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86
085화
우재성의 전화를 받은 다음 날.
그를 만나기 위해 미국 일정을 조율하던 중이었다.
“행님. 누가 찾아오셨는데예.”
덩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누가.”
“그 무슨 검사님이라 카던데, 뭔 일 있심니꺼?”
아, 던진 떡밥을 문 건가.
“드디어 오셨구만.”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대충 걸쳐 놓은 코트를 걸쳤다.
내려온 머리를 쓸어올리며 미팅룸으로 들어섰다.
“이주혁 씨. 아니, 이주혁 대표님이라고 해야 하나요.”
“서 검사님. 오랜만입니다.”
두꺼운 안경을 쓴 깡마른 체구의 중년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미래에 검찰총장의 자리까지 올라가는 청렴결백한 검사, 서해결이 손을 내밀었다.
전생에 언더커버였을 때, 나에게 감명을 준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반갑습니다. 바다스토리 건 이후로 처음인가요?”
“그렇죠.”
안경을 손가락으로 쓱 올린 서해결 검사가 회사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저번에 만났을 때는 바다스토리로 고통받은 일반인……이라고 하셨는데, 이런 큰 회사를 가지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주식 투자가 잘 풀려서요. 하하.”
서해결 검사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퀭한 얼굴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품에서 종이봉투 하나를 꺼내 안에 든 걸 테이블 위에 쏟아 냈다.
“저한테 이걸 왜 보내신 겁니까?”
그가 보여준 건, 배성복 서장의 비리가 담긴 사진들이었다.
내가 송태석 과장에게 보여준 것과 같이, 여자를 만나고 돈을 받는 서장의 모습이 찍힌 것들.
어제 서해결 검사의 사무실로 이 사진들을 보냈었지.
그래도 다음 날 아침부터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제가 개인적으로 알아낸 것들입니다. 흥신소도 하나 가지고 있거든요.”
“흥신소요.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런 겁니까?”
“불법적인 건 취급 안 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탁.
서해결 검사가 테이블 위의 사진을 두드리며 물었다.
“이건 불법이 아닙니까?”
“불법을 저지른 놈을 잡기 위한 건데, 불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궤변이네요.”
“배성복 서장의 비리를 캐고 계시죠?”
덩치가 가져온 커피를 건네받은 서해결 검사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어떻게 아셨죠? 이것도 흥신소입니까?”
“검사님의 뒤를 캔 적은 없습니다. 그냥 왠지 그럴 거 같다는 감이죠.”
“하…….”
사실 전생에서 지금 시점으로부터 몇 년 후 서해결 검사가 서장의 비리를 터뜨린다.
몇 년 후면, 서 검사가 지금쯤 증거를 모으고 있을 거란 생각에 이 사진들을 보낸 거다.
그런데 아무래도 완고한 서 검사가 내 정보 수집 방식에 불만을 품은 것 같네.
나는 서해결 검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런 증거 없이 배성복 서장이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확실한 증거를 천천히 모으면…….”
이 양반 다 좋은데, 참 답답하단 말이야.
손가락으로 사진을 탁 찍으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모아 드렸잖습니까, 증거.”
“…….”
“자잘한 건 나중에 생각하시고, 일단 서장 모가지를 날리는 데 집중합시다.”
서해결 검사는 누구의 방식이 맞는 건지 고민하는 듯 보였다.
내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가장 빠르고 효율적이라는 건 자신할 수 있다.
“여기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증거 수집한다고 시간 끌면, 괜히 서장에 의한 다른 피해자들만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건 원하지 않으시잖아요?”
“음.”
“바다스토리를 생각해봅시다. 검사님이 하루라도 빨리 법적으로 금지한 덕에 피해 액수가 얼마나 줄었는지 아십니까?”
“제가 금지한 게 아닙니다.”
“그건 넘어가고요.”
썩 마음에 들진 않아도 내가 가져온 증거를 사용하는 게 빠른 길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는지, 서해결 검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주혁 씨는 항상 제가 가려는 길을 앞서가고 있군요.”
“배성복 서장은 언젠가 터질 폭탄입니다. 이 사진이 없어도 서 검사님이 터뜨리셨겠죠.”
“하지만 오래 걸렸을 겁니다.”
“맞습니다. 저는 서해결 검사님이 불을 붙인 도화선을, 조금 더 빠르게 탈 수 있게 하는 것뿐입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서해결 검사에게 몇 가지를 알려줬다.
