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Fake Bride Who’ll Run Away Someday RAW novel - Chapter (5)
언젠가 도망칠 가짜 신부입니다 (5)화(5/91)
<5화>
과장을 조금 섞자면 집채만 했다.
에리카가 블랑체 후작가에서부터 타고 온 좁고 허름한 마차와는 비교하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로 크고 튼튼했다.
‘안을 보진 않았지만, 저 크기면 누울 수도 있을 것 같아.’
어쩌면 후작가의 다락방에서 그동안 쭉 써 왔던 낡고 딱딱한 제 침대보다 마차 의자의 쿠션이 더 푹신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세바스티안은 딱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더 말을 하는 것이 변명같이 느껴져 구차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그러자 이번엔 내내 뒤로 빠져 있던 세바스티안의 보좌관인 밀로드가 나섰다.
“명색이 신부를 모셔갈 마차이지 않습니까? 저희야 단련된 기사이니 말 위에서 몇 날 며칠을 보내는 것 따위는 이골이 나 괜찮지만, 곱게 자라신 아가씨께선 아니시겠지요.”
밀로드의 시선이 에리카에게 가 닿았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자, 에리카는 자신이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놀라서 파드득 몸을 떨며 시선을 떨구었다.
그 모습에 밀로드가 멋쩍게 입매를 늘였으나, 애석하게도 에리카는 그 얼굴을 보지 못했다.
밀로드는 괜스레 제 하관을 손으로 한번 훑은 뒤 헛기침을 하곤 멈췄던 설명을 이어 나갔다.
“보시다시피 크기가 크기인지라 말 두 마리가 끌기엔 너무 무거운 모양이었습니다. 중간에 바퀴도 빠지는 바람에 고치다 보니 이렇게 도착 시간이 더뎌졌군요.”
말을 마친 밀로드가 흘깃, 제 주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세바스티안의 눈치를 살폈다.
어쨌든 자신들이 늦게 온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러니 지각한 일에 대해선 사과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세바스티안이었다.
주인을 제치고 자신이 감히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세바스티안에게선 딱히 사과하려는 기색이 엿보이진 않았다.
‘원래라면 하셨을 텐데, 저 하녀장이 괜히 딴지를 거는 바람에 심기가 단단히 상하셔서…… 아이고.’
밀로드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로 잠시 침묵이 어색하게 이어졌다.
그때 노신관이 밀로드의 말을 받았다.
“아하. 역시, 사정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노신관이 고개를 끄덕였고, 에리카도 시선을 내리깐 채 보일 듯 말 듯 작은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야기를 들어보자면, 에리카를 면박을 주기 위해서 일부러 늦은 것도 아니었다.
에리카를 ‘편하게’ 모셔가기 위해서 큰 마차를 끌고 오느라 애를 먹었을 뿐.
“인사를 나눈 뒤 설명해 드리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렸군요.”
밀로드가 말끝을 흐렸다.
이번에는 에리카도 슬쩍 봉피쥬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하녀장님이 성급하셨어…….’
봉피쥬가 섣불리 나서지만 않았더라면 첫 만남의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험악해지지 않을 수 있었을 거란 생각에 작은 원망이 스며들었다.
‘물론 그런 내 마음을 표현할 순 없겠지만.’
그렇게 에리카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간신히 기침을 멈춘 봉피쥬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어지간히 분한지 이를 악문 아랫입술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표정을 본 에리카가 얼굴을 굳혔다.
‘하녀장님이 또 화를 내면 어떡하지?’
순간적으로 너무 걱정스러웠다.
세바스티안에게 빌어서 겨우 그녀를 구명했다.
그런데 봉피쥬가 눈치도 없이 앙심을 품고 후작의 대리인으로 참석한 자신을 모욕했다며 정식으로 항의하겠다고 목소리라도 높이면?
‘그땐 어떻게 하면 좋아.’
그렇게 되면 아클리프가 관용을 베푼 것이 무색하게도 상황이 퍽 곤란해지리라.
에리카는 떨리는 눈빛으로 봉피쥬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다 조마조마했다.
목이 졸려선지 아니면 수치심 때문인지 피가 쏠린 하녀장의 얼굴은 여전히 시뻘건 상태였다.
하지만 아주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태도는 아까와 상당히 달라졌다.
한 번 사달이 난 덕분인 건지, 그녀는 세바스티안의 기세에 눌려 긴장한 낯으로 마른침을 연신 삼키고 있었다.
그때 노신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해서든 얼어붙은 지금의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만들어보려는 노력이 읽혔다.
