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Fake Bride Who’ll Run Away Someday RAW novel - Chapter (28)
언젠가 도망칠 가짜 신부입니다 (28)화(28/91)
<28화>
소녀의 작은 고개가 스르륵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오늘만 해도 벌써 두 번째 같은 이야기를 들은 참이었다.
저에 대해 딱히 할만한 칭찬이 없어서 한다고 치기엔 구체적이고 또 너무 사소한지라 빈말로 여기기는 좀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에리카는 솔직히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물들에게 특별히 뭘 내어주지도 않았고, 길들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제 곁에 오는 건 무슨 이유인 걸까?
“음, 그런가요?”
에리카가 대충 얼버무리며 답을 하자, 월터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입 밖에 꺼냈다.
“군마들도 그렇고, 지금도 이렇게 야생 다람쥐가 작은 마님을 따르지 않습니까?”
월터는 모두 사람 손을 타지 않기로 유명한 동물들이 아니냐며 껄껄 웃었다.
그 사이 에리카는 깨끗이 씻은 손을 손수건에 닦았다.
그러는 동안 몸을 타고 오른 다람쥐는 그녀의 붉은 곱슬머리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가 이내 흥미가 가셨다는 듯 내려왔다.
다시 근처의 나무로 오르려던 다람쥐는 무슨 미련이 남았다는 것처럼 슬쩍 에리카를 돌아보았다.
소녀는 그 작은 동물에게 보일 듯 말 듯 한 동작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예전에도 그랬나?’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았다. 동물을 만났던 기억조차 없었다.
블랑체 후작가에서는 워낙 어딜 돌아다닐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리카가 후작 영애의 눈에 띄면 그날은 하루종일 저택이 난리가 났었다.
“나는 방에서 꼼짝도 못 하는데! 쟤는 뭔데 돌아다녀!”
“역시 쟤 때문이야! 내가 걷지 못하고 이렇게 약한 건 나랑 이름이 똑같은 쟤 때문이라고!”
사실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모두 그걸 알고 있었으나 감히 바른말을 올리지는 못했다.
후작 영애는 블랑체 가문의 작은 폭군이었고, 그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상대적 약자인 에리카에게 모든 화살이 돌아갔다.
후작가의 사용인들은 되도록 에리카가 방안에만 있길 원했다. 행여 돌아다니기라도 한다면 누구 경을 칠 일 있느냐며 윽박지르며 다락방으로 내쫓았다.
그랬기에 에리카는 사람은 물론 동물들도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없었다.
이렇게 대공저에 와서 조안나와 월터가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에리카는 축축하게 젖은 손수건을 가만히 접으며 중얼거렸다.
“동물들이라도 절 좋아해 주어서 다행이에요…….”
금방이라도 바람에 흩날려 사라질 것 같은 작은 목소리.
월터는 당연히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예? 작은 마님.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앗. 아니에요. 아무것도.”
에리카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살랑 저었다.
붉은 고수머리가 가볍게 헝클어졌다.
그런 에리카의 모습을, 멀지 않은 곳에서 세바스티안이 지켜보고 있었다.
연무장에서 오는 길인지 가벼운 셔츠 차림에 팔뚝을 걷고 있었는데 목덜미와 이마에 땀에 젖은 머리칼이 척척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이상한 녀석.”
검집을 목덜미에 척 올린 뒤, 소년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 * *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방안은 그믐달조차 뜨지 않은 새벽처럼 어두웠다.
넓은 침대 한가운데 깊이 몸을 파묻듯 기대어 앉아 있던 남자의 왼손엔 궐련이, 오른손엔 한 뭉텅이의 서류가 들려 있었다.
날갯죽지까지 덮는 새카만 긴 머리.
체격은 상당히 좋았으나, 살이 내려 살짝 마른 듯한 인상에선 예민한 분위기가 풍겼다.
남자는 미간을 찌푸린 상태로 궐련을 빨아들였다.
느른하고 권태로운 분위기가 남자를 둘러쌌다.
삼켰던 숨을 길게 내쉬자 곧 매캐한 연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때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전하.”
들어온 이는 빈센트였다.
“오늘치 검토해야 할 서류들을 챙겨왔습니다. 대공자님께서 우선적으로 다 살펴보신 것들이며, 최종적으로 전하의 인가만 남은 서류입니다.”
빈센트의 설명에 남자의 입술 사이로 끙,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더니 남자는 이내 거칠게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내가 죽어야 끝나려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장난스러운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빈센트는 과하게 얼굴을 굳혔다.
집사의 딱딱한 반응에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농담이야. 뭘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어? 뻔히 알면서.”
남자, 펠릭스 아클리프가 킥킥 웃으며 또 한 번 깊게 궐련을 빨아들였다가 내뿜었다.
빈센트는 또 하나의 서류 꾸러미를 펠릭스 아클리프 앞에 내려놓으며, 그가 작은 봉투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그리고 이것도.”
“이건 뭐지?”
펠릭스는 손도 대지 않고 찌푸린 눈짓으로 카드를 가리켰다.
