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usion Sword Battle RAW novel - Chapter 114
115. #대법의 날이 다가오다 (1)
일원삼면기공(一元三面氣功)은 뛰어난 역용술이었다.
눈과 코와 안면의 미세한 근육들을 수축하고 이완시켜 얼굴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었다.
그중에서 백미는 지정한 얼굴을 필요할 때마다 바로 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일원삼면기공에는 세 개의 식(式)이 존재했는데, 얼굴을 변화시킨 후에 각각의 식을 운기하면 그 운용법이 각인되었다. 이후에는 운기만 하면 그 얼굴로 역용이 되었다.
‘이래서 삼면이구나.’
진우선이 무난한 얼굴을 정하고 일식의 운기법을 펼쳤다.
눈꼬리를 살짝 찢어지게 하고, 광대뼈를 도드라지게 하며, 턱선이 각지게 했다. 딱 봐도 사파 무인 같았다.
‘나쁘지 않네.’
이제 이게 일원삼면기공 일식의 얼굴이다.
진우선은 만족하는 마음으로 방을 나섰다.
별채 앞 너른 마당에서 가부좌를 튼 채 명상에 잠겨 있던 탁운비가 눈을 뜨더니 인사해왔다.
“진 대협. 역용을 하셨구려.”
“네. 맞습니다. 어떻습니까?”
“사도련에서 다니기에 꽤 괜찮아 보이오. 나는 이렇소.”
탁운비가 한눈에 진우선의 역용을 알아보더니, 자신의 역용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게 사도련으로 드나들 때 쓰신 얼굴입니까?”
“맞소.”
“탁 형도 딱 사파 무인 같군요.”
“하하. 진 대협처럼 나도 그렇게 만들었소.”
사파의 무공을 익히거나, 흑도의 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생기는 그들만의 분위기가 있었다. 진우선과 탁운비는 역용술로 그걸 흉내 냈다.
“탁 형, 저는 밖에 나가서 주변을 좀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진 대협, 혹시 나도 가야 하오? 아니면 나는 여기서 생각을 좀 했으면 좋겠소.”
어제 서문영화가 다녀간 후, 탁운비는 많은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얼핏 보니 밤잠을 한숨도 못 잔 듯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저도 오늘은 분위기만 보고 올 생각입니다.”
“고맙소. 잘 다녀오시오.”
진우선이 신양의 거리를 걸었다.
거리는 활기찼다. 많은 사람들이 객잔이고 점포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기운은 어두웠다. 사기가 가득했다. 사도련의 무리라고 여겨지는 이들이 많았다. 흑도의 기운도 적지 않게 느껴졌다.
그들은 대부분 얼굴이 부드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떠들썩한 가운데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많이 모였군요.’
[그렇구나. 사기가 이미 가득하고, 계속 몰려들고 있구나.]
검노야가 진우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선은 주변을 느끼고 지리를 숙지하면서 검노야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확실히 대법을 앞둔 듯합니다. 하지만 어디에서 대법을 펼칠지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게 걱정입니다.’
[지난 백 년간 기운이 새어 나오지 않았을 테니, 어딘가 숨겨져 있겠지. 애석하게도 나도 느껴지지 않는구나.]
검노야의 음성에서 아쉬움이 진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계속 살펴보는 수밖에 없으리라.
진우선은 이어서 서문영화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털어놓았다.
‘스승님. 어제 서문 소저는 거짓을 말하지 않은 듯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련의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그 아이는 심령이 맑더구나. 확실히 사도련과는 어울리지 않지.]
‘스승님도 그렇게 보셨군요.’
[그리고 두 사람 사이가 참으로 애틋해 보이더구나. 신분이 높아 천하를 내려다볼 수 있으니 절로 탐욕에 빠질 수 있었을 법한데도, 그둘에게는 순수한 성정이 있었어.]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두 사람이 다른 듯하면서도 닮았더군요.’
진우선은 검노야와 대화하면서 특별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느꼈다.
그동안 악인을 판별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는데, 이번에 악인이 아닌 걸 가려내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다.
잘못 보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진우선은 그렇게 하나의 생각을 정리하고서 검노야에게 물었다.
‘혹시 스승님께서는 칠대악인이 기억나십니까?’
[허허. 칠대악인이라…… 듣고 나서야 익숙했던 걸 알겠더구나. 아마도 만나기 전에는 기억이 나지 않을 것 같구나.]
검노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더니 잠시 멍하니 허공을 보다가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꺼냈다.
