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316
#316화
레이븐이 육진모의 전신을 훑어보며 근육을 긴장시켰다.
패기롭게 도발하긴 했지만, 눈앞의 남자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븐, 유현은 강자와의 전투를 통해 자신의 실력을 점검할 요량이었다.
물론 상대가 손속에 자비를 둘 생각이 없다는 건 알지 못했다.
“아,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군.”
일촉즉발의 분위기로 흘러가던 그때,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레이븐. 진정하게. 유크, 자네도.”
“유크?”
“아, 발음이 어려워서 말이야. 자네만 괜찮다면 이렇게 불러도 되겠나?”
육진모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편할 대로.”
찌르면 터질 것만 같던 공기가 살짝 누그러졌다.
미하일은 그 틈을 타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레이븐. 이쪽은 이번에 새로 합류하게 된 유크일세. 경호대의 대장이지.”
“……경호대?”
레이븐이 호기심을 가진 걸 확인한 미하일이 더욱 진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그래. 그 경호대.”
그 말에 레이븐은 내심 움찔했다.
‘그럼 설마…….’
그는 몇 년 전, 자극을 위해 미하일에게 가장 강한 무력 집단에 관해 물어볼 적이 있었다.
가장 나이가 많고 서클의 회의에서 발언할 만한 위치의 사람이라 잘 알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최강이라. 기준을 어떻게 잡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경호대가 아닐까 싶군.
-경호대?
-정예 군인 출신으로 구성된 집단이지. 완전 무장 후에 맞붙으면 적수가 없지 않을 걸세.
레이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바로 그 경호대의 대장이란 말인가.
호승심과 자존심이 강한 레이븐이지만, 그렇다고 판단 능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동안 멋대로 행동한 건 ‘내 알 바 아니다’라는 판단을 내린 탓이었으니까.
“그렇다면야.”
레이븐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곤 긴장하고 있던 이들이 깜짝 놀랐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분위기였는데, 갑자기 레이븐이 숙이고 들어간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한 설득이 되겠군. 조사는 얼마나 걸리지?”
“아……. 정확히는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그래도 중요한 일이 있으신 것 같으니 최대한 빠르게 진행해 볼게요.”
“알았다.”
물론 레이븐도 자존심을 굽힌 것은 아니었다.
얼마 뒤에 고상미나 이주혁과 싸울 수도 있기에, 괜한 기 싸움으로 몸을 축낼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저쪽은 경호대라는 조직의 수장이라는 명분까지 있다.
“자.”
마리아는 레이븐의 심경 변화를 눈치채고 서둘러 회의를 마쳤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알아내는 게 있으면 연락드릴게요. 레이븐은 잠시 저랑 같이 가고요.”
마리아와 레이븐이 급하게 회의장을 나서고, 알렉산더도 중절모를 눌러쓰며 몸을 일으켰다.
“나도 슬슬 가 보지. 아, 앞으로 잘 부탁한다. 캡틴 유크. 알렉산더다.”
“그래.”
알렉산더가 떠난 뒤, 육진모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는 항상 이렇게 흐지부지 끝나는 편인가?”
“뭐,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라서 말이야. 다들 마음에 급할 걸세.”
“흠. 그런가.”
고개를 끄덕인 육진모가 걸음을 옮겼다.
“그럼 나도 이만.”
“다시 연락하겠네.”
네 사람이 떠나자, 회의장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미하일은 자리를 뜨지 않는 니콜라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할 말이라도 있나? 영감.”
그 말에 미하일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할 말이라…….”
“또 의미심장하게 분위기를 잡는군.”
“가만히 있게나.”
의자에서 일어나려던 니콜라이가 멈칫했다.
“뭐?”
“니콜라이.”
니콜라이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리다 미하일의 차가운 눈빛을 보고 멈칫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란 뜻일세.”
“…….”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 니콜라이가 턱을 좌우로 움직였다.
“글쎄. 쓸데없는 짓이라. 뭘 말하고 싶은지 모르겠는데. 영감.”
“흠.”
텅!
니콜라이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상체를 가까이했다.
미하일의 뒤에 있던 레프가 나서려 했지만, 그의 손짓에 가로막혔다.
