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387
#387화
탁.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 차영규에게 물었다.
“그래서, 저한테 원하시는 게 뭡니까?”
내 물음에 차영규는 간결하게 답했다.
“현상 유지.”
“그 말씀은….”
“의미 그대로다. 지금 모임의 내부 결속은 흔들리고 있지.”
얼마 전, 조병철 비서실장이 여러 정치인과 공직자들의 치부를 만천하에 공개했다.
그로 인해 옷을 벗는 이들이 수없이 나왔고, 그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있었다.
진짜 범인인 조병철은 자신의 소행이라는 걸 들키진 않았지만 말이다.
“이대로 두면 그자들은 물밑에서 서로 물고 뜯을 거다.”
“파벌이 갈라질 수도 있겠군요.”
“파벌은 지금도 존재한다. 조병철을 위시한 현 정부의 요직에 앉은 인사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대립하고 있으니까.”
차영규가 인상을 구겼다.
“문제는, 조병철이 마음만 먹으면 자기편에 붙지 않는 사람들을 전부 날려버릴 수 있다는 거다.”
“이번 일처럼 말입니까?”
“그래.”
차영규는 이미 조병철이 터뜨린 사건에 관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조병철은 모임 내에 있는 사람들의 치부나 약점을 알고 있다. 흘러들어오는 정보가 많은 자리에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거겠지.”
“원장님도 약점이 있습니까?”
“…없다면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겠지.”
한숨을 내쉰 차영규가 이어 설명했다.
“그건 차치하고, 조병철을 이대로 가만히 두면 권력을 독점하게 될 거다. 그것만은 막아야 해.”
“동감입니다.”
괜히 삼권분립이라는 개념이 나온 게 아니다.
특히 조병철, 그 늙은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무서운 인간이다.
지금은 조병철 덕에 혜택을 보고 있는 게 있긴 해도, 이대로 그놈이 입맛대로 정부를 움직이는 꼴을 두고 볼 순 없었다.
“넌 조병철과 몇 번 독대했던 적이 있지. 안 그런가?”
“그랬죠.”
“내가 너에게 바라는 건 하나다. 조병철을 몰락시킬 단서를 가져오는 것.”
“스파이가 되라는 겁니까.”
차영규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병철과 독대할 수 있고, 약점을 캐낼 만큼의 능력도 있겠지.”
“좋게 평가해 주시는군요.”
“HID 출신 아닌가. 거기다 선생의 후계자를 자처할 만큼 깡도 좋고.”
나는 입안에서 혀로 이빨을 훑으며 생각했다.
‘날 장기 말로 쓰겠다 이거구만.’
자기네 요원을 꽂아 넣는다고 해서 조심성 강한 조병철이 쉽사리 뭔가를 흘릴 리도 없고.
마침 딱 맞은 인선인 나를 이용해 먹겠다는 속셈 같은데.
나도 언젠가 조병철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릴 생각이었기에, 차영규와 내 목표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었다.
‘좋아. 당분간은 뜻대로 움직여 주지.’
나야 하던 대로만 하면 되니 손해 볼 건 없었다.
“현상 유지라는 게 그런 의미였습니까.”
“그래. 지금처럼만 행동하다가 결정적일 때 조병철을 끌어내릴 거다.”
차가운 차영규의 눈빛.
나는 그를 마주하며 생각했다.
‘단순히 나라의 질서만을 위해 이러는 건 아닌 듯한데….’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지만, 일단은 협력하기로 했다.
스윽.
테이블 너머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끄덕.
“마찬가지로.”
차영규가 내 손을 맞잡았다.
“식사는 마저 하고 가지.”
“예.”
달그락.
나는 다시 수저를 들었다.
차영규. 아무래도 이 인간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다.
* * *
DS컴퍼니의 대표이사, 헨리 가필드.
그는 한국의 소식을 듣고선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실패했다 이거지….”
자신의 친구를 해친 원수, 이주혁.
그를 제거하기 위해 한국으로 실력이 뛰어난 수하들을 보냈다.
