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Fake Bride Who’ll Run Away Someday RAW novel - Chapter (34)
언젠가 도망칠 가짜 신부입니다 (34)화(34/91)
<34화>
“그러나 그건 안 될 말이지.”
조너선이 거칠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상상만으로도 탐탁지 않았다.
줄리아를 대공령으로 보내면 그 모녀가 제 눈을 피해 먼 곳으로 도망칠 것은 보나 마나 뻔한 일이었다.
“그랬다간 일이 다 어그러지지.”
조너선 블랑체가 기분 나쁜 웃음을 입가에 매달았다.
게다가 줄리아를 보낼 수 없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최근 들어 제 친딸의 상태가 더 나빠졌다.
원래도 태어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은 녀석이긴 했다.
최근에 가까스로 제정신을 차렸길래, 향후 9년간은 유모 딸의 그림자로서 숨어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그 소리를 듣고 분을 이기지 못해 다시 졸도해 버렸다.
“어린 녀석이 대체 누굴 닮아서 그런 성질머리인지.”
어지간하면 제 피붙이에겐 상당히 무르게 구는 조너선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제 딸의 성격이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래도 그런 아이가 하나뿐인 제 핏줄인 것을.
그러니 그토록 따르는 줄리아라도 옆에 붙여놔 주어야 했다.
조너선의 손끝이 책상 위를 느리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열심히 굴려 봤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해결 방법을 찾기가 어려웠다.
줄리아를 보내는 것은 애초에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대공령까지 가고 싶지도 않았다.
조너선은 슬슬 유모의 딸 일로 머리를 쓰는 것이 시간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그가 집사를 흘깃 바라보며 물었다.
“죽을병이라나?”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아니지 않을까 싶습니다.”
“쯧. 그러면 뭐 심각한 것도 아니라는 소리네.”
“봉피쥬의 빈자리도 채워야 하니, 이참에 새로운 감시역을 보내시죠.”
거칠게 혀를 찬 조너선이 기지개를 쭉 켰다.
“흠, 글쎄. 굳이 대놓고 사람을 보내 의심을 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이번엔 집사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감히 제가 입을 댈 만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우회로를 찾지. 그러지 않아도 새로운 사람을 잠입시킬 생각이었으니까 말이야.”
조너선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 보였다.
사실 에리카가 자신을 배신할 리는 없다고 믿었다.
제 엄마밖에 모르는 녀석이니 줄리아만 제 손에 잘 쥐고 있으면 감히 따른 마음 따윈 품지 못하리라.
게다가 그 작고 여린 목구멍 속에 비밀을 엄수하게 할 구슬까지 심어놓지 않았는가.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유모의 딸은 저 혼자 알아서 잘 처신할 것이다.
비천하게 태어났으니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윗사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할 테니까.
조너선은 에리카도 그러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일단 이 건은 겉으론 적당한 성의만 보이는 걸로 하지.”
남들에겐 아버지가 딸을 챙기는 것처럼 보이되, 에리카에겐 자신이 그녀를 협박하는 모양새를 취하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좋아.”
제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것인지 조너선 블랑체가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집사에게 짤막한 명령을 내렸다.
“줄리아에게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그녀를 잠깐이라도 대공령에 보냈다가 다시 데리고 오실 생각이십니까?”
“설마.”
조너선이 능글맞게 웃었다.
그가 깍지를 낀 채 느른히 의자에 기대었다.
“그러기엔 돈도 시간도 너무 많이 들지. 그 사이에 내 딸 에리카의 상태가 더 나빠지면? 누가 감당하나, 그걸?”
상상만으로도 진저리가 처진다는 듯 조너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그가 이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명령을 내렸다.
“줄리아에게 제 딸이 아프다는 말을 흘리도록 하게. 그러면 유모 역시 안달이 나서 뭐든 제 딸에게 보낼 수 있는 물건을 하나 내놓지 않겠나?”
아클리프 대공령에 그걸 보내라는 뜻이었다.
제 어미의 물건을 보면, 앓고 있다가도 바로 정신을 차릴지도 모른다.
맡은 바 임무를 제대로 하라는 무언의 경고도 읽을 것이다.
블랑체 후작이 음흉한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며 홀로 쿡쿡 웃었다.
비로소 제 주인의 뜻을 제대로 파악한 집사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예. 주인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 * *
에리카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급하게 안으로 들어온 이는 하루 치 일과를 마친 세바스티안이었다.
노크를 생략했지만 누구도 세바스티안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았다.