“하기는, 이렇게 늦는 것이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대공자를 모르면 모를까……. 시간을 금처럼 여기는 그대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늦을 리 없다 싶었지요.”
노신관의 입에서 대공자를 두둔하는 말이 이어졌다.
잠자코 있던 세바스티안이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진작 설명했을 겁니다. 누가 시건방을 떨며 쓸데없는 말만 보태지 않았다면.”
느릿한 목소리였으나, 말속엔 명백히 경고의 빛이 어려 있었다.
“블랑체 후작가가 싫은 건 싫은 거지만, 대우를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니까 말입니다.”
봉피쥬가 뜨끔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공손히 마주 잡은 두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그녀가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전 그저, 아가씨께서……. 너무 힘들어하시기에 화가 나서…….”
책을 잡히기 싫었던 모양인지 그녀가 힐끔 에리카가 서 있는 쪽을 바라보며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변명하며 말끝을 흐렸다.
“죄송합니다. 주제넘었습니다. 충심이 앞서 그리했다, 여기시고 부디 한 번만 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아닌데. 에리카가 입술을 살그머니 물었다.
하지만 봉피쥬는 그 짧은 사이, 자신의 무례를 완전히 에리카의 탓으로 돌려 버렸다.
‘난 그런 적 없는데.’
세바스티안을 기다리는 동안 단 한마디의 불평도 입 밖에 꺼낸 적이 없었기에, 에리카는 몹시도 억울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제 말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입술을 꾹 다물 수밖에.
가까스로 감정을 삭인 에리카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어색하게 두 손을 모아 포갰다.
“마, 맞아요. 제 잘못이에요……. 죄송합니다.”
그녀가 세바스티안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세바스티안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무엇인가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얼굴에 어렸다.
잠시 뒤, 그가 묵직한 숨을 몰아쉬며 투박스럽게 말했다.
“고개 들어.”
그제야 에리카가 숙였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세바스티안과 시선을 마주치긴 아직 어려운지 눈은 내리깔고 있었다.
세바스티안은 그런 에리카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소녀는 무슨 타박이든, 어떤 비난이든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가만히 숨을 죽인 채 서 있었다.
하지만 세바스티안은 봉피쥬를 상대하던 것과는 달리 에리카에게서는 어떠한 책도 잡지 않았다.
그저 한마디만 툭 던질 뿐이었다.
“딸은, 제 아비와는 많이 다르군.”
그 말에 에리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지레 찔리는 바람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제 발치로 뚝 떨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에리카가 가만히 숨을 죽였다.
‘설마 눈치를 채신 걸까?’
자신이 가짜라는 걸.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입이 바싹 말랐다.
식은땀 하나가 척추를 타고 또르르 흘러가는 게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등골도 서늘해졌다.
‘만약 눈치를 챈 거라면……. 그렇다면 어떻게든 덮어야 하지 않을까?’
에리카의 머릿속은 금세 진흙탕이 되어 버려, 냉정하게 생각하기 어려웠다.
소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탓인지 말도 더 더듬게 되었다.
“……! 아, 저. 그, 그게…….”
하지만 세바스티안은 에리카에게서 딱히 대답이 돌아오길 기대한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곧장 다른 질문을 그녀에게 던진 것을 보면 말이다.
“몇 살이지?”
“제, 나이…… 말씀하시는 건가요?”
당황한 듯 에리카의 황금빛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면서도 화제가 금세 달라진 것에 조금이나마 안도했다.
“그래, 영애의 나이.”
세바스티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리카가 숨을 고른 뒤 답했다.
“올해로 여, 열 살이 됐어요.”
그 순간 세바스티안의 얼굴이 심하게 찡그려졌다.
에리카는 또다시 덜컥 겁이 났다.
‘내가 말실수를 한 걸까?’
예법이 틀렸나?
어미를 ‘–어요’가 아니라 ‘–입니다’로 해야 했던 걸까?
진짜 귀족 아가씨가 아니다 보니 뭐가 옳고 뭐가 틀린 것인지, 이런 상황에선 판가름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세바스티안이 다시금 물음을 건네왔다.
“열 살이라고?”
차가운 목소리에 잔뜩 주눅이 든 에리카가 겁을 먹은 채 대답했다.
“……네? 네.”
“하.”
기가 찬 얼굴로 세바스티안이 입술 끝을 비틀었다.
그러다 이내 싸늘하게 식은 붉은 눈동자로 에리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트, 트집 잡으시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