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407
#407화
고급 중식당, 정화루停花樓.
달그락.
그곳의 룸에선 수저 소리만 울려 퍼졌다.
젓가락으로 팔보채를 집어 먹던 림영호가 고개를 들었다.
“장 사장.”
“아, 예.”
“언제까지 먹기만 할 셈이오?”
“맛이 좋습니다. 다른 것도 좀 드셔보시지요.”
림영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장 사장. 시간이 많지 않소. 이 거래를 누가 주시하고 있을지 모르오.”
어제만 해도 주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돌아다녔다.
언제 어디서 누가 이 대화를 엿듣고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장쉬안은 초조한 듯한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지요.”
끄덕.
그의 뒤에 있던 수하가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 가방을 열었다.
달칵.
그러자 가방 안에 고이 잠들어 있던 각성제가 드러났다.
림영호는 작은 병 안에 든 옅은 푸른색의 액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저게 바로 그 물건이었다.
탁.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려둔 장쉬안이 여유로운 얼굴로 말했다.
“그럼, 다시 이야기해 보지요.”
“좋소.”
“이 각성제, 이름하여 여의주의 효과는 지난번 말씀드렸을 겁니다.”
통각을 극도로 줄이고, 사고의 속도를 높여주는 약물.
림영호는 그걸 눈독 들이고 있었다.
전투가 필요한 요원들에게 보급하면 큰 도움이 될 터.
한편, 해외1팀의 상황실은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중이었다.
“각성제라고 합니다.”
“각성제?”
중국어를 할 줄 아는 박미연이 그에게 통역을 해줬다.
“각성제라. 마약 같은 건가?”
“그건 성분을 분석해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케이. 샘플을 입수해야겠네.”
김태한이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
“다들 잘 들어. 거래 물품은 정체 미상의 각성제라고 한다. 가능하면 물건을 입수하는 걸 목표로 움직인다.”
-예.
-알겠습니다.
탁.
핸드폰을 내려놓은 김태한은 도청 중인 대화에 집중했다.
다시 정화루.
림영호의 제안을 들은 장쉬안의 눈썹이 꿈틀했다.
“으음…. 귀국의 재정 상황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물건의 가치에 비해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되는군요.”
그 말에 림영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 거래는 그에게 상당히 중요한 건이었다.
장쉬안은 그의 눈치를 살피고 덧붙였다.
“물론 국장님더러 돈을 더 달라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대신 그때 붙였던 조건을 하나 없앴으면 합니다.”
“어떤 조건 말이오?”
“독점 유통.”
“….”
“솔직한 말로, 저희가 보는 손해가 적지 않습니다.”
다른 곳에 팔면 훨씬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
그러나 정부 소속인 림영호보단 불안정성이 컸다.
장쉬안이 독점 조항을 없애는 걸 요청한 이유는, 림영호와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완전한 갑이 될 순 없었다.
너무 과한 것을 요구하면 상대 쪽에서 판을 엎어버릴 수도 있다.
“….”
림영호는 고민에 빠졌다.
그가 보위부 소속이라지만,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노인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중국 뒷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최대의 조직.
삼합회의 다음 보스로 유력한 인물이었다.
중국 당의 고위 인사들과도 유착 관계에 있으니, 어지간하면 이 협상을 원만하게 끝내는 게 좋았다.
“알겠소.”
“괜찮으시겠습니까?”
“뭐, 말마따나 장 사장이 손해 보는 게 있잖소. 그럼 액수는 괜찮은 거요?”
림영호는 빠르게 협상을 마무리짓기 위해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에 장쉬안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좋습니다.”
“그럼 세부사항은 이전에 서면으로 확인한 대로 진행하겠소.”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도청하던 김태한 팀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서면이라니, 서로 간에 그런 문서가 오고 간 것은 확인한 적이 없었다.
“우리가 확인한 거 외에 둘이 만난 적이 있었나?”
박미연이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 X팔. 이거….”
“어떻게 할까요?”
“본인이 가지고 있으려나?”
“숙소로 윤성훈 씨를 보낼까요?”
그 물음에 김태한이 손짓했다.
“그래. 그러자고. 중요한 건 그 서류에 있을 거야.”
척.
“성훈아. 림영호 숙소로 가서 서류 하나 찾아봐.”
-서류 말입니까?
“어. 중요한 거니까 철저히 뒤져.”