미하일은 니콜라이의 불타는 듯한 눈빛으로 정면으로 마주했다.
“생각해 봐. 영감. 지금 이 꼴로 우리가 얼마나 버틸 것 같나?”
“3년 정도일까.”
실제로 글라자의 내부 상황은 지속해서 악화되고 있었다.
재정적으로 난항을 겪고 있는 글라자에서 이탈해 마피아가 된 조직원도 있었고, 다른 나라로 뜨거나 은퇴한 이들도 꽤 많았다.
세대가 교체되면서 글라자는 사분오열되어 경쟁했다.
그 와중 무력 충돌도 일어났을뿐더러, 간신히 봉합될 무렵 마녀에 의해 한 파벌이 무너졌다.
그러한 과정에서 많은 실력자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거기에 자금 문제까지 설상가상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구심점이 되어 줄 리더가 명확히 있는 것도 아닌 글라자로선, 길어 봤자 몇 년을 유지하는 게 한계라는 생각이었다.
“나도 동의해. 마녀에게 그 양반 모가지가 따인 후로 글라자는 쭉 내리막이었지. 당신이 주도한 그 일 때문에 말이야.”
“모두 동의한 걸로 기억하네만.”
“하.”
니콜라이는 코웃음을 치곤 몸을 돌렸다.
“어쨌든, 간섭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영감.”
그리고 문을 박차고 회의장을 떠났다.
미하일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담배를 꺼냈다.
“역시…… 시야가 좁은가. 레프.”
“예.”
파삭.
불을 붙일까 말까 고민하던 미하일은, 이내 담배를 손으로 구기며 말했다.
“그자에게 연락해.”
* * *
“호오.”
내가 민지훈에게 요청한 글라자의 정보가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거기서 뭔가 작업을 치고 있는 모양인데, 꽤 잘 풀리고 있나 보다.
탁탁.
서류를 정리하고 한번 읽어봤다.
먼저 미하일.
과거 KGB 국장 출신으로, 조직이 해체된 후 갈 곳 없는 요원들을 모아 마피아 형태의 조직을 만든 인물이다.
그를 포함해 여러 조직이 합병되며 만들어진 게 글라자니, 사실상 창립 멤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니콜라이. 이놈은 특수부대 부사관 출신이다.
알렉산더라는 놈은 지역구를 먹고 있던 마피아였고, 마리아는 별 특이사항은 없었다.
“흠.”
이놈들이 글라자의 수뇌부란 말이지?
드륵-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보를 얻었다고 쳐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유현 그놈은 어차피 독고다이로 온 놈이고, 얘네들이 굳이 이 일에 관여할 것 같지도 않았다.
먼저 건드리지 않는 이상 이것들이랑 싸우는 건 불필요한 행위란 뜻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게 낫다.
‘그놈도 러시아로 복귀했으니까.’
민지훈이 덧붙이길, 유현도 수뇌부 회의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 말인즉슨, 한국에서 염병하던 놈은 지금 러시아에 있는 거다.
게다가 무슨 문제가 생겨서 당분간 체류할 수 있다더라고.
‘이 틈에 해치울 거 빨리 해치워야지.’
나는 핸드폰을 열어 어제 스가와라에게 온 문자를 확인했다.
말은 길었는데, 요약하자면 일전에 얘기했던 대로 자기네 대장이 날 만나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었다.
솔직히 급하면 네가 오라는 식으로 얘기하고 싶지만, 그래도 일본 야쿠자계를 삼분하는 조직의 수장이다.
세력, 유명세 모두 강남파를 웃도는 수준이니, 다른 놈들처럼 쉽게 봐선 안 된다.
주철수 때는 미래를 알고 고춧가루를 팍팍 뿌릴 수 있었어도, 그쪽은 이야기가 다르니까.
“결국 일본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말인데…….”
비행기 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해외라니, 여간 피곤한 게 아니다.
전생에선 비행기 탈 일도 많이 없었는데 말이지.
스가와라에게 연락을 하려다 한 가지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유나 씨가 일본 여행을 가고 싶댔지.’
