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461
#461화
텅.
책상 밑, 바닥을 여니 드러난 숨겨진 공간.
거기서 꺼낸 금고를 차영규의 책상 위에 올려놨다.
“별로 크진 않네?”
컴퓨터 모니터보다 조금 작은 수준의 크기였다.
“안에 든 것만 꺼내고, 금고는 여기 두고 갑시다.”
“그래. 열어봐.”
메모해 둔 비밀번호대로 다이얼을 돌렸다.
달칵.
그러자 딱 맞아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금고 문이 열렸다.
끼익.
금고 안에는 두툼한 갈색 봉투가 있었다.
대충 확인해 보니 서류만 수십 장이 넘었다.
나는 묵직한 봉투를 품 안에 잘 집어넣고, 금고를 원래 있던 곳에 다시 넣었다.
드륵.
그리고 대리석 바닥 뚜껑을 가져와 덮었다.
차영규가 이 금고는 본인만 알고 있다고 말했으니, 밖에 있던 직원들도 우리가 이걸 가져간 사실은 모를 거다.
“조사 끝났으니 가보겠습니다.”
일부러 5분 정도 시간을 보내다 나왔다.
“벌써 끝나신 겁니까?”
“예.”
“어떤 조사를 하셨길래.”
하. 이것들 봐라.
“경찰이 무슨 조사를 했는지 궁금하신 이유는? 그쪽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웬만해선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지시가 있어서 말입니다.”
“조사하러 온 경찰이 웬만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툭.
직원 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쓸데없는 의문은 접어두시고, 진짜 외부인이나 못 들어가게 잘 막아주세요.”
“….”
나한테 어깨를 잡힌 직원의 입매가 살짝 비틀리던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특수국에서 나오셨다고요.”
고개를 슬쩍 돌리자, 약간 넙데데한 얼굴의 남자가 날 보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실례지만, 직책이 어떻게 되십니까?”
“수사과 소속 이주혁이라고 합니다. 누구십니까?”
“국정원 1차장 신준홍입니다.”
“아, 예.”
생각보다 높은 사람이었네?
“조사 때문에 오셨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수사 담당하시는 경감님이 지시한 사항이 있어서요.”
“혹시 그게 어떤 지시인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원장실은 이미 압수수색까지 끝났다고 들었는데….”
나는 속으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차장쯤 되는 사람이면 조금 전처럼 적당히 뭉개고 지나가기 난감했다.
‘저 건방진 놈, 누군지 털어봐!’ 하는 순간, 내가 진짜 경찰이 아니라는 걸 알아낼 수도 있으니까.
물론 적당히 인사 서류를 만져놓긴 했지만, 국정원의 정보력을 무시하면 안 된다.
스윽.
결국 품 안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보여줬다.
“그때 조사 중 놓고 간 게 있어서 다시 가지러 온 겁니다.”
“아, 그렇습니까.”
1차장, 신준홍은 우리 일행을 묘한 눈빛으로 살피는 듯했다.
내가 신준홍을 이렇게 경계하는 이유는, 차영규가 말한 자기 최측근이 바로 이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차영규를 보좌하던 사람이지만, 나와는 아무 접점도 없다.
그리고 뒤통수를 쳤을 가능성도 빼놓을 수 없기에, 솔직히 자리를 빨리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바쁘실 텐데 붙잡아서 미안합니다.”
신준홍이 웃으며 말했다.
다행히도 우리를 계속 붙잡고 있을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닙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아! 저, 원장님은 잘 계십니까? 연락이 닿질 않아서….”
“용의자 조사는 담당이 아니라,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아아.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예.”
그대로 지나쳐 왔던 복도를 되돌아가니, 뒤통수로 꽂히는 시선이 느껴졌다.
당연히 우리를 의심하고 있을 거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내가 빤히 쳐다보자 춘식이가 움찔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
거기다 무슨 미국 배우처럼 기른 수염까지.
눈치껏 선글라스는 벗고 있었지만, 경찰이라기엔 너무 프리한 모양새였다.
“아, 저 때문에 의심받은 거죠? 이거. 이럴 줄 알았으면 무스라도 좀 바르고 오는 건데.”
“단순히 외관으로 의심하는 건 아닐 겁니다.”
자기도 걸리는 게 있으니까 꼬치꼬치 캐물은 거겠지.
어쩌면 정말로 차영규를 배신하고 그쪽에 불었을지도 모른다.
‘믿을 놈 하나 없으니 원.’
모임에 속한 온갖 인간들을 보면, 공무원이고 정치인이고 도무지 신뢰할 수가 없었다.
