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363
#363화
“그래서.”
쪼르륵.
내 잔에 술을 따른 스가와라가 물었다.
“그때 말한 건 뭔가?”
“음?”
“‘모임’에 들어오라고 했잖나.”
스가와라는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특수국에 관해 더 묻지 않는 걸 보면 일단 나에 대한 신뢰는 유지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사이토 회장에게 언질이라도 받은 건가.’
스가와라는 어디까지나 사이토 회장에게 충성하는 놈이다.
위에서 따로 지시하지 않는 한 이쪽을 적대할 일은 없다.
그 말인즉슨, 회장 또한 아직 나를 두고 볼 생각이라는 뜻이었다.
어찌 됐든 번거롭게 이놈을 설득하지 않아도 되는 건 다행이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우선, 내가 말한 ‘모임’이라는 게 뭔지부터 설명해주지.”
“해보도록.”
“내가 당신네 회장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들었나?”
그 물음에 스가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들었네. 그 거대한 조직을 무너뜨린다는 허황한 꿈을 꾸고 있다는 이야기라면 말이야.”
피식.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지. 어쨌든, 모임은 이 나라의 권력자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이 주도한 것이겠군.”
“정답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먹이를 던져주던 선생이 사라져버렸지.”
그만한 권력자들이 차나 마시자고 모이겠어?
당연히 떨어지는 콩고물이 있으니 고분고분히 선생의 말을 듣고 있던 거다.
이를테면 미래 지식을 이용한 투자 정보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 내가 선생의 뒤를 이어 그 모임을 주도하기로 했다.”
“그러니 나더러 거기 껴라? 나 같은 야쿠자가 끼기엔 부담스러운 판이다만.”
“뭐, 사실 끼라는 건 던져본 말이었고. 궁금한 게 있다.”
“뭐지?”
“가네무라 아키라. 본명 김용수. 누군지 아나?”
스가와라는 잔을 매만지다 대답했다.
“알다마다. 가부키초의 문제아를 모를 리가.”
“가부키초에서 활동하던 놈인가? 놈의 과거를 좀 듣고 싶은데.”
예전부터 궁금하긴 했다.
일본에 있던 야쿠자들은 선생을 적대하는 분위기라고 들었는데, 김용수는 어떻게 선생과 붙어먹은 걸까.
사케를 홀짝인 스가와라가 입을 열었다.
“가네무라, 그자는 가부키초에서 활동하던 폭력배였네. 한인 출신이라 무시당하긴 했지만, 같은 출신들을 모아 세력을 키웠지.”
“그러던 놈이 갑자기 한국으로 넘어온 이유가 뭐야?”
“그것까진 나도 모르네. 다만, 가네무라와 다른 야쿠자들 사이에서 큰 분쟁이 한 번 있었지. 열 명이 넘게 죽은 큰 사건이었어.”
“흠…….”
“그 일 때문에 가부키초의 세력도가 급변했네.”
그렇게 김용수는 쫓겨나듯 일본을 떠났고, 3대 야쿠자가 가부키초의 야쿠자들을 관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어쨌든, 선생이 왜 그놈을 받아줬는지는 모른다는 소리네.”
“그렇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잔을 내려놨다.
그럼 더 이상 스가와라에게 볼일은 없었다.
“가려는 건가?”
“그래야지.”
“자넨 항상 용건이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더군.”
그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우리가 밤새 술판을 벌일 만큼의 사이는 아니잖아?”
“마치 쫓기는 것 같아서 말일세.”
“…….”
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한마디였다.
스가와라의 말대로, 나는 쫓기는 것처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민지훈이 언제 다시 전면에 나설지도 모르고, 그동안 몰랐던 세계에서 온갖 놈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걱정은 고맙지만, 내가 쫓기는 입장은 아니라서.”
내 대답을 들은 스가와라가 눈썹을 까딱이며 잔을 꺾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조심히 들어가시게.”
“그러지.”
척.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스가와라에게 경고했다.
“당신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김용수, 그놈도 며칠 전에 암살자한테 습격당했거든.”
“…알겠네.”
지난번에도 삼합회 놈들한테 칼침 맞고 골로 갈 뻔한 스가와라다.
