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318
#318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그곳에 있는 바에서 한 남자가 혼자서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은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주점이 아닌, 다른 이들이 드나들 수 없는 룸을 잡았다.
쪼르르.
글라스에 투명한 보드카가 담겼지만, 독한 알코올을 다스려 줄 얼음은 없었다.
쭈욱-
“크으…….”
남자의 정리되지 않은 수염을 따라 한 줄기 보드카가 흘러내렸다.
목구멍이 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육포를 한 점 입에 넣고 씹었다.
스윽.
소매로 입을 닦은 남자, 라쿤이 알코올 향 가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후.”
글라자 소속의 정보원, 라쿤.
그의 또 다른 신분은 김덕배. 국정원의 첩보요원이었다.
예전부터 러시아 마피아들의 동향을 확인하기 위해 잠입 임무를 맡고 있었지만, 몇 년 전 상부에서 킬러 집단에 들어가 정보를 빼내라는 오더가 내려왔다.
그래서 그는 글라자에 녹아들었다.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고, 적당히 친분을 다지며 자신이 입지를 다졌다.
하지만 김덕배의 정신은 나날이 지쳐 갔다.
꿀꺽.
그 탓에 이렇게 술과 담배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이다.
탁.
연거푸 독주를 들이켠 라쿤, 아니. 김덕배는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얼마 전 글라자에 새롭게 합류한 파벌에 관해 보고하자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사항이었다.
그들에게 접근한 뒤, 세력 구도와 관련 정보를 알아내라.
“염병. X발…….”
김덕배는 종이를 구겨서 보드카에 푹 적셨다.
그리고 다시 꺼내 우적우적 씹었다.
‘개새끼들…….’
접근해서 정보를 알아내?
킬러 놈들과 친해지는 게 보통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애초에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놈들이 아닐뿐더러, 수틀리면 총부터 들이대는 정신병자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레이븐과 친해진 것도 동향 출신이라 말이라도 붙일 수 있기에 가능했던 거지, 원래 같으면 대화도 못 걸었을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땐 완전히 미친놈 수준이었으니까.
‘제발 그것들은 정상이었으면 좋겠네.’
안 그래도 머리가 아픈 상황이었다.
얼마 전 레이븐이 친 사고.
그것 때문에 평소 레이븐과 그나마 가깝게 지낸다는 이유로 글라자 놈들이 자꾸 전말을 물어본다.
들킬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확실한 뒷배가 책임져 준다고 했을뿐더러, 다섯 다리 이상을 거쳐서 의뢰했으니 추적은 어지간해선 불가능할 것이다.
그보단 레이븐과 고상미의 상황이 더 궁금했다.
‘무사히 돌아온 걸 보니 결판은 안 난 것 같은데…… 만나긴 한 건가?’
고상미가 한국, SA시큐리티에 있다는 걸 알려 준 장본인이 바로 김덕배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김덕배는 이미 고상미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던 상태였고, 레이븐이 그녀에게 가진 원한도 대강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한국에 있다고 전해 준 것이다.
그럼 적어도 위험분자 둘 중 하나는 제거되지 않을까 생각한 상부의 명령 때문이었다.
찰칵.
김덕배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새롭게 합류한 이들에 관해 알아볼 시간이었다.
* * *
한편, 그 시각.
레이븐, 유현은 마리아와 헤어진 뒤 주점으로 향했다.
-알겠어요. 들을 건 다 들을 것 같으니, 일단은 또 사라지지 마시고 여기 계세요.
-남아 있으라고.
-네. 당신이 한 짓으로 어떤 상황이 됐는지는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해요.
한동안 이곳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불편하긴 했지만, 자신의 행동으로 곤란한 일이 생겼기에 우선은 협조하기로 했다.
저벅.
유현은 라쿤이 자주 가던 주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만나 이것저것 질문할 생각이었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고상미에 관한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도 물어보지 못했다.
