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Fake Bride Who’ll Run Away Someday RAW novel - Chapter (16)
언젠가 도망칠 가짜 신부입니다 (16)화(16/91)
<16화>
세바스티안의 시선이 근처에 매여있는 말들에게로 돌아갔다.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녀석들의 마치 개라도 된 것처럼 모두 에리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꼬리를 살랑살랑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기분이 무척이나 좋다는 뜻이었다.
“헛, 참.”
그 모습을 본 순간 세바스티안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저것들도 미쳤나.”
비로소 밀로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아클리프 군마의 특징은 일단 크다는 것이다.
선대 때부터 여러 번의 품종 개량을 거치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녀석들은 다른 말들과 달리 체고가 크고 마신 역시 매끈하고 탄탄했다.
근육이 발달해 운동신경도 좋은 편이다. 하여 지면을 박차고 달리는 속도 역시 다른 품종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이 빨랐다.
이 녀석들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성격이었다. 특이하게도 사람의 손에 사육되지만, 성질이 절대 온순하지 않았다.
아클리프의 군마는 포악하기로 이름이 높았고, 실제로 그들의 말발굽에 짓밟혀 죽은 사람도 여럿이었다.
오죽하면 아클리프 대공령에 두 번 다시 안 볼 사람에게 던지는 가장 유명한 욕 중 하나가 ‘이 아클리프 군마의 뒷발에 던져 버려도 시원찮을 놈!’이라는 말이 있을까.
이 품종은 머리가 좋았고, 사냥개처럼 오직 자신이 주인으로 인정한 사람의 명령만 따르며 그 손길만 받아들였다.
하여 다른 지방의 영주들은 아클리프 출신의 장제사라 하면 높은 몸값을 주고 데려가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어쨌든 그 탓에 아클리프의 군마는 오로지 군사 목적으로만 사육할 수 있고 승마나 사육용으론 절대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이 품종은 아무리 비싼 값을 치른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길들이기 힘들었고, 그래서 기사나 영주들에겐 꿈의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세바스티안의 옆에 서 있던 밀로드가 말을 보탰다.
“아클리프의 군마가 주인도 아닌 사람을 저렇게까지 잘 따르는 건 처음 봅니다. 사실 저 녀석들, 성질머리 고약해서 애고 어른이고 그런 거 안 봐주고 그냥 제 성질 뻗치는 대로 굴지 않습니까?”
“그렇지.”
“저 블랑체 가의 아가씨께 뭔가 특별한 능력이라도 있는 걸까요?”
“…….”
세바스티안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밀로드 역시 뭔가 답을 기대했던 것은 없었던 모양인지 잠깐 제 주군의 얼굴을 일별하기만 할 뿐 바로 입을 다물었다.
세바스티안의 붉은 눈동자가 가만히 군마와 에리카를 지켜보았다.
어느새 소녀의 손에는 기사들이 나누어준 간식들이 한 움큼 쌓여 있었다.
에리카는 그것을 혼자 다 먹지 않고 근처의 말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자. 하나씩 먹어야 해. 그럼 다 먹을 수 있어.”
그러자 말들은 마치 에리카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지시를 따라 작은 손이 내미는 것을 조심스럽게 받아먹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그랬으면 분명 냅다 이로 물어 버렸을 텐데…….’
에리카가 까르르 웃으며 말의 콧등을 예쁘다고 쓰다듬어 주었다.
정말 생경하기 그지없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세바스티안의 입술을 가르고 가벼운 숨이 흘러나왔다.
‘진짜 특이한 녀석이야.’
불어오는 바람에 검푸른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헝클어진 앞머리를 대충 손으로 쓸어넘긴 세바스티안이 이내 그들에게서 몸을 돌렸다.
* * *
타닥타닥.
모닥불에 던져놓았던 장작에 불티가 튀는 소리 말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밤이었다.
불침번은 짝을 지어 교대로 선다.
“이쪽은 이상이 없습니다.”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마차 쪽을 확인해 보지.”
그렇게 두 명이 나란히 에리카가 잠들어 있는 마차를 향해 몸을 돌려 발걸음을 떼었을 때였다.
바스락.
뒤에서 들려오는 자그마한 인기척에 두 기사의 걸음이 멈췄다.
그들은 곧장 뒤를 돌아보았으나, 모닥불을 등지고 있는 탓에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는 이의 얼굴을 바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는 인영에 기사들은 긴장하며 검집에 손을 올렸고,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지해라. 누구냐!”
“신분을 밝혀라.”
그러자 곧 어둠 속에서 다가오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바스티안이었다.
기사들은 곧장 검에서 손을 떼곤 정자세로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대공자님? 왜 주무시지 않고…….”
“수고가 많네. 이쪽은 내가 돌아볼 테니 자네들은 가서 좀 쉬도록 해.”
기사들이 눈이 휘둥그레진 채 서로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저보다 높은 상관에게 그런 일을 시킬 수 없다는 듯 단호한 태도였다.
