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312
#312화
팍!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내 무릎이 상대의 손바닥에 막혔다.
그 충격에 뒤로 물러나던 놈이 손바닥을 뻗어 내 시야를 가렸다.
살짝 고개를 꺾어 시야를 확보함과 동시에, 눈앞으로 날아오는 발차기가 보였다.
그를 인지하자마자 한쪽 팔로 가드를 올렸다.
터엉-!
골이 뒤흔들리는 감각이 한 차례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되로 받으면 말로 돌려줘야 하는 법.
내 한쪽 다리는 진작 놈의 디딤발을 향해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퍽!
놈의 자세가 무너졌다.
그러나 놈은 의도했다는 듯 두 손으로 바닥을 짚더니, 달려드는 나를 향해 다리를 뻗었다.
그에 내가 손바닥을 휘둘러 다리를 쳐내자, 놈은 곧바로 몸을 튕기듯 일어나 손날을 내리쳤다.
다시 한번 손바닥을 내리치는 놈의 손목에 대고 방향을 틀었다.
탁!
순간 중심을 잃은 놈이 눈을 크게 떴다.
‘늦었어.’
드러난 옆구리로 니킥을 먹이려던 찰나,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놈이 관성을 이용해 몸을 회전하더니, 반대쪽 팔꿈치로 내 무릎의 옆을 때린 것이다.
결국 무릎은 목표를 타격하지 못했고, 내 자세까지 틀어졌다.
옆으로 반쯤 돌아간 나를 향해 주먹이 날아왔다.
후욱!
나는 머리카락을 스치는 주먹을 느끼고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놈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한지 곧바로 달려들진 않았다.
막 몰아치는 게 아닌, 나처럼 수 싸움을 통해 승리를 꾀하는 타입은 듯 보였다.
‘이 새끼, 재밌는 놈이네.’
처음에는 단순히 러시아 킬러 하나가 고상미에게 원한을 가지고 한국으로 넘어온 줄 알았다.
그런데 범인은 한국인인 데다가, 상당한 실력자이기까지 했다.
용병이나 킬러들은 보통 총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어 근접전에 크게 비중을 두진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놈은 근접전 대응과 임기응변이 뛰어났다.
거기다 허리춤에 있는 권총을 섣불리 꺼내 들지 않는 걸 보아 신중한 성격인 것 같았다.
물론 총을 뽑지 못하게 내가 곧장 대처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런 놈이 고상미를 보고 살기를 뿜어냈다는 게 의문이었다.
‘무슨 사연인지 들어 봐야겠어.’
대체 둘이 무슨 사이였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물론 질문은 생포 후에 이루어지겠지만 말이지.
잠시 숨을 고른 나는 다시 놈에게 달려들었다.
사연이고 나발이고, 일단 대표로서 직원이 당한 이상 복수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촤락!
삼단봉을 꺼내 펼치자, 놈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현명하다고 할 수 있는 판단이었다.
비슷한 실력이라고 했을 때, 리치 차이는 승패가 지대한 영향을 미치니까.
탓!
뒤돌아 도망치는 놈을 쫓아가며 생각했다.
놈이 총을 꺼내 날 쏘진 않을 거다.
나한테 물을 게 있다고 말했을뿐더러, 서울 한복판에서 총을 쏘는 미친 짓을 하고도 무사히 돌아다닐 순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리고 설령 쏜다 하더라도, 이미 겉옷 안에 방탄복을 입고 온 상태다.
무작정 겁먹기보단, 나는 내 판단을 믿고 놈을 쫓았다.
타다닥!
그런데 놈의 속도가 여간 빠른 게 아니었다.
장룡이라고 했었나? 그 삼합회의 노숙자 놈보다 근소하게 빠를 정도였다.
그에 나도 이를 악물며 다리를 더 빨리 놀리려던 순간, 달리던 놈이 갑자기 옆으로 손을 뻗었다.
덥석!
골목길에 놓인 쓰레기통의 뚜껑을 집어 든 놈이, 그대로 나를 향해 그 철 덩어리를 집어 던졌다.
‘미친!’
후우웅-!
섬뜩한 파공성과 함께, 쓰레기통의 뚜껑이 몸을 숙인 내 머리 위로 지나갔다.
깡! 까강!
느낌이 묵직한 게, 정통으로 맞았으면 부상으론 끝나지 않았을 거다.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리자, 이번엔 놈이 발로 찬 쓰레기통이 내용물을 쏟으며 날아오고 있었다.
