 다행히 회사 사장이라는 신분에 맞춰 행동하고 있지만, 더 젊을 때 벌이던 ‘일탈’의 뒤처리로 진땀을 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일단 신뢰를 얻는 게 우선일 것 같습니다.”
“신뢰. 신뢰라……. 그런다고 그 둘이 저한테 모든 정보를 공유해 줄까요? 전 회의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으음…….”
“저는 그 사람들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전부 알고 싶단 말이죠. 하나도 빠짐없이.”
탁. 탁.
책상을 두드리며 고민하던 박광훈이 손을 멈췄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는 듯 최 실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최 실장님.”
“예.”
“이주혁 씨 명의의 투자 회사가 하나 있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그 회사를 호정기획의 계열사로 만드는 건 어떨까요?”
그 말에 최 실장이 살짝 당황했다.
“그쪽에서 불쾌하게 생각하진 않겠습니까?”
“이주혁 씨가 이용할 걸 만들어 주는 거죠.”
박광훈이 의자 뒤로 기대며 말했다.
“궁금하지 않아요? 과연 나를 어떻게 써먹을지?”
***
회의를 파하고, 나는 내 사무실로 돌아왔다.
“야. 주혁아.”
“네.”
그런 나를 혼자 따라온 부장님이 소파에 털썩 앉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건지 모르겠는데, 네 계획이 자발적으로 똥통에 뛰어드는 거잖냐.”
“어감이 좀 그렇긴 해도…… 그게 맞긴 하죠.”
악행을 인생의 벗 삼는 놈들 사이로 들어가는 일이니까.
“씁……. 그럼, 말이야…….”
“뭐길래 이렇게 뜸을 들여요?”
“SA시큐리티는 이제 뒷전으로 물러나는 거냐?”
“뒷전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 물음에 부장님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니 왜, 그렇잖아. 지금부터는 우리 다 데리고 움직이기 힘들잖아. 노출되면 위험하기도 하고.”
“그렇기야 하죠. 그래서 전면으로 나서는 건 저 혼잡니다.”
“뭐?”
“다른 팀원들은 다 물밑에서 움직일 거고요.”
부장님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됐다, 새꺄. 내가 더러운 꼴 보기 싫어서 전역했다지만, 애들까지 이용하는 놈들 조지는 데 빠질 생각은 없다.”
“누가 뺀대요?”
“그러니까, 그 경호대 놈들처럼 은밀하게 움직여라. 뭐 그런 거 아냐. 난 그럴 생각 없다고.”
나는 부장님의 반응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가족도 멀쩡히 있는 사람이, 왜 위험을 굳이 감수하려고 하는 거지?’
부장님은 이런 내 의문을 눈치챘는지 씩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도 한 단체의 장이 된다는데, 내가 옆자리 정도는 맡아 줘야 면이 살지 않겠냐?”
“허, 참. 든든하네요.”
“그리고 나 말고 네 오른팔 할 사람이 어딨어?”
“제가 부장님 오른팔이죠.”
“겸손 떨지 말고.”
대수롭지 않게 넘긴 부장님이 머리 뒤로 깍지를 끼며 말했다.
“뭐가 됐든 간에, 나 더 나이 먹기 전에 끝내라. 30 중반은 진짜 좀 힘들 것 같으니까.”
“그럴 겁니다.”
“쩝. 그런데 어떡하냐. 명색이 경호업첸데, 경호대 그놈들한테 이름 뺏긴 거 아니야? 따라 하면 가오 상하잖아.”
“흠. 그건 그렇네요. 고민해 봐야겠는데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유롭게 기대 있던 부장님이 이쪽으로 고개를 살짝 틀었다.
“후회하진 않냐?”
“후회요?”
“너 돈도 많이 벌어 놨잖냐. 그거 가지고 평생 놀고먹어도 될 텐데, 왜 굳이 이런 싸움에까지 발을 들이는 거야?”
“글쎄요. 정의의 본능이 살아 있는 거겠죠. 국가에 충성했던 그 시절처럼요.”
“그래. 차라리 너는 군인을 계속했어야 돼.”
“그리고, 그놈들 남겨 두면 발 뻗고 잠이나 자겠어요?”
주철수를 처리하고 나서 선생과 엮이게 된 계기가 뭔데.
그놈이 먼저 사람을 보내 날 감시해서 그런 거다.
“발본색원이란 말 아십니까?”
“그, 주윤발 나오는 그거?”
“그거 말고요. 문제를 해결하려면 근본이 되는 원인을 없애야 한단 소립니다.”
“나도 알아. 농담한 거다.”
아닌 것 같은데.
척.
“뭐 어쨌든, 결정 나면 알려 줘라.”
자리에서 일어난 부장님이 어쩐지 급하게 사무실을 떠났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슬쩍 웃었다.
‘그래도 든든하네.’
부장님 같은 사람이 내 옆에 떡하니 서 있으면, 보통 사람은 말 걸기도 쉽지 않을 거다.
스윽.