‘새삼 광철이 아저씨도 대단하네.’
돈과 권력의 유혹을 뿌리치고, 그 대가로 감옥에 다녀왔으니까.
요새는 뭐 하고 지내시려나.
위험한 일에 자꾸 뛰어들다 보니, 괜히 불똥이 튈까 봐 주변 사람들에게 선뜻 연락하질 못하고 있었다.
탁.
바깥으로 나온 우리는 내가 타고 온 차로 향했다.
가는 길에 흥신소 직원 김 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대표님.
“좀 어때요?”
-말씀하신 사람이 이동할 만한 경로를 다 확인하고 있는데, 아직 찾았다는 소식은 없습니다.
“그래요?”
미우라가 자기 부하들을 보내서 쫓는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됐나 보다.
아무래도 야쿠자들이 훈련된 사람을 끝까지 추적하긴 힘들겠지.
“그럼 일단, 그놈 쫓는 건 그만둡시다. 범위가 너무 넓어졌어요.”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경찰도 아니고 거리를 봉쇄할 순 없는 노릇이라, 그 한 놈 잡자고 너무 많은 시간과 인적 자원을 소모하는 건 손해였다.
“대신 관악산에서 내려오는 길목마다 사람을 교대로 배치하세요.”
-예.
“건장한 체격, 또는 수상한 가방을 매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즉시 보고하시면 됩니다. 인상착의 몇 개 보낸 건 받았죠?”
-예.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수고해요.”
민지훈을 비롯해, 우리가 아는 선생 패거리의 얼굴을 사진이나 몽타주 형식으로 흥신소에 보내줬었다.
그걸 바탕으로 근처를 감시하다 보면, 분명히 레이더에 걸리는 날이 올 거다.
우리뿐만 아니라, 야쿠자들도 계속해서 관악산 일대를 수색할 테니까.
다만 문제는, 민지훈이 도망친다면 지금이 적기라는 건데.
위치가 특정됐다는 걸 눈치채고, 수색 인원을 줄이기 위해 한 명만 내려보냈을 가능성도 있었다.
내가 차 앞에 서 있자 부장님이 물었다.
“안 타냐?”
“부장님. 잠시 전화 좀 하겠습니다.”
“어, 그래라.”
꾹.
나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모르면 알아내면 되는 법.
뚜르르-.
신호음이 열 번쯤 울리고, 기다림이 길어지던 그때.
-어쩐 일이에요?
“지금 한국에 있냐?”
다짜고짜 던진 질문에 민지훈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요. 따로 할 말이라도?
“조병철을 잡아야 되는데, 이번에 차영규가 그렇게 됐잖아.”
-아쉽게도, 내가 거기 쏟을 시간까진 없네요. 도와줄 순 있습니다만….
“어떻게?”
-그에 맞는 리턴이 있어야 나도 마음이 생기지 않겠어요? 내가 이주혁 씨 하급자도 아니고. 안 그래요?
민지훈의 반응이 전과는 달랐다.
-도움받은 게 있으니까, 그동안 나도 정보를 제공한 거죠. 그런데 내 계산상 이 정도면 대가는 다 치른 것 같아서.
“네가 준 정보가, 우리가 감수한 생명의 위험이랑 같다는 소리냐?”
-그런 소립니다.
“오케이. 뭐 하나만 물어보자.”
-그러세요.
“조병철, 약점이 있나? 드러나면 모든 걸 잃을 만한 그런 거.”
삼합회와의 거래?
제대로 된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꼬리를 잘라버리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국회의원 같은 선출직이라면 모를까, 평판이 떨어진다고 해서 그렇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지도 않는다.
그래서 민지훈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예전에 같이 모임을 주도했으니, 아는 게 아예 없진 않을 테니까.
-약점이라. 조 실장님도 어떻게 해볼 생각인가 봅니다?
민지훈이 전화 너머로 웃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죠. 이주혁 씨라면 그 모임도 마음에 안 들 거라고 생각했어요.
“됐고, 알아 몰라?”
-알죠. 판교신도시 건, 조 실장이 주도한 겁니다.
작년에 한 번 크게 이슈가 됐었던, 판교신도시 관련 비리.
건설사와 기업, 정치인에다 뭐에다 꽤 많은 사람이 엮여있었지.
자잿값으로 정치자금 세탁한 놈, 좋은 위치 먼저 들어가겠다고 청탁한 놈.
재개발 사업에 장난질하던 놈까지 법의 심판을 받았다.