벌써 며칠째 반복되고 있는 일이라 다들 익숙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단숨에 침대 근처로 다가간 세바스티안은 굳은 얼굴로 에리카를 내려다보았다.
제 몸보다 몇십 배는 큰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는 에리카는 마치 죽기라도 한 것처럼 새하얬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세바스티안은 에리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상태로 물었다.
“상태는 좀 어떻지?”
에리카의 이마에서 땀을 훔쳐주고 있던 조안나가 송구하다는 낯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세요.”
“…….”
세바스티안이 침음을 삼켰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이번에는 의사와 함께 빈센트, 펠릭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세바스티안이 펠릭스에게 인사를 생략했지만, 대공은 제 아들의 무례를 굳이 책잡지 않았다.
펠릭스와 독대한 날, 거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하며 쓰러진 에리카는 고열을 앓기 시작했다.
바로 의사가 대공저로 들어왔으나 에리카의 열을 잡지는 못했다.
“어릴 때부터 기관지가 약하다고 하셨으니…… 피를 토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어쩌면 앞으로도 종종 이럴 수 있습니다.”
그 순간,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세바스티안과 펠릭스의 얼굴이 동시에 구겨졌다.
부자가 동시에 사나운 얼굴로 의사를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의사라는 사람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의사는 순식간에 목숨의 위협을 느껴 저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만약 빈센트와 알마 부인이 중간에 끼어들어 두 부자를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졸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의사는 에리카의 열을 떨어트리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워낙 몸이 약한 데다가 수도에서 대공령까지 강행군으로 이동을 해야만 했을 테니 피로가 누적되어 몸이 버티지 못한 것도 한몫했을 거란 설명도 덧붙였다.
“그래도 축복을 받았다고 하셨으니 목숨엔 지장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열이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세바스티안이 제 아버지를 향해 따지듯 나지막이 물었다.
“그날 대체 뭐라고 하신 겁니까?”
“별 이야기 안 했다.”
펠릭스가 물끄러미 제 왼팔 쪽을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세바스티안의 붉은 눈동자가 그 시선을 뒤쫓기라도 하듯 자리를 옮겼다.
“그저 내 상태에 대해 알려 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선택하라고 했지. 블랑체 후작에게 알릴지, 말지.”
세바스티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왜 그러셨습니까? 제가 알아서 한다고 분명 말씀드렸잖습니까?”
펠릭스는 잠시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작게 덧붙였다.
“네가 무르게 구는 것 같았다.”
쯧, 속으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펠릭스의 시선이 에리카에게로 가 닿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안 그랬을 거다.”
그의 시선 끝에 야트막한 후회의 감정이 깔려있었다.
펠릭스는 젊은 시절부터 조너선 블랑체에게 사감이 많았다. 그가 워낙 교활한 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그의 딸 역시 제 아비와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제 핏줄을 타고난 세바스티안이 그러했기에, 에리카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소녀는 아니었다.
핏줄을 세탁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는 붉은 머리카락 말곤 그 어느 한 군데도 조너선과 닮은 곳이 없었다.
그래서 펠릭스는 자신이 성급하게 아이를 몰아붙인 것은 아니었나 후회했다.
세바스티안이 피로한 목소리로 물었다.
“블랑체 후작에게선요? 연락이 없습니까?”
“왜 없겠어.”
펠릭스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혀를 찼다.
마침 오늘 오전에 후작가에서 사람이 도착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빠른 속도였다.
분명 대공은 아픈 에리카가 이곳에 마음을 붙일 수 있도록 친하게 지내던 사람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었다.
그런데 그런 대공의 청을 비웃기라도 하듯 블랑체 후작은 아무도 딸려 보내지 않았다.
그가 보내온 것은 그저 발 빠른 심부름꾼이 지고 온 돈과 몸을 보하게 할 수 있는 약재 얼마, 그리고 에리카가 후작가에서 사용했다는 물건 몇 개가 전부였다.
“누가 그깟 약재가 없다고……. 쯧.”
참 기가 찰 노릇이었다.
후작가의 금지옥엽이라고 하기엔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답답하다는 듯 펠릭스가 습관적으로 품속에서 궐련을 찾았다.
“설마 여기서 불붙일 생각은 아니시겠죠? 나가서 피우십시오.”
싸늘한 제 아들의 눈초리에 펠릭스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그러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다.”
자신이 그렇게까지 안하무인은 아니라는 말을 덧붙이며 펠릭스는 순순하게 에리카의 방을 나섰다.
세바스티안의 시선이 다시금 에리카에 못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