끼익-
주점의 문을 열고 들어간 유현은 늘 그가 있는 자리를 쳐다봤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라쿤은 보이지 않았다.
의아한 기색을 느낀 건지, 가게 주인이 레이븐에게 말했다.
“그 친구 찾는 거지? 오늘은 안 왔어.”
“…….”
가끔 일이 있거나 할 땐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기껏 왔는데 찾는 사람이 없다니, 헛수고를 한 기분에 유현은 뒤돌아 가게를 나왔다.
그때, 도로변에 서 있던 차에서 클락션이 울렸다.
빵!
그리로 시선을 돌리자, 창문이 지잉 내려가며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븐.”
“미하일?”
유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로 다가갔다.
“설마 날 따라온 건가?”
“오해는 말게. 라쿤, 그 친구를 만나러 온 거니까.”
“오늘은 없다.”
“아쉽군 그래.”
대충 대답한 유현이 다시 몸을 돌리려는데, 미하일이 그를 붙잡았다.
“아, 레이븐. 자네에게도 용건이 있네.”
“뭐지?”
“서서 할 이야기는 아닌 듯싶은데, 조용한 곳으로 가는 게 어떤가.”
“어지간하면 그냥 얘기해.”
“자네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일세.”
그 말에 유현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정말이야?”
끄덕.
유현은 가슴이 울렁대는 걸 느끼며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들어가.”
“허. 그래.”
미하일을 안쪽으로 밀어 넣은 유현이 정색하며 말했다.
“만약 허튼소리라면…….”
“그럴 리가 있나. 애초에 자네 요청을 받아들인 게 난데.”
과거, 고상미가 사라진 후의 유현은 다시 떠돌이 생활을 이어 나갔다.
그때 미하일은 유현의 재능을 발견했다.
그리고 부모를 살해한 범인을 찾는 걸 돕는다는 조건으로 글라자로 스카우트했다.
유현을 킬러의 길로 들어서게 한 장본인이 바로 미하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유현도 큰 경계 없이 차에 오른 것이다.
탁.
물론 유현은 언제라도 칼을 뽑을 수 있게 준비하고 있었다.
이 세상이 정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동안 뼈저리게 느껴 왔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가지.”
“예.”
부웅-
차가 출발하고, 유현은 넘실대려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미하일이 별것도 아닌 일로 자신을 부르진 않았을 터.
유현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진실을 알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
.
.
“마실 건 뭘로 할 건가?”
“모르스(Морс).”
“호오. 단 걸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어릴 때 자주 먹던 거라.”
유현은 부모님이 산딸기로 만들어 주던 음료를 떠올리며 조금 추억에 잠겼다.
“난 늘 마시던 걸로 한 잔 부탁하네.”
“예.”
주문을 받은 직원이 룸을 나섰다.
그때, 열린 문틈 사이로 어딘가 눈에 익은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음?’
하지만 워낙 순식간에 지나갔을뿐더러, 문이 바로 닫힌 탓에 누군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지금 중요한 건 아니었기에 유현은 이내 신경을 껐다.
그리고 미하일을 향해 물었다.
“뭘 알아냈다는 거지?”
“이런 걸로 장난칠 생각은 없으니 결론부터 얘기해 주겠네.”
미하일은 입술에 침을 바르며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그 일을 사주한 자는 삼합회 소속이었네.”
“뭐?”
유현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무슨 개소리지? 그놈들이 내 부모님을 건드릴 이유가 없을 텐데?”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혹시 자네 부모님이 뭐 하던 사람인 줄은 알고 있나?”
“…….”
짐작하는 바가 없진 않았다.
지하실에 있을 때 봤던 총기들과 장비.
어릴 적엔 몰랐으나, 현장에서 일하다 보니 그것들이 실전에서 쓰이는 장비라는 걸 깨닫게 됐다.
유현이 표정을 굳히자 미하일이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자네 부친은 글라자의 킬러였네.”
“……!”
“그리고 모친은 글라자의 정보원이었지.”