살인 청부를 받는 경우는 제외한, 헨리가 개인적으로 처리할 사람이 있을 때 중히 쓰던 이들이었다.
DS의 킬러들은 근접 전투보단 총기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편한 길을 놔두고 굳이 근접전을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주혁에게 보낸 수하들은 칼을 다루는 재주가 뛰어났다.
‘그래서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다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이주혁은 부상을 입었을 뿐 목숨을 건졌고, 수하들은 한국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은가.”
항구에 선생을 도우러 갔을 때 이주혁 패거리의 실력을 직접 확인했었다.
자신보다 많은 수의 상대와도 맞붙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의 수장인 이주혁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었다.
탁. 탁.
칼잡이들이 실패하고 붙잡히긴 했으나, 아직 남은 패가 있었다.
‘세 명만 보낸 게 아니니까.’
한꺼번에 덮친다고 해서 놈을 확실히 죽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헨리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이주혁의 죽음이 아니었다.
‘편하게 죽게 둘 순 없지.’
주기적으로 킬러를 보내 놈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 것이다.
평생 언제 암살자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불안함에 떨도록 말이다.
DS에 소속된 킬러를 보내든, 조폭을 섭외하든.
어떤 수를 써서라도 놈을 파멸시킬 작정이었다.
물론 복수에만 매몰될 생각은 아니었다.
‘DS의 내부도 정리해야 한다.’
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잡으며 반대파를 전부 숙청하긴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안심해선 안 됐다.
한번 수뇌부가 갈려 나간 이상, 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곤 확신할 수 없었다.
다혈질적으로 보이나, 헨리는 그 안에 차가운 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선생, 그자는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하긴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메리트가 있긴 하나, 헨리의 계획은 선생의 예언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것이었다.
혹시 그가 이대로 잠적한다면 곤란했다.
잠시 고민하던 헨리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의 측근 중 하나가 가까운 곳에 있으니, 그를 추궁해 보면 되는 일이었다.
펄럭.
헨리는 겉옷을 입은 뒤 사장실을 나섰다.
달칵.
복도로 나오자, 마침 그를 찾아오던 이사가 헨리를 불렀다.
“이보게. 헨리. 어디 가나?”
“잠시 만날 사람이 있어 나갑니다만, 무슨 일입니까?”
“우리가 회의를 해봤는데, 건의할 사항이 있어서 그러네.”
“우리라면?”
“다른 이사들 말일세.”
헨리는 적당히 손을 내저었다.
“나중에 듣죠.”
“헨리. 우린 지금 상황에 불만이 많아! 자꾸 이런 식으로 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피해?”
헨리가 이사를 살벌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기다리라면 기다리세요.”
“….”
“내가 어디 도망간답니까? 아니잖아요.”
이사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걸 본 헨리는 혀를 쯧 차며 몸을 돌렸다.
“한 시간 안에 돌아올 겁니다.”
“…알겠네.”
결국 이사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
이사는 고개를 들어 멀어지는 헨리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개자식….”
* * *
생명공학을 다루는 DS컴퍼니의 계열사, DS바이오테크.
그 건물의 지하엔, 넓은 규모의 실험실이 있었다.
선생의 측근이자 ‘성수’를 개발한 장본인, 이윤종 박사가 그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헨리는 그를 찾아가기 위해 DS바이오테크의 지하로 향했다.
덜컥.
그가 있다는 실험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따로 부르지 않으면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납니다. 닥터 리.”
그 말에 이윤종 박사가 뒤를 돌아봤다.
희끗희끗한 옆머리의 그가 피로한 듯한 안색으로 물었다.
“어쩐 일입니까.”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시간 괜찮으시죠?”
“아뇨. 안 괜찮습니다.”
헨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하. 좋지 못한 타이밍에 왔나 보군요.”
대꾸도 하지 않는 이윤종을 보며 헨리가 눈썹을 꿈틀했다.
“닥터 리.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혹시 잠깐 시간 내줄 수 있겠습니까? 급한 일이라서요.”