-그걸로 조 실장이 얼마를 벌었는지 알면, 깜짝 놀랄 겁니다.
“금액은 말하지 마라. 질투 나니까. 그거, 증거는 있는 거야?”
-내가 허튼소리 하는 거 봤습니까.
허튼소리를 하냐고?
해주고 싶은 말이 참 많았지만 참았다.
“그래. 그건 그렇고, 리턴이 있어야 한다고 했지. 원하는 게 뭐냐?”
-부탁 한 가집니다. 이주혁 씨랑 똑같이.
“무슨 부탁.”
-스가와라 켄타. 아시죠?
민지훈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눈살을 찌푸렸다.
“스가와라?”
-인천의 야쿠자. 몇 번 만났다고 들었는데요.
만나긴 했다.
지금 통화 중인 선생의 진짜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
민지훈이 죽지 않았을 거라는 가설을 내놓은 것도 스가와라였다.
사실상 민지훈을 족치는 데 큰 도움을 준 사람이지.
“…그랬는데. 그 사람은 왜?”
-요즘은 뭐 하고 지낸답니까?
묻는 걸 보니 야쿠자들이 자기를 찾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모양인데.
“그것까진 나도 모르지. 질문하려는 게 뭐야?”
-스가와라는 알고 있나요?
“뭘.”
-우리가 이렇게 거래한다는 거요.
그 말을 들은 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박쥐의 삶은 힘들구만.
“모른다. 이거 대답해주는 게 부탁이냐?”
-하하. 다름이 아니라, 조만간 일본으로 넘어갈 생각이라서요.
“일본을 간다고?”
민지훈은 수 년 전, 일본 본토의 야쿠자 수장 몇을 암살한 적이 있었다.
그 일 때문에 야쿠자 사회 전체가 선생을 잡아 죽이기 위해 벼르는 중이라고 스가와라가 말했었다.
그런 일본에 제 발로 들어간다니 의문이었다.
-볼일이 있어서요. 그러니까, 스가와라한테는 말하지 말아주세요. 이게 부탁입니다.
“그게 부탁이라고?”
생각보다 별거 없는 것 같다가도, 어떻게 보면 또 그렇지 않았다.
민지훈이 일본으로 넘어가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말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냐?”
-네. 그게 끝입니다.
헛점이 많은 조건이었다.
내가 스가와라에게 이걸 말하지 않아도, 민지훈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길에 야쿠자들에게 덜미를 잡힐 수도 있었으니까.
‘뭔가 수상해.’
분명히 야쿠자들이 자기 은신처 근방을 수색하고 있는 걸 알 텐데, 이렇게 자신만만한 태도라니.
아마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방법이 있으니 그런 거겠지?
“알았다.”
-고맙네요. 이주혁 씨가 또 정보를 흘리면 곤란했거든요.
생각을 정리하다, 민지훈이 한 말을 듣고 흠칫했다.
‘또’ 정보를 흘린다고?
-조 실장님 증거는 지금 당장 넘겨줄 수 없는 상황이라, 조금 시간이 걸릴 겁니다.
내가 당황한 사이 민지훈은 본인 할 말을 이어갔다.
-조만간 사람 보내서 전달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습니다.
마지막?
민지훈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솔직히 흥미 본위였긴 하지만, 난 내 계획을 어그러뜨린 이주혁 씨를 최대한 호의적으로 대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흥미로웠나?”
-그럼요. 여러모로. 그런데 말이죠. 최근 들어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어요.
“긍정적으로? 아니면 부정적으로.”
-글쎄요. 그냥 깨달음이라고 할까요. 우리 둘은 절대 함께할 수 없을 거라는, 그런 깨달음?
불길함이 느껴지는 말에, 나는 잠시 침묵했다.
-당신은 나를 그저 도구로 사용할 뿐이니까요.
“….”
-이제 이 번호로 연락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게 피차 좋을 것 같네요.
아. 이놈과는 여기서 끝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에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니, 더 심하지. 모든 인간을 도구로 보고, 자기만 세상을 바꿀 선택받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정신병자니까.”
-…뭐라고?
“착각하지 마라. 남들이 보기엔, 너도 똑같은 쓰레기일 뿐이니까.”
뚝.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일방적인 언어적 폭행을 한 기분은 상당히 후련했다.
“후….”
이로써, 변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악의 적이 다시 돌아섰다.
하지만, 그건 그놈도 마찬가지다.
‘일본으로 간다고? 어림없는 소리.’
민지훈이 한국을 뜨기 전, 우리는 그놈을 잡을 것이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