유현은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막연히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동요를 감추기가 힘들었다.
가끔은 엄하지만, 매일 자상하게 놀아 주던 아버지. 항상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품을 내주던 어머니.
그 두 사람이 전부 킬러 집단 소속이었다.
“……증거는?”
“자네 아버지, 유는 현역에 있을 때 나와 알던 사이였네.”
“왜 난 그걸 몰랐지?”
“자네도 부친에 관해 물어보지 않았고, 나도 굳이 불편한 진실을 말해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
유현은 갑작스러운 두통에 이마를 짚었다.
진실은 생각보다 가혹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삼합회는 왜 내 부모님을 노린 거지?”
“간단한 이치일세. 유는 의뢰를 수행한 결과 원한을 샀고, 그로 인해 살해당한 거야.”
“그게 무슨……!”
미하일이 차가운 눈빛으로 말을 끊었다.
“너도 이 바닥에서 굴렀으니 알 텐데. 우리의 어깨에는 항상 원한들이 매달려 있다. 그것 때문에 밥을 먹든 잠을 자든 언제 죽임당할지 몰라 불안에 떨며 살아야 하지. 남의 생명을 취하는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아.”
“……그건.”
“유는 돈을 위해 중국의 한 조직을 쳤고, 그 복수로 목숨을 잃었다. 본인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였지.”
구구절절 틀린 말은 없었으나, 유현은 입술을 짓씹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네의 행동까지 막을 거란 뜻은 아닐세.”
“그랬다면 나한테 이런 사실을 말하지도 않았겠지. 이유가 뭐야?”
그 물음에 미하일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유라니. 조건이었잖나? 자네 부모의 복수를 도와달라고. 이건 그 일환일세. 어차피 자네가 직접 할 거 아닌가?”
“당연하지.”
원흉은 자신의 손으로 찢어 죽이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삼합회 소속 누구지?”
“그 전에 하나만 묻지. 바로 그리로 향할 생각인가? 아니, 말하지 않아도 알겠군.”
미하일이 고개를 저었다.
“심정은 알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쳐들어갈 생각은 말게. 아무리 자네라도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건 무리야.”
“상관없어.”
“우리는 상관있네. 안 그래도 상황이 안 좋은데, 삼합회와의 분쟁까지 겹치면 글라자가 무사할 것 같나?”
“그럼 탈퇴를…….”
“불가. 그건 허락할 수 없네.”
쾅!
유현은 분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뭐 어쩌라는 거지? 부모님의 원수가 누구인지 알려줘 놓고, 지금은 또 가지 마라?”
“레이븐. 진정하게. 자네를 막으려는 게 아니니까.”
“무슨 소리지?”
“내가 도와주겠네. 문제없이 중국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미하일은 유현을 보며 말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게.”
“…….”
그에 유현은 싸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오래는 못 기다린다.”
“고맙네.”
미하일은 안달이 난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대신, 배후에 있던 놈의 이름이라도 말해.”
“이름은 말해 줄 수 있지.”
스윽.
“장쉬안. 삼합회 홍콩지부장일세.”
“장쉬안……. 알았다. 내가 해야 할 건 따로 없나?”
“없네.”
“그럼 이만 가 보지.”
“주문한 음료가 아직이네만.”
그 말에 유현은 미하일에 뒤에 선 레프에게 턱짓했다.
“당신 부하보고 먹으라 하든지.”
레프가 미간을 꿈틀대며 룸을 나가는 유현을 노려봤다.
주문한 걸 들고 들어오던 직원이 살짝 당황했다.
“아, 이리 주게.”
미하일은 직원이 가져온 블랙 마티니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지금은 죽어 버린 옛 인연을 향해 잔을 들며 감사를 표했다.
“고맙네. 유. 저런 아이를 낳아 줘서.”
그는 미하일을 위한 충실한 무기가 되어 제 본분을 다하게 될 것이다.
“하하…….”
결국 미하일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