그러는 사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진 궐련이 빨간 불을 피우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작은 마님께서 전하께 보내신 겁니다.”
펠릭스의 미간이 잠시 좁아졌다.
빈센트 이 녀석이 작은 마님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누가 있더라, 잠시 고민해 보다가 이내 한 존재를 떠올렸다.
“그 블랑체의 꼬맹이?”
“예.”
“그 정도 냉대면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나? 지치지도 않나 보군.”
혀를 찬 펠릭스는 금방이라도 재가 떨어질 것 같은 궐련을 깊게 빨아들이며 재떨이에 털었다.
그가 궐련을 비벼끄고는 카드를 손에 들었다.
빈센트는 그 모습을 보며, 그래도 오늘은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깔끔한 동작으로 봉투를 가르고 내용물을 읽어내리던 펠릭스의 입매가 느슨해졌다.
그러다 이내 피식.
메마른 그의 입술을 가르고 바람 빠지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쩌실 요량이십니까?”
“글쎄. 어쩌고저쩌고 할 만한 건덕지가 되나?”
펠릭스가 날아갈 듯 가벼운 어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카드의 내용을 살펴보는 눈은 여전히 매섭게 날카로웠다.
“세바스티안은?”
“별다른 움직임은 없으십니다.”
“내 자식이지만 정말 속을 모르겠단 말이지.”
펠릭스가 쯧, 하고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다 이내 입매를 늘이며 중얼거렸다.
“며느리라.”
붉은 입술 끝에 매달린 웃음기가 찼다.
어찌할까.
카드 끝을 툭툭 두드리는 손끝에 무료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 * *
세바스티안의 집무실.
간단히 샤워를 마친 뒤 옷을 갈아입은 소년은 의자에 느른히 기대앉아 있었다.
책상 위엔 살펴봐야 할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나, 그는 지금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경계. 마물.”
소년의 입술 사이로 탐탁지 않아 하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경계’는 최근 앙헬리카 제국에 일어나는 괴현상을 일컫는 말이었다.
경계는 검보랏빛의 소용돌이와 함께 발생한다.
그 소용돌이는 마치 다른 차원과 연결된 문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그 속에서 마물들을 토해내었다.
경계의 크기는 그때마다 달랐고, 당연히 범위가 넓고 클수록 상대하기 까다로운 마물들이 튀어나왔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망할 놈의 ‘경계’는 아클리프 대공령과 인접해있는 신성국의 땅에서만 발생하고 있었다.
신의 축복을 받은 땅에 마물이라니!
세간에 알려지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앙헬리카 황실과 신성국은 남몰래 회동을 가졌고, 한가지 합의점에 이르렀다.
바로 ‘경계’에 대한 것을 함구하기로 한 것이다.
황실 역시 마물의 등장으로 제국민들이 동요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곧 국가 재난을 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혼돈과 불안은 쉽게 잠재우기 어려웠다.
하여 ‘경계’와 관련된 일들은 황실과 아클리프 대공가, 그리고 신성국 사람들 쪽에서도 고위급 말고는 거의 모르는 극비였다.
‘그런데 빌어먹을.’
최근에 이 비밀에 대해 아는 자가 한 명 늘었다.
바로 조너선 블랑체 후작.
앙헬리카 제국 최고의 갑부이자, 제국의 뒷세계를 손에 넣고 주무르는 검은 손.
그런 그가 이 정보를 손에 얻고 가장 먼저 행한 행동이 바로 황실을 협박해 아클리프 대공가와 블랑체 후작가의 혼사를 진행한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인 건가.’
조너선 블랑체의 속내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혼사를 명한 황제에게도 사정을 설명해 달라 요구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가르쳐 주지 않았다.
“걱정하지 말거라, 대공자. 결국엔 일이 다 잘 풀릴 것이다. 블랑체 후작도 결국엔 이 앙헬리카의 신민이지 않나? 그런 그가 제국에 해가 될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황제는 계속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해대는 터라, 세바스티안은 적잖이 화가 났다.
그러나 아클리프 대공가는 황실을 섬기는지라 우선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경계가 신성국과 아클리프 대공령, 이렇게 두 군데의 국소 지역에서만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신성국은 고위급 신관들의 힘으로 마물이 등장했던 경계 부근에 더욱 강한 결계를 둘렀다.
아클리프 대공가는 우선 마을을 폐쇄하고 살던 이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다.
어쩌다 경계가 발생하면 아클리프 대공가의 기사들이 비밀리에 해결하고 있지만, 최근 들어 ‘경계’의 발생 빈도가 조금씩 잦아지고 있었다.
엄중한 상황이니만큼 그 경계를 관리하는 세바스티안의 신경 역시 전에 없이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경계와 마물.
그것들이 대체 왜 발생하는 건지, 이유는 아직 누구도 밝혀내지 못했다.
바스티안은 한숨을 삼키며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마물들을 죽이고 경계를 봉쇄하고 난 자리엔 항상 호박색 결정이 남는다.
‘대체 이게 뭘까. 블랑체 후작은 이것으로 뭘 하려는 거지?’
세바스티안은 두 개의 호박색의 결정을 손에서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