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Fake Bride Who’ll Run Away Someday RAW novel - Chapter (25)
언젠가 도망칠 가짜 신부입니다 (25)화(25/91)
<25화>
현재로선 가장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너무 시간을 끌며 대답하지 않는다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라.’
손바닥에 흥건한 땀을 감추기 위해 은근슬쩍 치맛단을 쥐었다가 놓으며 에리카는 세바스티안의 얼굴을 일별했다.
무뚝뚝하고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은 아닐지도 모른다.
정말 냉혹하기만 한 사람이라면, 들켰을 때의 제 처분 같은 건 궁금해하지 않을 테니까.
그 말은 조금이라도 에리카의 상황이 불리해 보인다면 그가 소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란 뜻이었다.
‘그래도 일단 내가 밑지는 건 없어.’
에리카는 떨리는 마음부터 가라앉혔다.
제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세바스티안은 못 들은 걸로 해 줄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다만, 에리카가 그걸로 성에 차지 않은 게 이 상황의 문제라면 문제였다.
세바스티안은 에리카에게 대답을 종용하지 않았다.
다만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는 듯 붉은 눈동자는 단 한 순간도 소녀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에리카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들키면, 혼나지 않을까요?”
그리고 바로 웃었다.
조금은 철없어 보이게끔.
아마도…… 실제론 혼나는 선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에리카는 기도에 걸린 구슬의 이물감을 선연하게 느끼며 생각했다.
혼나는 정도로 넘어가는 건 진짜 친딸인 블랑체 후작 영애 정도나 되어야 가능한 일.
일개 유모의 딸인 자신은 당연히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니…….
“들키고 싶지 않아요.”
에리카가 작지만 또박또박하게 제 마음을 밝혔다.
잠깐 다른 데를 보고 있던 세바스티안의 시선이 다시금 소녀에게로 와 박혔다.
“그래서 들키지 않을 거고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절박함을 담아 한 번 더 힘주어 이야기하자 붉은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이 말의 어떤 점이 세바스티안의 마음을 흔든 것인지, 에리카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그의 마음이 움직였다면, 그건 에리카가 잡아야 하는 동아줄 같은 기회였다.
‘봉피쥬도 없고, 아직 새로운 감시자도 오지 않은 지금 대공자님과의 대화를 마무리 지어야 해.’
한편 미동도 없이 에리카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던 세바스티안이 갑자기 움직였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길게 뒤로 넘기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생각이 깊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솔직히 나로선 이해가 되지 않아. 네가 친부인 블랑체 후작에게서 왜 등을 돌리려 하면서까지 나와 손을 잡으려고 하는지.”
에리카가 둘러댄, 그저 사이가 좋지 않다는 말로는 납득하기 힘들었다.
에리카가 힘을 주어 주먹을 말아쥐자 여린 손바닥에 손톱이 강하게 박혀 들어갔다.
호흡이 엉키는 바람에 입으로 가느다란 숨을 내쉬자, 다시금 기도에서 덜그럭 이물감이 느껴졌다.
지레 찔리는 게 있어서일까?
에리카는 그 이물감이 마치 자신을 향한 경고처럼 느껴졌다.
세바스티안에게 그 구슬을 들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에리카는 서둘러 입술을 말아 물었다.
대체 어디까지 솔직해도 되는 걸까.
그리고 어디까지 거짓말을 해야 하는 걸까.
그런 걸 계산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평정심을 되찾아야 한다고 머리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감정이 울컥거렸다.
그래서였다.
충동적으로, 속내에 가까운 진심을 털어놓게 된 것은.
“저는 더 이상 제 인생이 저당 잡히는 게 싫어요.”
“……뭐?”
“아버지는 이 혼사가 진행되는 동안 단 한 번도 제게 의사를 묻지 않으셨어요.”
콩닥콩닥콩닥.
온몸을 뒤흔들어 버릴 것처럼 심장이 빠르고 세차게 뛰는 것과 별개로 목소리는 차분히 흘러나왔다.
“아버지는 독단적이세요. 블랑체 가문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전 계속 휘둘리며 살아야 할 테죠.”
하긴.
세바스티안은 무심코 속으로 긍정했다.
조너선 블랑체 후작이 실로 그러한 성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작이 아무리 외동딸을 아낀다고 할지언정 핏줄보다는 가문을 더 우선시하는 사람이었다.
그걸 생판 남인 저도 느끼는데 눈앞의 이 꼬맹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지금이야 제가 어리니 어쩔 수 없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요.”
대체 언제부터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계속 자신의 발끝만 바라보며 말을 이어가던 에리카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입안이 절로 바싹 말랐다.
처음부터, 그녀는 세바스티안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는 게 조금 두려웠다.