“예? 아닙니다. 저희가 마저 하겠습니다.”
그러나 세바스티안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잠이 안 와서 그러네. 산책 겸 주위를 잠시 돌아보려는 것뿐이니 자네들은 이만 돌아가 봐도 좋아.”
더는 입씨름을 할 용의가 없다는 듯 세바스티안은 곧장 그들에게서 시선을 뗀 채 가 보라는 듯 손짓을 해 보였다.
기사들은 한 번 더 자기들끼리 눈빛을 교환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자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뒤, 당번 기사 두 명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의 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에야 세바스티안은 가볍게 머리를 털며 에리카가 탄 마차 쪽으로 향했다.
중간에 고개를 한껏 위로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구름이 싹 걷히기라도 한 모양인지 둥근 보름달이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제법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던 세바스티안은 에리카의 마차 앞에서 완전히 멈추어 섰다.
안을 살피는 시선은 짧았다.
짐작했던 대로 불은 꺼져 있었고 조용했으니까.
‘잠들었군.’
깨울 생각은 없었으나, 세바스티안은 그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마차 문에 제 등을 가만히 기대서기까지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덜컹.
세바스티안은 자신이 등 뒤로 미약한 움직임이 있는 것을 느꼈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나 했더니, 쯧. 아무래도 시작하려나 보군.’
소년이 크게 한숨을 삼키며 몸에 힘을 주며 버티고 섰다.
잠시 잠잠해지나 싶더니 이내 다시 한번 더 덜컹, 문이 움직였다.
수도를 떠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세바스티안은 에리카에게 기묘한 잠버릇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일행 중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오직 세바스티안 혼자뿐이었다.
“뭐 해? 안 자고?”
“…….”
조용히 마차 문을 열고 내려온 소녀는 우두커니 바깥에 서 있었다.
워낙 인원이 적어 그날의 불침번을 서야 했던 세바스티안이 그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에리카에게 재차 말을 걸어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소녀의 상태가 심상찮다는 걸 깨닫자마자 세바스티안은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동공이 텅 비어 있는 것처럼 초점이 맞지 않았다.
‘몽유병……인가?’
세바스티안은 곧장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저 말곤 아무도 없었다.
그는 바로 에리카의 몸을 안아 들고 다시 마차 안으로 넣었다.
다행스럽게도 반항은 없었고, 다시 나오지도 않았다.
이튿날 아침.
세바스티안은 에리카를 은근히 떠보았다.
“간밤엔 잘 잤어?”
“네!”
“……꿈 같은 건 안 꿨고?”
“무슨 꿈이요?”
“……아냐. 아무것도.”
하지만 소녀는 간밤에 자신이 마차 밖으로 나와 배회하려 했다는 사실 자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듯 보였다.
세바스티안은 더 캐묻지 않고 그 길로 에리카의 몽유병에 대해서 함구했다.
호의 때문이라기보단, 어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해서 저 역시도 아직 판단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유보해두고 있는 상황에 가까웠다.
‘약점을 잡았다면 잡은 셈인데.’
후우.
적잖이 답답한지 깊은 한숨이 세바스티안의 입술을 가르고 새어 나왔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이대로 신부의 몽유병을 ‘흠결’과 ‘하자’로 주장해 혼인을 무르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한다면 블랑체 후작가와 인척으로 엮이지 않아도 된다.
미리 알리지 않은 사항이었으니, 어쩌면 조너선 블랑체에게 배상까지 받아낼 수 있으리라.
팔짱을 낀 채, 세바스티안은 손끝으로 제 팔뚝을 툭툭 두드렸다.
곧 있으면 대공령에 도착하게 되는데도 여전히 제 안에서는 답이 나지 않았다.
세바스티안의 상념은 오래가지 않았다.
문의 덜컹거림이 잦아드나 싶더니, 곧이어…….
“……마.”
희미한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마.”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엄……마.”
에리카의 음성이었다.
‘죽은 후작 부인을 찾는 건가?’
그는 이제야 수도에서 떠나올 때 밀로드가 했던 이야기가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어린아이라면 낯선 곳에 가는 것이 마냥 괜찮지 않을 거란 말이.
‘낮엔 그렇게 씩씩하게 굴더니.’
세바스티안이 입안의 살을 강하게 물었다.
잠은 모든 의식과 긴장을 내려놓는 유일한 순간이다.
그 말은 에리카 역시 내내 꾹꾹 누르고 참아 왔던 것을 지금 벗어던진 거나 마찬가지란 소리였다.
‘그렇다는 건 지금 모습은 누구에게도 가장 보이고 싶지 않다는 거겠지.’
그러니 별수 있나.
지켜 줘야지.
‘뭐, 당분간만이야. 당분간만.’
자신이 이 꼬맹이를 어떻게 처리할 건지 결론을 내기 전까지만.
또 한 번의 흐느낌과 덜컹거림을 느끼며 세바스티안이 눈을 감았다.
그런데 왜 자꾸 붉은 머리 꼬마의 햇살처럼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가 이토록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