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Fake Bride Who’ll Run Away Someday RAW novel - Chapter (45)
언젠가 도망칠 가짜 신부입니다 (45)화(45/91)
<45화>
최고이자 최선은 대비하는 것이다.
에리카의 힘만 있으면 적어도 급하게라도 사람들을 대피시킬 수는 있으리라.
“너도 알다시피 경계는 예고 없이 열려. 그런 상황에서 네 감지 능력은 내게 무척이나 도움이 돼.”
세바스티안은 지금부터 무척이나 어려운 부탁을 에리카에게 꺼내 놔야 한다는 생각에 입술을 달싹였다.
“세바스티안 님.”
몇 번이나 에리카가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그는 이 상태로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좋겠다며 에리카의 양어깨를 단단히 붙잡은 채 움직일 수 없게 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아래로 떨어졌다.
저보다 어리고 약한 에리카에게 이런 부탁을 해야만 하는 자신이 잔인하고 무도하게만 느껴져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많이 무서울 거라는 건 알아. 하지만 맹세할게. 내가 반드시 널 지켜 줄 테니까……. 그 어떤 순간에도, 결코 네가 솜털 하나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할 테니…… 날 도와줄 수 있겠어?”
에리카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세바스티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바스티안 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저도 적극적으로 돕고 싶어요.”
에리카의 대답에 세바스티안은 오히려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간 말조차 잇지 못하던 그는 손으로 제 하관을 덮어 가렸다.
성인과 견주어도 절대가 무리가 없을 정도로 너른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가 꺼졌다.
한참 만에야 숨을 고른 그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에리카는 선뜻 대답했지만, 그것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님을 다른 누구보다도 세바스티안이 가장 잘 알았다.
“……고맙다.”
비록 그가 표현한 말은 짧은 한마디뿐이었지만, 그 속엔 세바스티안이 담을 수 있는 모든 진심이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에리카도 그것을 알았기에, 부드러운 얼굴로 미소 지었다.
세바스티안이 진심을 담아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알려 줄 게 하나가 더 있어.”
사실 에리카가 자신의 제안을 수락할 경우에만 꺼낼 생각으로 준비해온 이야기였다.
‘이렇게 바로 꺼낼 수 있게 될 줄은 몰랐군.’
세바스티안이 홀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에리카가 호기심을 보이며 재차 물어왔다.
“네, 뭔데요?”
짧은 헛기침으로 목을 고른 세바스티안이 더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너, 공부 좀 해야겠어.”
“네에? 공부요?”
선언하듯 한 말에 에리카가 동그래진 눈으로 세바스티안을 돌아보았다.
이번엔 그가 소녀의 어깨를 잡지 않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세바스티안이 자신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켠 상태로 굳어 버렸다.
에리카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있었던가?
그의 붉은 눈동자가 쉼 없이 움직였다.
뽀얀 살결.
구불거리는 머리카락.
언제나처럼 밝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
상기된 듯한 복숭앗빛 두 뺨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고,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 역시 귀여웠다.
처음에 만났을 땐 뼈밖에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비쩍 마르기만 했었다. 물론 지금도 마른 편에 속하지만, 그때보다야 살이 조금 더 붙은 얼굴과 몸은 상당히 보기 좋았다.
‘무슨 애가 이렇게 귀여워? 원래 이렇게 귀여웠나?’
마을의 장난감 가게에서 에리카와 똑 닮은 모습의 인형을 판다면 분명 불티나게 팔릴 것이다.
“대공자님은 복 받으신 거예요. 두고 보십시오, 작은 마님은 분명 커서 뭇 남성들의 심금을 울리실 겁니다.”
“맞아요! 될성부른 떡잎이라는 말은 분명 우리 작은 마님을 두고 일컫는 말이라고요!”
언젠가 밀로드와 조안나가 죽이 척척 맞아 세바스티안의 앞에서 겁도 없이 그런 말을 함부로 지껄였던 걸 흘려들은 기억도 났다.
세바스티안은 홀린 듯이 에리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세바스티안 님?”
그러다 에리카가 부르는 소리에 세바스티안은 반사적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서 거리를 벌렸다.
그제야 비로소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가 그의 안에 고인 기분이 들었다.
흘깃, 곁눈질을 해 보니 다행스럽게도 에리카는 이런 그의 행동을 별달리 이상하다 여기지 않는 눈치였다.
어쩌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이 더 충격적으로 와닿아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작은 입술에서 쉬지도 않고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설명 좀 해 주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 공부해야 해요? 갑자기요? 대체 무슨 공부요?”
약간은 부루퉁해진 얼굴로 칭얼거리는 것 같은 그 모습에, 세바스티안은 제정신을 차렸다.
‘내가 미쳤나. 지금 뭐 하는 거야.’
가볍게 머리를 털며 잡념을 떨쳐낸 세바스티안이 목을 긁는 소리를 내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되물었다.