“크윽!”
옆으로 몸을 날리니, 쓰레기통이 안에 들어 있던 것들을 뱉어 내며 땅을 나뒹굴었다.
내가 쫓던 놈은 어느새 한참 멀어진 채였다.
“하.”
나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속도전으로는 내가 따라잡지 못했겠지만, 막상 눈앞에서 놓치니 입맛이 썼다.
그래도 얻은 게 없진 않았다.
놈의 실력을 체감했으며, 무엇보다 ‘유현’이라는 이름을 확보했다.
‘뜬금없는 변수가 생겼군.’
처음에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우리 직원이 실질적인 해를 당한 이상 좌시하고 있을 순 없었다.
유현이란 놈과는 무슨 관계고, 어떤 일이 있었길래 한국까지 와서 이 지랄을 떠는 건지 알아야 했다.
‘최대한 빨리 고상미를 만나 봐야겠어.’
이 변수가 호재가 될지, 악재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 *
“어르신.”
휠체어를 밀고 가던 중년이 노인에게 물었다.
“주제넘은 말이지만…… 혹시 안에서 무슨 대화를 나누신 겁니까?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그래?”
휠체어에 앉은 노인, 곽환성이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리고 이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뭐, 내 신세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어르신…….”
“어쩌겠나. 내가 선택한 일인데.”
모든 걸 잃은 그 당시의 그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지만, 이런 상황이 될 걸 알고도 선택한 것 또한 자신이다.
곽환성은 이제 와서 후회할 생각은 없었다.
“자네, 이주혁 기억하지?”
“……주철수를 잡을 때 썼던 젊은이 말입니까?”
남자는 이주혁을 떠올렸다.
멀끔하게 생겼지만, 그 안에는 칼을 품고 있는 청년이었다.
“이주혁이 부모를 조사해 보게.”
“부모를요?”
“그래.”
“알겠습니다.”
곽환성은 여러 복잡한 감정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에게 작업당한 후로,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아끼던 동생들, 운영하던 가게, 그동안 쌓아 왔던 명성.
한순간에 환성파는 공중분해 됐고, 동생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져 각자의 조직을 만들었다.
그걸 보면서도 곽환성은 병신 행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손을 내민 사람이 바로 조병철이었다.
“……바로 차로 가지.”
“예.”
끼릭-
곽환성은 휠체어가 덜컹거리는 걸 느끼며 눈을 감았다.
* * *
나는 곧장 고상미에게 연락해 다시 회사로 불러들였다.
“왔습니까.”
“어어.”
고상미가 내 사무실로 쭈뼛쭈뼛 들어왔다.
내가 대충 상황설명을 한 탓인지, 미안함과 죄책감이 섞인 표정이었다.
“서 있지 말고 앉아요.”
“으응.”
커피를 두 잔 타서 고상미의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였다.
“애들은 괜찮습니다. 덩치가 제일 많이 얻어맞긴 했는데, 워낙 몸이 튼튼한 놈이라.”
“……다행이네.”
“그래서, 뭡니까?”
화두를 던지니 고상미의 얼굴이 싹 굳었다.
“과거를 남한테 말하는 걸 꺼리는 건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놈에 관해선 이야기해 주셔야 돼요.”
“이 와중에도 비밀로 하면 내가 미친년이지. 당연히 말할 거야.”
입술에 침을 바른 고상미가 물었다.
“분명히 ‘유현’이라고 했지?”
“예. 그놈이 본인인지는 몰라도, 유현이 찾아왔다고 전해 달라 했습니다.”
“하…….”
벅벅.
고상미는 머리를 거칠게 긁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유현이 맞다면…… 좋은 의도로 날 찾아온 건 아닐 것 같아.”
“딱 봐도 그래 보이던데요. 애초에 살기를 뿜었다면서요.”
“사실, 러시아에서 부모님을 잃은 녀석을 내가 거뒀어.”
“왜죠?”
“동병상련이었으니까. 우리도 부모님이 살해당했고, 걔도 마찬가지였거든.”
그런 놈이 왜 고상미를 적대하는 걸까.
“유현이란 놈 사정은 알고 계십니까?”
“사실 걔가 거의 10대 초반일 때 일어난 일이라, 본인은 자세한 사정까진 모르더라고.”
“고상미 씨는 알아요?”
“어쩌다 보니 알게 됐지.”
조리 있게 설명하기가 힘든지 고상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예전에 내가 글라자에 잠시 몸을 담았을 때였어.”