[실은 천마와 사황 역시 마찬가지였지. 우선아, 창궁관에서 함께 문신의 기록을 봤을 때가 생각나느냐? 나는 그때야 나 자신을 깨닫게 되더구나. 그리고 다른 이름들을 접하고 나서야 기억의 편린을 찾을 수 있었지.]
‘아!’
[내 기억은 여전히 뿌연 안개로 가려진 것처럼 명확하지 않구나. 그동안 필요할 때가 있거나, 너를 통해 이름을 듣게 될 때라야 기억이 떠오르곤 했지. 그래서 나는 항상 궁금했다. 내가 왜 이럴까 하고.]
검노야가 담담히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사실 진우선과 검노야의 인연을 생각하면 진즉에 대화를 나눴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듯 닮은 두 사람은 때가 오기를 기다렸고, 이제야 소통하고 있었다.
[그런데 네게 선무를 전하던 날 말했던 대로, 내가 얽매여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선도를 추구하면서 많은 생각을 안고 살았는데, 그래서 비워내지 못했었지. 이렇게 너를 만나고 기억이 가려진 상황에서야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겠더구나. 그래서 필연임을 알았다. 허허허.]
검노야가 가볍게 웃음을 흘린 뒤 말을 이었다.
[나의 선도는 비움의 길이다. 그걸 그날에서야 알았지. 우선아, 너도 너의 선도는 어떤 길인지 잘 살폈으면 좋겠구나.]
‘명심하겠습니다.’
진우선이 검노야의 말을 가슴에 새겼다.
***
호남성 장사의 정무맹.
만상각주 공야청은 출전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탁 각주께서도 직접 출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사도련을 상대하는 일이니 당연히 힘을 보태야지 않겠소?”
숭의각주 탁신이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 역할은 무엇이오?”
“사도련주가 극사를 넘어섰으니, 아무래도 맹주님과 탁 각주님이 함께 그를 상대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여각주까지 합세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군. 알겠소.”
극사를 이룬 사도련주 섭무악.
그는 이제 그 이후의 단계로 발돋움을 하기 시작했으니, 정무맹에서 홀로 맞서 싸울 수 있는 무인은 없다고 봐야 했다.
공야청은 둘은 물론이고, 여차하면 셋이 싸워야 하는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정무맹주 독고월과 숭의각주 탁신의 이름이 당연히 먼저 물망에 올랐고, 그다음이 현청각주 여문탁이었다.
탁신은 이 결정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숭의각의 정예도 이끌어주셔야 합니다.”
“그건 물론이오. 그렇게 해야지. 나 말고 다른 이가 숭의각을 맡는 것도 웃기는 일이오.”
공야청은 탁신의 호기 있는 음성에 한결 마음을 놓았다.
“출발은 언제요?”
“내일 아침입니다.”
“알겠소. 준비하리다.”
대화가 끝난 뒤, 공야청이 인사를 건네고 돌아갔다.
탁신이 창밖을 내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공야청에게 직접 묻지 못한 게 있었다.
‘운비야. 잘하고 있느냐?’
***
후우욱-!
거대한 도가 허공을 세차게 갈랐다. 거친 파공음이 온종일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땀이 온몸을 흠뻑 적셨고 허공에 마구 흩날리기까지 했다. 팔에 경련이 일고, 다리는 몹시 무거워 보였다.
하지만 탁운비는 멈추지 않았다.
한없이 무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계속 채찍질할 뿐이었다.
‘나는 무력했다.’
머릿속에는 아버지가 했던 말이 가득해, 온 정신을 자극했다.
‘강호란 힘이 곧 법이라 하셨거늘. 왜 더 일찍 깨닫지 못했을까?’
자책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한때 실력에 만족했던 적이 있었다. 또래에 적수를 찾을 수 없었기에, 그때부터 무공의 정진을 조금씩 게을리했다.
어쩌면 반항이었을지도 모른다. 외롭게 세상을 떠났던 어머니를 보며, 아버지에 대한 깊은 원망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아버지에게 배운 패도십팔절(霸刀十八絶)의 성취는 그 후로 크게 깊어지지 않았다.
그게 지금 너무나 후회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는데.
무력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그렇기에 더욱 움직였다. 몸을 혹사하여 무력감을 떨쳐내려는 심산이었다.
그때, 진우선이 탁운비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닷새째 탁운비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탁 형. 밤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어떻습니까?”
“진 대협. 나는 지금 부족하오. 그래서 멈출 수가 없소.”