“….”
이윤종 박사는 들고 있던 시약병을 내려놨다.
그리고 헨리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5분 안으로 끝내주시죠.”
“그러겠습니다.”
“또, 하나 경고하는데.”
헨리는 이윤종의 싸늘한 눈빛을 보고 움찔했다.
“다시는 실험복 안 입고 여기 들어오지 마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저벅.
경고를 남기고 돌아서는 이윤종.
헨리는 그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눈깔 한번 살벌하군.’
겉보기엔 유약해 보여도, 이윤종은 수백만 명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만든 인간이다.
내면에는 평범한 인간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광기가 잠들어 있으리라.
“쯧.”
헨리는 잠자코 이윤종의 뒤를 따라갔다.
“무슨 용건입니까.”
어디 앉지도 않고 복도에 선 이윤종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에 굳이 심기를 거스를 생각이 없는 헨리가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선생에게 연락 온 거 없습니까?”
“…?”
“상의해야 할 사안이 있는데 연락이 되지 않아서 말입니다.”
이윤종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지금, 그런 걸 물으려고 내 귀중한 시간을 뺏은 겁니까?”
“그런 거라니요. 닥터 리에게도 중요한 사람 아닙니까.”
“난 모릅니다. 돌아가십시오.”
“아니… 참.”
헨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불쾌하게 한 건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서로 돕고 있잖습니까.”
“말했다시피, 난 모릅니다. 때 되면 돌아온다는 것만 알지.”
이윤종은 손을 내젓고 자신의 실험실로 돌아갔다.
“시간 낭비는 그만합시다.”
“….”
혀를 내두른 헨리가 그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하여튼, 마음에 안 드는 자식.’
생화학 무기를 넘기는 조건으로 DS컴퍼니의 지분을 가져가고, 또 연구 시설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게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근에 또 뭘 연구하는 것 같다고 하던데….’
하지만 불쾌한 태도와는 달리, 그의 출중한 지식과 능력은 써먹을 곳이 무궁무진했다.
‘그냥 내 쪽으로 감아버릴까.’
까탈스러운 성격이긴 하나,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공간만 만들어 주면 만족할 것 같았다.
“후…. 어째 제대로 돌아가는 일이 없군.”
한숨을 내쉰 헨리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예. 보스.
“어디야?”
-차에서 대기 중입니다.
“총 한 자루 꺼내놔라.”
-예?
“사람 하나 잡으러 간다.”
그 말에 수하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사람 말입니까?
“그래.”
-혹시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
“변호사.”
헨리가 핸드폰을 탁 접었다.
‘이주혁. 안심해라. 너만 고통받진 않을 테니까.’
* * *
한편, 베이징.
김정우가 돌아가고, 장쉬안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주혁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흐음.”
왕후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 이주혁.
“그놈을 어찌해야 할까….”
마음 같아선 조직원들을 보내 보복하고 싶지만, 지금 시점에 타국에서 문제를 일으켜선 곤란했다.
그러한 사실이 알려지면, 류비엔 같은 놈들이 파고들 거리를 주는 것이다.
‘장룡. 그 녀석도 이주혁에게 당했다지.’
왕후성이 간부라면, 장룡은 정말 장쉬안의 수족과 같은 녀석이었다.
오죽하면 그를 거둔 뒤 장 씨라는 성을 줬겠는가.
“이주혁….”
왕후성, 장룡.
그가 아끼던 이들이 전부 이주혁이라는 자에게 당해버렸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장쉬안은 결론을 내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정당한 복수라는 명분을 세운다.’
복수를 포기한다 한들, 체면을 중시하는 조직의 특성상 또 꼬투리 잡을 게 생기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도 ‘서클’ 내에서 이주혁에 관한 논의가 나왔었다.
‘잘 됐군.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사람이 없지 않겠어.’
장쉬안은 수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그 번호의 주인은 바로 조병철 비서실장이었다.
‘일단, 한국으로 들여보낼 길목부터 마련한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