-아, 예. 알겠습니다.
윤성훈에게 지시한 김태한이 책상 위에 핸드폰을 올려뒀다.
“벌써 쫑낼 분위기 같은데, 이대로면 제대로 알아내는 것도 없이 작전 종료야.”
조기태의 순직 보고를 미루면서까지 끌고 온 작전이다.
이대로 성과 없이 끝나면 분명히 문책을 당할 것이다.
표정을 굳히고 있던 김태한은 홍기동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마 두 사람이 만나는 정화루 근처에서 정순용과 대기하고 있을 터.
그에게 연락해서 돌아가는 림영호를 습격할 생각이었다.
‘나중에 외교적으로 문제를 삼을지도 모르지만… 위에서도 민감하게 대응할 거다.’
북한이 충분히 군사용으로 사용할 만한 효과를 가진 약물을 삼합회에게서 사들인다.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작전 과정에서의 사소한 문제는 충분히 덮을 만큼 말이다.
-식사는 어떠십니까.
-맛이 좋소.
림영호와 장쉬안은 큰 의미없는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니 윤성훈에게서 보고가 올라왔다.
-…찾았습니다.
“그래? 잘했어.”
-그런데 차가 고장 났습니다. 갈 땐 멀쩡했는데, 참….
“일단 여기로 복귀해. 도보로 20분 정도 걸리나?”
-예. 그럼 본부로 가겠습니다.
탁.
김태한은 전화를 끊고 다시 도청 중인 대화에 집중했다.
-그럼, 만나 봬서 즐거웠습니다.
-피차 마찬가지요.
림영호와 장쉬안이 자리를 파할 분위기였다.
그에 김태한은 그들에게 꼬리를 달기 위해 홍기동과 함께 있을 정순용에게 연락했다.
뚜르르-.
“음?”
하지만 왜인지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중요한 작전 중인지라 다른 일을 하는 건 아닐 터.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김태한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상황이 심상치 않은 걸 느낀 박미연이 물었다.
“팀장님. 무슨 일입니까?”
“순용이가 연락이 안 돼.”
“네? 정말요?”
“어.”
꾸욱.
핸드폰을 꽉 그러쥔 김태한이 불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뭔가 불안한데….”
* * *
약 20분 전, 정화루 옆 식당.
홍기동과 정순용은 간단한 음식을 시켜놓고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윽.
홍기동이 모자를 눌러쓰자, 젓가락으로 책상을 짚고 있던 정순용이 물었다.
“홍 요원님.”
“예.”
“혹시 몇 살이요?”
“쓸데없는 얘기는 하지 맙시다.”
“거, 기다리는 동안 심심하니까 이러는 거 아뇨.”
정순용이 입맛을 쩝 다셨다.
그때, 조금 떨어진 도로에서 대기 중인 윤성훈에게서 문자가 날아왔다.
[윤성훈 – 형님. 팀장님 지시로 림영호 숙소에서 서류 하나 찾아오겠습니다.]윤성훈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두 사람의 백업으로 있던 상황.
그가 빠져도 큰 지장은 없었다.
“성훈이가 타겟 숙소로 간다네요.”
정순용은 조용히 문자 내용을 전달했다.
그 말에 홍기동이 의아한 듯 물었다.
“이유는요?”
“찾을 서류가 있답니다.”
“그렇습니까.”
홍기동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윤성훈이 자리를 비운 틈에 임무를 수행해야 할까.
손끝을 까딱이던 홍기동은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오.”
그러자 핸드폰을 확인한 정순용이 말했다.
“성훈이가 서류 챙겼대요. 근디 차가 망가졌디야.”
“아, 어쩌다가.”
어제 홍기동이 엔진오일에 장난을 친 탓이었다.
차가 없어 도보로 움직여야 하는 윤성훈. 그리고 상황실에 있는 김태한 팀장과 박미연.
이로써 홍기동은 정순용과 단둘이 남은 것이었다.
“잠깐 전화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홍기동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정순용이 미간을 좁혔다.
“이 와중에 전화요?”
“예. 개인적인 용무라, 금방 끝내고 오겠습니다.”
“하이고, 참말로. 그라믄 같이 갑시다. 나도 담배나 필랑게. 혹시 들으믄 안 되는 건가?”
“상관없습니다.”