“저는 당분간 해외에 나가 있을 겁니다. 그동안 서 검사님이 배성복을 서장 자리에서 끌어내리시면 됩니다.”
“이주혁 씨는 더 개입하지 않으시겠단 말씀입니까?”
“네. 이번 일은 서해결 검사님의 단독 공로로 가시면 됩니다.”
내 말에 서해결 검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이유가 뭡니까? 이주혁 씨는 이걸 이용해 사업을 더 키울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런 게 없어도 사업은 키울 자신이 있습니다. 제가 비밀로 하는 이유는 딱 하나에요.”
“그게 뭐죠?”
씨익.
내 음흉한 미소에 서해결 검사가 흠칫했다.
“배성복의 혈압을 조금 더 높여 줄 생각이거든요.”
그러게, 내가 언더커버로 있던 전생에 적당히 부려 먹었어야지. 이 새끼야.
***
어느새 해가 넘어갔다.
2006년이 되고, 사람들은 새해 목표를 세우며 가족, 연인과 즐거운 때를 보낸다.
나도 올해 목표가 있다.
그건 바로, 올해는 꼭 주철수의 모가지를 따는 것.
흐뭇한 표정으로 로비에 안장 새해 타종 뉴스를 같이 보던 사발이 물었다.
“대표님. 저희가 함께한 지도 벌써 한 해가 넘었군요.”
“또 말 꺼내자마자 사기를 치네. 햇수만 한 해 아냐?”
“제 말이 그 말이죠, 하하.”
나는 넉살 좋게 웃는 사발을 보며 궁금한 걸 말했다.
“그런데 사발 이사. 새해인데 왜 와이프랑 같이 안 있어?”
“쯥. 저도 좀 아쉽긴 한데, 장인어른 내외가 미국에 살고 계셔서요. 어젯밤에 비행기 편으로 떠났습니다.”
“그래?”
명절 때 고생이겠어.
그러고 보니 사발과 이렇게 대화하는 상황이 뭔가 어색했다.
전생에선 둘 다 주철수 밑에서 일하고 있었으니, 이런 여유로운 대화를 나눌 시간이 거의 없었다.
-어이, 사기꾼. 회장님이 부르신다.
-하하. 이 부장. 갈수록 말이 짧아지네?
-그쪽은 갈수록 혓바닥이 길어지고.
음, 내가 일방적으로 갈군 것 같긴 한데…… 뭐 어쨌든.
“그나저나, 대표님은 왜 가족들이랑 새해 보내지 않으시고 저랑 뉴스나 보고 계신 겁니까?”
“하나뿐인 아버지가 작년에 돌아가셨거든.”
“아…….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고. 2005년 지하철 참사, 알아?”
사발이 눈을 크게 떴다.
“잘 알죠. 제 지인이 그 자리에 직접 있었대서 생생하게 전해 들었는데.”
“선로에 떨어졌던 사람들을 구하고 돌아가신 분이 내 아버지야.”
“그게 정말입니까? 하……. 저 정말, 아버님 뉴스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추현국이 눈에서 눈물을 뽑아낸 사람이 딱 두 사람인데, 하나는 사귈 때 와이프, 하나는…….”
“됐다.”
사발이 머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아버지는 별로 안 닮으셨네…….”
“뭐?”
“아닙니다. 아무것도.”
탁.
사발과 내가 앉아 있던 테이블에 차 두 잔이 놓였다.
“드세요. 녹차예요.”
어차피 같은 집에서 지내겠다,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회사에 놀러 온 임유나였다.
하, 유나 씨. 이런 천사가 또 어디 있을까.
내가 극구 만류했는데도 청소며 요리며 나서서 해줬다.
사실 내가 별로 못 미더워서 직접 한 것 같긴 한데……. 뭐 어쨌든, 고마운 사람이지.
“고마워요. 저희가 대접해야 하는데.”
“뭘요. 어려운 것도 아니고.”
나는 임유나에게는 보이지 않게 사발을 노려봤다.
사발은 잠깐 눈치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한테만 들리게 속삭였다.
“그래도 애인이랑은 함께하시네요.”
“그런 거 아니다.”
“에이……. 여자분도 마음이 있어요. 잘해 보십쇼. 그럼 저는 다과를 좀 가져오겠습니다.”