때때로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그 맑고 선명한 붉은 눈동자가 꼭 자신의 속내를 샅샅이 읽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피해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제 각오와 진심을 보여 주어야만 했다.
그래서 두려움을 무릅쓰고 똑바로 그를 응시했다.
“그래서 지금부터 준비하는 거예요.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세바스티안은 그녀의 말을 가당찮다고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에리카 못지않게 진지한 자세로 경청하다가 물었다.
“블랑체 후작가와 절연이라도 하겠다는 소리인가?”
“네.”
에리카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왜 뜬금없는 소리를 하나 했더니, 그래서 한 말인가 보군.”
이제야 앞뒤 문맥을 다 파악했다는 듯 세바스티안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 제안은 저와 대공자님만의 동맹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동맹이라…….”
에리카가 뱉은 단어를 곰곰이 되씹어보던 세바스티안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마냥 날이 서 있기만 한 것은 아닌지라 에리카는 마냥 두렵지만은 않았다.
“네가 생각하는 동맹은 어떤 건데?”
“먼저 대공자님이 제게 적당한 정보를 제게 흘려주세요. 그럼 저도 나중에 아버지께서 온 소식을 바로 전달해드릴게요.”
즉, 후작이 에리카에게 내리는 명령을 통해 세바스티안은 조너선 블랑체가 어느 시기에 어떤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세바스티안은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영리하네.’
붉은 눈동자에 은은한 웃음기가 어렸다.
파트너가 될 꼬맹이 신부의 자질이 썩 괜찮다고 느껴졌다.
그만큼 에리카의 제안은 제게 나쁘지 않았다.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만 의도적으로 말을 흘릴 수 있다.
이건 정보를 자신이 쥐고 있다는 뜻이고, 나아가선 판도 제 뜻대로 짤 수 있다는 소리였다.
세바스티안은 더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좋아. 나쁘지 않은 제안인 것 같군.”
그러자 내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세바스티안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던 에리카의 얼굴이 단숨에 밝아졌다.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여, 열심히 할게요.”
그러면서 에리카는 조심스레 제 목을 만졌다. 다행스럽게도 목에는 별다른 무리가 없다.
긴장으로 잔뜩 굳었던 몸에서 힘이 쭉 풀렸다.
‘한시름 덜었어.’
이것으로 확실히,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도 감이 잡혔다.
블랑체 후작의 가짜 핏줄이라는 것만 들키지 않으면 된다.
운신의 폭이 훨씬 넓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에리카가 남몰래 또 하나의 기쁨을 곱씹었다.
제가 제안한 성인식 전에 이혼하자는 말에 대해선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긴 했으나, 동맹을 맺자고 하는 걸 보면 분명 그것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거지 않을까?
에리카가 숙였던 머리를 천천히 들어 올려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세바스티안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에리카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그가 입을 열었지.
“아까, 이곳에서 죽은 듯이 살라고 했던 말은 취소하지. 뭐든 해.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마음껏.”
했던 말을 번복하려니 겸연쩍은 모양인지 세바스티안이 뻣뻣하게 시선을 돌리며 뺨을 살짝 긁었다.
에리카와 진지하게 동맹 이야기를 나누기 전만 하더라도 세바스티안은 말을 바꿀 생각 따위 하지 않았다.
그저 소녀가 더는 제 신경을 거스르지 않고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만 살아가 주길 원했다. 그렇게만 한다면, 마음에 들지 않는 이 결혼쯤은 얼마든지 참고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블랑체 가문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그녀의 진심을 읽고 난 이후부턴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자신의 삶을 살고 싶다는 어린아이를 상대로 자신이 그렇게까지 박하게 굴 필요가 없겠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네?”
한편 세바스티안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탓에 에리카가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왜 마음이 바뀌었냐는 듯한 표정인데?”
“……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보수를 받는다고 생각해.”
“보수요?”
“그래. 어찌 됐든 앞으로 9년간 넌 나와 한배를 타기로 한 거잖아? 이혼을…….”
세바스티안이 부자연스러운 데서 말을 끊었다.
‘내가 왜 이러지?’
뭔가 딱 잘라 설명할 수는 없는데 기분이 나빴다.
평이하던 숨소리 역시 아주 미세하게 씨근덕거림으로 바뀌었다.
“대공자님? 왜 그러세요? 어디 편찮으세요?”
“아. 아니다, 아무것도.”
만약 에리카가 왜 그러냐는 듯 다시 말을 붙여오지 않았더라면 한동안은 계속 그 상태로 있었을 것이었다.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잡은 세바스티안이 까끌까끌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엔 일부러 특정 단어를 배제했다.
“어른이 된다면, 넌 자의로든 타의로든 블랑체 후작가로 돌아갈 수 없게 돼.”
“아…….”
세바스티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긴 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너. 그 뒤의 삶은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