나도 고상미가 러시아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창 돈 벌려고 의뢰받고 움직이는데, 웬 꼬맹이가 골골대고 있더라고. 그 추운 겨울에. 그래서 도와줬지. 집으로 데려가서 밥도 먹이고, 부모님이 그렇게 됐다는 말을 듣고 한동안은 내가 살던 집에서 지내라고 했어.”
“고세운이 싫어했을 것 같은데요.”
“엄청나게 싫어했지. 그나마 방이 두 개라 다행일 정도로.”
하긴, 그놈 성격에 당연히 그랬을 거다.
“뭐, 걔도 나중엔 혼자 먹고살아야 하니까 싸우는 법을 가르쳤어. 내가 가진 기술이라고 해 봤자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어쩐지, 움직임이 조금 닮아 있더군요.”
지금 되짚어 보니 그랬다.
유현이란 놈의 유연한 몸놀림이나 전투 방식이 고상미와 유사한 점이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는 글라자 내부 사정을 좀 더 파고들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갔지. 그리고 두 가지 진실을 알게 됐어.”
“뭘 말입니까.”
“현이의 아버지는 글라자 소속 킬러였고, 어머니는 그 정보원이었다.”
“…….”
“또, 두 사람은 퇴직한 후 글라자 소속 킬러들에게 살해당했다.”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일을 그만둔 사람을 찾아가 입막음을 한다.
그리 드문 케이스는 아니었다.
“그때의 난 눈이 돌아갔지. 내가 몸담던 조직이 동생처럼 키우던 제자의 부모님을 죽인 원수였으니까.”
“그것 때문에 깽판을 치신 겁니까? 그래서 러시아에 남을 수 없어 해외로 도피한 거고요?”
“……맞아. 사건의 관련자들을 꽤 많이 죽였거든.”
글라자 소속 놈들이 고상미를 적대할 거라는 말이 이거였구만.
“그러다가 결국 위험에 빠졌고, 나는 겨우 동생만 데리고 탈출할 수 있었지만…… 잠시 볼일이 있다며 나갔던 현이는 챙기지 못했어.”
“설마…….”
“그 뒤로는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놈이 왜 고상미를 죽이고 싶어 하는진 이해가 간다.
자기만 두고 떠나 버린 고상미가 원망스러웠을 테니까.
게다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몰라도, 절대 평탄하진 않았을 거다.
솔직히 그놈의 감정이 완전히 이해되는 건 아니긴 한데, 그래도 놈은 일단 대화를 원하는 눈치였다.
그만큼 복합적인 마음이라는 뜻이겠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둘이 자리를 주선해 준다 해도 말로 끝날 건 아닌 듯한데.”
“하. 나도 모르겠다. 이제 와서 사과하는 것도 늦었고, 그 녀석 부모님에 대한 걸 알려 줄 용기도 없고…….”
그래. 적어도 10년은 흐른 이상 감정의 골을 단숨에 메울 순 없다.
다만 잘하면 유현이란 놈을 유리하게 이용해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섣불리 단둘이서 만나는 건 지양하는 게 좋겠습니다.”
“어째서?”
“그놈, 허리춤에 총이 있었습니다.”
“아. 알았어.”
곧장 고개를 주억거리는 고상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유현을 살려서 이용하려면 일말의 가능성에 기대야 한다.
그렇다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놈을 죽인다면, 고상미는 남은 인생을 지우지 못하는 죄책감과 함께 살아갈지도 모른다.
거기다 가장 큰 문제는, 놈이 고상미의 말을 믿을지였다.
“쯧.”
어지간하면 유현 그놈을 써먹는 게 맞는데…… 지금으로선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단 말이지.
탁. 탁.
잠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다가 고개를 들고 고상미를 쳐다봤다.
고상미의 표정은 죄책감과 미안함, 걱정와 안도가 섞여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고상미 씨.”
“으응?”
“글라자의 내부 정보를 안다고 하셨죠.”
“어. 물론 지금은 어느 정도 달라졌겠지만, 대충 기억은 나.”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나는 옆에 놓여 있던 종이를 들어 펜과 함께 고상미에게 건넸다.
스윽.
“여기에 기억나는 대로 적어 주십쇼.”
“응.”
머릿속으로 지금쯤 글라자에 접촉하고 있을 한 사람이 떠올랐다.
정신 나간 계획을 꾸미는 배후자이자, 나와 같이 미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일명 ‘예언자’.
민지훈, 그놈을 이용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