마음 같아선 편하게 여행 가는 김에 잠깐 일만 처리하고 마저 즐기고 싶지만…….
중간에 자리를 비우는 건 데이트의 예의가 아닐뿐더러, 야쿠자 대장과의 대화에서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지도 확실하지 않다.
어쩌면 유나 씨가 반나절 이상을 타지에서 혼자 보내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단 소리지.
그리고 유나 씨 정도의 미모면 더더욱 옆에 딱 붙어서 지켜봐야 한다.
분명 집적대는 놈이 있을 테니 말이다.
“하아.”
어쨌든 유나 씨를 데려가는 건 불가능하니, 다음에 단둘이 따로 가는 걸로.
이왕 가는 김에 괜찮은 식당이나 관광지나 좀 알아볼까.
미리 데이트 코스도 짤 겸.
‘나도 새삼 성장했군.’
데이트를 바쁘다며 거절하고, 와중에 약쟁이 잡으러 가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나는 옷을 챙겨 입고 스가와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신호음이 울리고, 10초쯤 지날 무렵 통화가 연결됐다.
-아, 자네군.
“조만간 갈까 하는데.”
-잘 생각했네. 언제 갈 생각이지?
“최대한 빨리.”
-으음. 회장님도 일정이 있으니 조율을 해 봐야겠군.
“좋아. 결론 나면 바로 연락해. 최대한 빨리다.”
뚝.
전화를 끊은 뒤 사무실을 나섰다.
일본으로 넘어가기 전 회의를 한번 해야겠지.
마침 급하게 복도를 뛰어가는 난쟁이가 눈에 들어왔다.
“난쟁아!”
“어, 행님!”
“어디 가냐?”
“재서이 햄이 은행 좀 갔다 오라 캐서예. 와예?”
“볼일 보고, 애들 좀 회의실로 불러라. 출장 잡혔다.”
“알겠십니더!”
내 말에 난쟁이가 우렁차게 대답하곤 마저 달려갔다.
요새는 고상미한테 두들겨 맞으면서 배운다던데, 그래서 그런가, 군기가 바짝 들어 있네.
안 그래도 유현 그놈한테 당한 이후로 애들이 독이 바짝 올랐다더라고.
‘이번엔 누굴 데려가야 하나.’
고상미는 혹시 모르니 서울에 남겨 두는 게 좋고, 부장님도 유나 씨 옆을 지켜야 한다.
그럼 남은 건 팀원들과 마종석, 춘식이 정도일까.
‘그 정도면 충분하겠네.’
이래 봬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강자들이다.
그리고 뒤통수가 좀 허하긴 하지만, 서울에 남을 인원이 어디 보통 사람이야?
피식.
나는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일본행은 또 처음이구만.”
좋아. 가 보자고.
* * *
어두컴컴한 공간, 모니터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만이 방을 어렴풋이 밝히고 있었다.
그곳에 앉은 한 남자가 모니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화면 안에선 백발이 희끗희끗한 노인이 입을 열고 있었다.
-……그렇게 됐네.
그 말에 침묵하고 있던 남자가 안타깝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군. 뜻이 비슷하다고 들었소만.”
-가려는 길은 같으나, 생각은 달랐던 거 아니겠나.
글라자의 수뇌부이자, 전 KGB 국장.
모니터 속의 미하일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뭐, 사람이 많다고 잘 되는 것도 아니니. 그리고 그 친구는 다른 일을 꾸미고 있더군.
“우리에게 영향을 줄 가능성은?”
-글쎄. 확답은 못 하겠네. 워낙 독선적인 친구라.
“좋은 소식은 아닌 듯싶은데, 다른 대안은 있는 거요?”
남자의 물음에 미하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 있는 녀석이 있네. 우리 중에서도 상위 수준이지.
“오호.”
-대신 통제는 힘들 수 있네. 성격이 조금 튀는 구석이 있기도 하고, 그 녀석의 상황을 이용해서 써먹을 작정이라서 말이야.
“확실한 방법이오?”
-확실하지. 이성을 잃고 날뛰지 않으면 다행일 정돌세.
미하일은 레이븐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자네의 적이, 부모님의 원수가 될 예정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