두 사람은 그들이 있던 가게 바로 옆의 골목으로 들어갔다.
홍기동이 핸드폰을 꺼내는 걸 본 정순용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치익-.
미지근하고 습한 날씨와 긴장감에, 정순용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 순간.
후욱!
시야가 가려진 틈을 노린 주먹이 정순용의 턱을 향해 날아들었다.
핏!
그와 동시에, 기민하게 상체를 젖힌 정순용의 턱에 주먹이 스쳤다.
“이런 X부럴!”
정순용이 얼굴을 와락 구기며 뒤로 황급히 물러났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홍기동은 대답 없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명백한 적대 행위에, 정순용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소리쳤다.
“나가 니 이럴 줄 알아봤어, 개새끼야!”
과거 중등부 유도 전국대회 우승자 출신, 정순용이 번개처럼 꽂혀오는 주먹을 피했다.
그리고 손목과 목깃을 잡은 뒤, 하체와 허릿심을 이용해 그대로 넘겨버렸다.
“흐읍!”
업어치기. 매트 위에서라면 몰라도, 딱딱한 바닥에 사람이 꽂히면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홍기동이 그렇게 되는 일은 없었다.
“…!”
꽈악.
홍기동은 메쳐지지 않고, 두 다리와 팔로 그의 다리와 몸통을 휘감아 버텼다.
“끄윽…!”
오른쪽 옆구리 쪽에 강렬한 통증을 느낀 정순용이 눈을 크게 치떴다.
“크앗!”
정순용은 무게중심을 확 젖히며 매달려있는 홍기동을 땅에 처박으려 했다.
그러나 상대는 날쌨다.
정순용을 잡고 있던 두 팔을 풀고, 몸을 뒤로 확 젖히며 다리를 차올렸다.
떠억-!
턱을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정순용의 다리가 풀려버렸다.
텁.
두 팔로 바닥을 짚으며 착지한 홍기동은, 휘청이는 정순용의 가슴팍을 발로 걷어찼다.
퍽! 쿵!
뒤로 날아간 정순용이 골목 담벼락에 부딪혔다.
뒤통수를 박은 정순용의 눈동자가 순간 위로 돌아갔다.
주르륵.
정순용이 흘러내리며 주저앉았다.
그의 오른쪽 갈비뼈 사이엔 삐져나온 나이프의 손잡이가 보였다.
“후.”
잠시 숨을 고른 홍기동이 그에게 다가갔다.
“컥. 끄윽….”
정순용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흐릿한 눈빛으로 어떻게든 고개를 들려고 했지만, 폐까지 들어온 칼날 탓에 호흡하기가 힘들었다.
“씨, 프흡.”
본인이 여기까지라는 것을 깨달은 정순용이 눈에 힘을 주며 홍기동을 올려다봤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개… 스애끼야….”
“사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턱.
홍기동이 양손으로 정순용의 머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힘을 주며 그의 두꺼운 목을 꺾었다.
우득!
정순용의 몸뚱이가 축 늘어졌다.
그렇게 한 명을 더 처리한 홍기동이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역시, 직장 동료를 제 손으로 처리하는 건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지이익.
홍기동은 정순용의 뒷덜미를 잡고 끌고 간 뒤, 골목에 있는 큰 쓰레기통을 열었다.
그리고 정순용의 시신을 던져넣었다.
쓰레기통 안에 든 게 많이 없었기에, 그의 커다란 덩치도 수용할 수 있었다.
우웅-.
홍기동은 손에서 진동하는 정순용의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뚝.
전화가 끊기더니, 이번엔 홍기동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뭐야. 순용인 왜 전화를 안 받아?
“방금 옆으로 시끄러운 게 지나가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 지금 타겟이 자리 마무리하고 있으니까, 순용이랑 가서 각성제 확보해. 둘 중 누가 가지고 있을지 모르니까 먼저 확인하고.
“그래도 되는 겁니까?”
-문제 생기면 내가 책임진다. 일단 샘플부터 챙겨. 대신 죽이면 안 돼.
지시를 받은 홍기동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순용이한테도 전달해 주고.
“예.”
뚝.
홍기동은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김태한 팀장의 말대로, 장쉬안이 가지고 있던 각성제는 확보해서 차영규에게 넘길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
‘팀장을 제거한다.’
그 수상한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결국, 이번 임무는 완수할 것이다.
늘 그랬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