이 정도만 말해줘도 알아서 몸을 사리겠지.
드륵-.
문을 열고 나오자,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이 나를 쳐다봤다.
그중 하나, 스가와라의 오른팔인 미우라가 나에게 물어왔다.
“이야기는 끝나신 겁니까?”
“예.”
“그럼,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미우라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나를 배웅했다.
일전에 일을 도와주며 호감을 샀기 때문이었다.
“쯧.”
건물 바깥으로 나온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김용수를 습격한 게 누군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야쿠자 내부의 일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사주한 것일까.
차를 타고 이동할 때 유현에게도 물어봤는데, 그놈도 범인은 아니었다.
-목표 중에 그 남자가 있긴 했지만…… 놈은 내가 건드린 적 없다.
유현이 한국으로 와서 살해한 건 김우천 딱 한 명.
그러니 김용수 피습 사건의 전말은 오리무중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혼자 고민해봤자 뭔가 나올 것 같진 않은데 말이야.
다만, 머릿속으로 짐작 가는 후보들이 몇 있었다.
결론을 내린 나는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미끼를 한 번 더 던져줘야겠어.’
* * *
저녁을 지나, 밤이라고 불러야 할 야심한 시각.
러시아의 한 인적 드문 부두에 고속정 하나가 정박했다.
“스으읍-.”
과장된 몸짓으로 숨을 크게 들이쉰 고상미가 중얼거렸다.
“내가 살아서 러시아 땅을 또 밟게 될 줄이야…….”
한국과는 다른, 서늘하면서도 건조해진 공기.
고상미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 채 뒤를 돌아봤다.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따라오십시오.”
고상미와 유현은 경호대원을 따라 배에서 내렸다.
그러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지프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도 차를 대기시켜 놨군. 이런 식으로 여러 나라를 오가던 건가.”
유현의 중얼거리자 경호대원이 말했다.
“타십시오. 거점으로 이동해 계획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부릉-.
거친 길을 따라 달려가던 차는 교외의 주택가 근처에 멈춰섰다.
잠자코 경호대원이 가는 대로 걸어가던 그들은 한 저택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경호대 놈들의 본거지인가?’
이곳까지 오는 길을 대강 외워둔 고상미는 나중에 이주혁에게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단단히 무장한 채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남자들이 보였다.
그들의 중간에는 작전을 설명하려는지 화이트보드가 하나 놓여있었다.
고상미는 속으로 긴장감을 올리며 물었다.
“전부 경호대냐?”
“그렇습니다. 작전은 대장님이 오셔서 설명해주실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저벅.
경계심이 담긴 눈빛으로 서 있는 유현과 달리, 여유롭게 걸어간 고상미가 한가운데의 소파에 앉았다.
그 바깥쪽에 선 채 대기하고 있던 경호대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완전무장한 이들 앞에서 저렇게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는 게 의아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고상미도 그녀 나름대로 여유를 가장할 이유가 있었다.
꾸욱.
눈앞에 있는 경호대는, 그녀의 부모를 죽게 만든 선생의 부하들이다.
그런 그들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긴 쉽지 않았다.
그렇게 불편한 침묵이 이어지던 그때, 한 냉정한 인상의 남자가 저택 2층에서 내려왔다.
척.
그를 본 경호대원들이 경례를 취했다.
경례를 받아준 경호대장, 육진모가 고상미와 유현을 보고 물었다.
“오는 길에 문제는 없었나?”
그에 두 사람을 여기까지 안내한 경호대원이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육진모의 무감정한 눈동자가 유현을 향했다.
침묵을 지키던 유현이 묘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 봤다.
이내 육진모는 화이트보드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브리핑을 시작하지.”
* *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내에 있는 글라자의 본거지.
그곳에 있던 수뇌의 일원, 마리아는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을 들었다.
“레이븐이 돌아왔다구요?”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묻자, 미하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크가 그리 말했네. 한국에 있던 레이븐을 우연히 발견했고, 저항하지 않는 그를 이곳으로 데려왔다더군.”
마리아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본인 입으로 말했나요?”