나는 사무실 한구석에 조용히 찌그러져 있던 오주찬을 돌아보며 손짓했다.
“갖고 와.”
“아, 예.”
오주찬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나한테 자기 핸드폰을 넘겼다.
영문도 모르고 내 사무실에 갇혀 있었으니 저럴 만하지.
중간에 도망가지 않을까 살짝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회의가 끝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더라고.
“전화 걸어.”
끄덕.
내 말에 오주찬이 불규칙하게 숫자 키패드를 눌렀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누르자 어디론가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하던 건 마저 해야지.’
DS컴퍼니.
첫 제물은 이놈들이 될 거다.
***
DS컴퍼니의 이사, 제이콥 스태포드.
일명 J는 눈앞의 남자를 곱지 않은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 H.”
그 말을 들은 H, 헨리 가필드 이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일이냐니. 오랜 친우를 찾아오는 데 이유가 꼭 필요한가?”
마치 연극배우 같은 과장된 제스처에, 제이콥은 눈살을 찌푸렸다.
“몇 달 동안 실종 상태던 네놈이 왜, 하필 내 앞에 나타났냐는 소리다. 당연히 상부엔 보고도 하지 않았겠지?”
“그야 뭐 천천히 하면 되는 거고.”
“여전히 충동적이군……. 괜히 불똥 튀게 하지 말고 돌아가는 게 어떤가?”
“내가 괜히 왔겠어? 할 말이 있으니 온 거지.”
“그럼, 용건부터 말하지 그래.”
“DS컴퍼니 대표가 올해로 60이었나?”
꿈틀.
제이콥은 미간을 좁혔다.
“그게 중요한가?”
“끝까지 들으라고. 친구. 지금부터가 중요한 이야기니까.”
“……혹시 추후에 문제가 될 만한 이야기라면 듣고 싶지 않은데.”
“아, 제이콥. 넌 너무 겁이 많아. 뭐, 신중함이 리더의 미덕이긴 하지만.”
딴소리를 하며 실실 웃던 H가 본론을 꺼냈다.
“어쨌든, 60이면 슬슬 은퇴해야 할 나이라는 소리를 하고 싶었어.”
“…….”
철컥.
어느새 품 안에서 권총을 꺼낸 제이콥이 H의 이마를 겨누고 있었다.
“내가 그딴 소리 할 줄 알았다. 당장 꺼져.”
“제이콥……. 멍청한 짓은 하지 말자고.”
그 와중에도 H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양손을 들며 말했다.
“너도 알잖아. DS는 썩었어.”
“썩은 부분은 도려내야 한다, 그런 뻔한 말이냐? 못 들은 걸로 하지. 괜히 엮이게 하지 말고, 죽을 거면 혼자 죽어라.”
“대세는 이미 기울었어. CIO랑 COO까지 넘어왔다. 나까지 임원의 3분의 1이 등을 돌렸다고.”
“……대표의 수족 같은 그가 네 미친 계획에 동의했단 건가? 허풍이 지나치군.”
“네가 믿든 말든 현실이 그래. 친구.”
“…….”
제이콥은 혼란에 빠졌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찰칵.
물씬 드는 불안감에 제이콥은 노리쇠를 당겼다.
H는 그런 그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너무 걱정하진 마. 내가 설마 너까지 손대게 놔두겠어?”
“헨리……!”
“조용한 정권 교체가 될 거야. 제이콥.”
그 말과 함께 H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꾸욱.
하지만 제이콥은 방아쇠를 쉽게 당길 수 없었다.
그의 최종 목표는 DS컴퍼니를 손에 넣어 ‘서클’의 일석을 차지하는 것.
그걸 위해선 지금의 체제를 유지하는 게 나을지, 뒤집어 버리는 게 나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럼, 이윤종 박사와의 거래는 어떻게 되는 거지? H 쪽은 알고 있나?’
고민에 고민을 이어 가던 제이콥은 결국 팔을 떨어뜨렸다.
H는 그걸 보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넌 똑똑하니까 처신 잘할 거라 믿는다.”
“……가라.”
“좋아. 꺼져 주지. 다음에 또 보자고.”
손을 흔들어 준 H가 자리를 떠났다.
“…….”
제이콥은 고뇌에 가득 찬 터라 뭐라 대답할 겨를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상념을 이어 나가던 J의 개인 핸드폰에 통화가 걸려 왔다.
원래는 한국지부의 오주찬에게 지시를 내릴 때 사용하던 것으로, 이주혁에게 연락이 온 이후론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반란 모의를 전해 들은 탓에 경황이 없긴 했지만, 이주혁이 무슨 말을 할지 모르니 전화는 반드시 받아야 했다.
꾹.
“……여보세요?”
-어, 뭐 해?
마치 친구의 안부를 묻는 듯한 말투였다.
J는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뭐지?”
-좋은 제안 하나 하려고.
그리 말한 이주혁이 이죽거리며 한 마디를 얹었다.
이어지는 말에 J의 눈이 커졌다.
-네 부하 죽인 놈들. 어딨는지 알려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