“왜. 공부하는 거 싫어해?”
그러자 에리카가 금세 표정을 가다듬었다.
새침한 얼굴도 제법 귀엽다는 생각이 바로 들어서, 세바스티안은 또 한 번 헛기침으로 속을 가다듬어야 했다.
“싫지는 않지만……. 조금 뜬금없어서요.”
그러다 에리카가 자신도 모르게 하품을 했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늦어졌네.”
세바스티안이 시간을 확인한 뒤 미간을 좁혔다.
“우선 자자. 자세한 건 내일 말해 줄게.”
“하지만……!”
“큰일은 아니니까 별로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안심하라는 듯 에리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더 고집을 부릴 수 없게 된 에리카가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그래도 궁금해서 잠이 안 올 것 같은데……. 대신 내일 꼭 말씀해 주셔야 해요?”
“알았어.”
세바스티안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며칠 뒤. 아클리프 대공저에 손님이 찾아왔다.
에리카를 가르쳐 줄 선생님이었다.
세바스티안의 언질 덕분에 미리 준비하고 있던 에리카는 아침부터 부산을 떨며 준비를 했다.
에리카는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보며 자신 없는 투로 중얼거렸다.
“조안나, 어때? 나 괜찮아……?”
“그럼요. 오늘도 아주 완벽하십니다, 작은 마님.”
조안나가 술 취한 아저씨처럼 ‘크으’ 소리를 내며 에리카를 향해 엄지를 척, 하고 꺼내 보였다.
제 수발 하녀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닌지라, 오늘은 영 믿음직스럽지가 않았다.
에리카는 가벼운 한숨을 삼키며 시선을 알마 부인에게로 옮겼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는 온화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은 채 에리카에게 필요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단정한 차림이시니 크게 책잡힐 일은 없으실 겁니다. 그리고 작은 마님과도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색감의 드레스인지라 인상도 더 돋보일 거예요.”
그제야 비로소 에리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마 부인은 친절하지만, 정확한 조언을 하는 사람이니 믿을 만했다.
“다행이다.”
조용히 중얼거린 에리카가 슬쩍 벽시계를 돌아보았다.
“이제 내려가 봐야겠지?”
“지금 출발하시면 늦지 않으실 것 같아요.”
“응. 그러자.”
에리카가 방문을 나섰다.
며칠 전, 세바스티안은 에리카에게 아클리프 대공가의 안살림을 꾸리기 위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을 했다.
그 말은 에리카가 보다 더 중요하고 내밀한 대공가의 사정에 접근할 수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제가 그런 중요한 일을 해도 되는 거예요?”
“그럼 너 말고 누가 해?”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에리카는 조금 부담이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날 도와 ‘경계’에 대해 알아봐야 하잖아. 그러려면 아클리프 대공령이 어떤 곳인지, 자세히 알아야 해. 그걸 위한 공부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니 또 바로 수긍이 되었다.
에리카는 알겠노라고 대답했고, 세바스티안은 며칠 내로 그녀를 가르쳐 줄 선생님이 대공저로 방문할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에리카는 응접실로 내려갔다.
오늘은 세바스티안이 함께 있지 않았다.
새벽녘, 불안하고 선득한 느낌에 잠을 깬 에리카가 그의 방으로 달려갔고 경계가 나타난 것만 같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세바스티안은 두말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리카는 저 역시 경계를 찾기 위해 함께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세바스티안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네가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잖아. 괜찮아. 어딘지 방향만 알려 줘. 내가 다녀올게.”
“몸조심하세요.”
그렇게 세바스티안은 동이 터올 무렵 소수의 기사들과 함께 대공저를 떠난 터였다.
‘비록 세바스티안 님은 안 계시지만, 나 혼자서라도 선생님을 잘 만나야 해.’
에리카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거듭 다잡으며 펠릭스와 선생님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응접실로 내려갔다.
똑똑.
“아버님, 에리카예요.”
“들어오거라.”
허락을 받고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서니 묘령의 여인이 우아한 동작으로 차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에리카는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티테이블 가까이 다가갔다.
우선 펠릭스에게 간단히 인사를 한 뒤, 자리에 앉자 여자의 시선이 곧바로 저를 훑어보는 게 느껴졌다.
“이 아이인가요?”
“그래.”
에리카를 사이에 두고 펠릭스와 여자가 짧은 문답을 주고받았다.
“흐음.”
여자는 쥘부채를 활짝 펼친 채 코부터 입가까지를 싹 가리고 있었다.
에리카를 살펴보는 눈빛이 사뭇 매서웠다.
소녀는 잔뜩 긴장한 채, 블랑체 후작가에서 배웠던 예법을 기억해내며 정중하게 선생님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리카라고 합니다.”
“흐음. 그래요. 반가워요.”
짧은 인사가 쌀쌀맞은 목소리와 함께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