“아니. 직접 만나서 설명하겠다잖아.”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니콜라이가 두 손을 들며 이죽거렸다.
“설명해봤자 그놈이 조직의 규칙을 어겼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다시 돌아왔다는 건, 해명할 게 있다는 뜻 아닐까요?”
“어쨌건 간에.”
니콜라이는 의자 뒤로 기대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뭐, 그놈이 직접 말해주겠지.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한국에서 발견된 건지.”
그때, 바깥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와장창! 쿵!
“음?”
조용히 있던 알렉산더가 의문성을 냈다.
“무슨 소리지.”
“바깥에 무슨 일 있나요?”
알렉산더가 손짓하자, 그의 수하가 회의장의 문을 열고 바깥을 확인했다.
그 순간.
탕-!
총성과 함께 수하가 휘청거렸다.
털썩.
바닥에 쓰러지는 수하를 본 알렉산더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슨!”
그와 동시에, 바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총성이 터지기 시작했다.
타다당! 타타타-!
“젠장! 뭐야?!”
수뇌부들이 당황하며 일어났다.
담배를 물고 있던 미하일이 침착하게 말했다.
“레프. 문을 막아라.”
그러자 마리아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탈출구를 열어요!”
그 말에 마리아의 수행원이 회의장의 한구석으로 달려갔다.
회의장에는 혹시 모를 비상상황을 대비해 수뇌부들이 몸을 빼낼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어 있었다.
드르륵-!
수하는 커다란 수납장을 옆으로 민 뒤, 드러난 철제 문을 밀었다.
끼익-.
그렇게 비밀 통로를 통해 이동하려는데.
철컥.
“…….”
“…….”
“동작 그만.”
통로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장 병력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수뇌부들은 당황한 눈빛으로 그들의 사이에서 등장한 인물을 쳐다봤다.
“당신은…?!”
마리아는 경호대장, 육진모를 보고 이를 악물었다.
바깥에서 들린 총성, 그리고 자신들에게 총을 겨눈 수뇌부의 일원.
이건 명백히 조직에 대한 배신이었다.
“허…….”
미하일이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던지며 중얼거렸다.
“이거, 한 방 먹었구만.”
그는 무장한 경호대원들 사이에 있는 육진모를 향해 물었다.
“유크. 자네 제정신인가?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 물음에 육진모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난 명백히 제정신이다. 그리고 이런 짓이 뭐지? 범죄자 집단이 내분으로 몰락했을 뿐, 딱히 문제가 있을 것 같진 않다만.”
미하일의 말문이 턱 막혔다.
실제로 여기서 수뇌부들이 죽는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 제재할 사람은 없었다.
경찰이 현장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내부 총질로 일어난 사건으로 치부하고 덮을 가능성이 컸다.
“이봐. 경호대장.”
중절모를 벗은 알렉산더가 말했다.
“여기서 우릴 몰살한다 해도, 우리의 수하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 너희도 무사하진 못할 텐데?”
“틀린 말은 아니군.”
알렉산더는 입안이 바싹 마른 걸 느끼며 제안했다.
“무슨 이유로 이런 짓을 꾸몄는지는 몰라도, 대화로 해결할 방법이 있을 것 같군.”
“글쎄.”
“내가 지난번에 당신 부탁도 들어주지 않았나?”
이주혁 일당을 암살하기 위해 알렉산더가 보낸 킬러.
육진모의 부탁으로 그에게 내린 명령을 취소한 바 있었다.
하지만 알렉산더의 바람과는 달리, 육진모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선언할 뿐이었다.
“미안하지만, 여기선 아무도 나갈 수 없다.”
그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알렉산더가 수하와 함께 회의장의 문을 향해 달렸다.
타다닷-!
그러자 경호대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투타타타-!
“크아악!”
알렉산더의 앞에 있던 수하가 벌집이 된 채 쓰러졌다.
그 덕에 알렉산더는 무사히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는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회의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뒷걸음질을 치는 그의 이마에는 총구가 겨누어진 채였다.
알렉산더를 막아세운 남자의 정체를 본 미하일이 탄식했다.
“레이븐…….”
회의장으로 들어온 레이븐, 유현이 미하일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보고 싶었다. 미하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