능글맞게 말한 사발이 주전부리를 가져오기 위해 떠나자, 나는 옆에서 날 보고 있는 임유나를 자리로 안내했다.
“유나 씨. 앉으세요.”
“아, 네.”
“어느새 2006년이네요.”
“그러네요. 시간이 너무 빠른 것 같아요.”
내가 회귀한 시점이 2005년 7월.
어느새 그 이후로 반년 가까이나 지난 거다.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지.
평생 만져 볼 일 없을 것 같던 액수의 돈도 벌어보고, 내가 건드리지도 못했던 위치의 깡패 새끼들도 보내 버렸다.
힐끗.
“하실 말씀이라도……?”
또 이런 예쁜 여자와 대화도 해 보고, 단둘이 놀러 가 보기도 했다.
전생에선 언더커버로 살면서 만난 여자라곤 화류계 종사자나 돈 밝히는 여자 연예인밖에 없었다.
괜스레 눈물이 날 것 같네.
“유나 씨.”
“네?”
“어차피 가게 내부도 어수선해진 김에, 보수 맡겨 놓고 한 일주일 정도 쉬는 게 어때요?”
“음…….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왜요?”
나는 씩 웃으며 녹차를 쭉 마셨다.
안 그래도 우재성을 만나러 미국에 가야 하는 상황.
임유나를 노렸던 킬러들의 위치는 서울 외곽이긴 하지만, 다른 놈들이 올 가능성이 없진 않았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미국, 가 보셨어요?”
“……네?”
“같이 가요. 미국.”
***
나와 임유나는 비행기를 타고 로버트슨 공항에 도착했다.
해외에 나오는 건 오랜만이라 좀 설레네.
“와……. 여기 진짜 오랜만이네요.”
아니, 유나 씨랑 같이 와서 그런 건가?
나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임유나의 캐리어를 자연스럽게 끌었다.
“아, 제가…….”
“이런 건 원래 남자가 하는 겁니다. 예전에 여기 와 보셨나 봐요?”
“네. 고등학교를 여기서 졸업했거든요.”
“정말요? 몰랐네요.”
그렇게 임유나와 함께 차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날아오기 전 미리 준비해 뒀지. 아주 비싼 옵션으로.
임유나는 내가 준비한 차를 보더니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우와…….”
옛날 미국 영화에서나 볼 법한 낮은 차체에, 뒤로 빠지는 날개와 열린 뚜껑까지.
정열적인 붉은색이 남자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이 차는 바로…….
“크라이슬러 300F 컨버터블이잖아요! 60년식!”
“그렇긴 한데….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이런 클래식카들을 좋아하거든요. 특히 이런 게 딱 제 취향인데, 어떻게 아셨어요?”
차를 좋아한다고? 이런 머슬카를?
생각보다 의외인 취미에 당황할 뻔했지만, 그냥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입니다. 유나 씨가 왠지 이런 걸 좋아할 것 같다는 감.”
활짝 웃은 임유나가 운전석 문을 열고 털썩 앉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유나 씨. 운전은 제가 하겠습니다.”
“혹시 제가 운전해 보면 안 될까요? 꼭 해 보고 싶어서…….”
“얼마든지 하셔도 됩니다.”
나는 얌전히 조수석에 앉았다.
유나 씨가 하고 싶다면 당연히 하게 해 드려야지.
“일단 쭉 직진입니다. 가시죠!”
“갑시다-!”
임유나는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감성 있는 미국 여행에, 좋아하는 차까지.
나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상기된 얼굴의 임유나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우르릉-.
“오우.”
옛날 차 특유의 울림통이 거칠게 울었다.
그래, 이게 낭만이지.
유나 씨가 옆에서 신나게 핸들을 콱 붙잡고 액셀을 콱 밟았다.
잠깐, 그걸 그렇게 밟으면…….
부우웅-!
“유, 유나 씨!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어차피 도로에 저희밖에 없잖아요!”
100km, 120km. 차의 속도는 계속 올라갔다.
‘뭐 이렇게 밟아?!’
부대에 있을 때 헬기에서 강하하는 훈련도 해 봤지만, 그것보다 지금 이 차가 더 위험하다.
나는 뒤로 날아가지 않기 위해 시트를 꽉 붙잡았다.
부아앙!
“속도 좀 낮…… 으아악!”
이번 생은 빌런이다
지은이 : 글빌런
발행인 : 손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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