“그래도 자기 자신을 너무 학대하면 안 됩니다. 탁 형은 지금 수련의 범주를 넘어섰습니다.”
탁운비가 학대라는 말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사실 그도 느끼고 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모멸감 때문에 도를 계속 휘두른다는 걸.
하지만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원통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탁운비가 진우선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힘겹게 심정을 토로했다.
“진 대협. 나는 지금 아무 쓸모가 없소. 그렇지 않소?”
“아닙니다. 탁 형은 뜨거운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처럼 도를 휘두르는 거지요.”
“하! 그렇게 나를 위로하지 마시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내 힘으로 지키지도 못하고 있소. 아버지라면 도를 뽑으셨을 텐데, 전혀 나서지 못하고 있지. 나는 이 상황을 너무나 용납할 수 없고, 참을 수 없소.”
“탁 형, 사도련주를 상대하는 상황이면 누구나 두렵고 어려워할 것입니다. 이번 일은 탁 형의 잘못이 아닙니다.”
진우선이 탁운비를 격려했다.
그러나 탁운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 대협은 뛰어난 실력만큼이나 마음도 정말 따뜻하구려. 나는 내 실력에 만족했던 적이 있었소.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지. 늦었소. 너무 늦었소. 그게 정말 후회되고, 아예 비참해서 죽고 싶은 심정이라오.”
탁운비가 비통에 잠긴 채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회피일 뿐이겠지. 그래서 난 더는 물러설 수 없소. 지금도 더 후회하지 않기 위해 이러는 거요. 아무리 늦었다 해도, 지금 할 수 있는 온 힘을 다해야 하지 않겠소?”
“맞습니다.”
“나는 이제 물러설 곳도 없소. 내 심정이 너무 답답하고,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지. 그래서 멈출 수 없는 거라오. 정말 멈춰버리면 난 쓸모없는 놈으로 끝나는 거니까.”
탁운비가 처절한 심경을 토로했다.
진우선은 그 마음이 절절히 느껴져 별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정무맹의 움직임을 전달했다.
“탁 형, 이곳 신양에 맹의 임시 거점이 정해졌습니다. 내일이나 모레쯤에 만상각주님도 오실 거라 들었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알겠소. 그러지. 알려줘서 고맙소.”
탁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우선이 다음 화제를 꺼냈다. 오늘 탁운비를 불렀던 본래 목적이었다.
“탁 형, 그리고 지금 혹시 무슨 소리 안 들리십니까?”
“나는 특별히 들리는 소리가 없소.”
“며칠 전 탁 형이 옥소를 구슬피 불지 않았습니까? 한데 지금 그와 비슷한 음률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정말이오? 연우운화곡이?”
“연우운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듣기로는 비슷합니다.”
“아!”
탁운비가 탄성을 흘렸다.
연우운화(烟雨雲華)는 그와 서문영화가 함께 만든 곡이었다.
“진 대협. 나를 그곳으로 안내해 줄 수 있소?”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
진우선의 말에 탁운비가 곧장 떠날 채비를 했다.
조금 전만 해도 도를 놓지 못했는데, 그 심정보다 더 큰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둘은 오성객잔 앞에 다다랐다.
칠현금 소리가 조용한 밤을 적시고 있었다.
“맞구려, 연우운화가.”
탁운비는 오성객잔 앞에 우두커니 서서 연주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발이 땅에 붙은 듯이 굳어 있는 까닭이었다.
곡은 밝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애처로웠다.
그에 탁운비는 애환이 담긴 얼굴을 한 채,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있었다.
드디어 결심이 섰을까.
탁운비가 휘릭 신형을 날려 오성객잔의 한 지붕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옥소를 꺼내 들어 연주하기 시작했다.
퉁- 투둥- 두두두두-
휘이이- 휘이웅- 우우우웅-
한밤에 금과 소의 합주가 이루어졌다. 연우운화곡이 이제야 꽉찬 느낌을 주며 심금을 울렸다.
잠시 후 곡이 끝났다.
탁운비가 진우선의 곁으로 다가왔다.
“진 대협, 이제 돌아갑시다. 연주가 끝났소.”
“알겠습니다.”
탁운비의 잔뜩 메인 목소리에서 오만 감정이 전해져왔다.
하지만 진우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와 함께 객잔 앞을 떠났다.
‘안개비가 내려 부옇게 보이는 운화(雲華)…… 그건 차꽃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탁 형과 서문 소저를 일컫는 말이기도 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