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Fake Bride Who’ll Run Away Someday RAW novel - Chapter (50)
언젠가 도망칠 가짜 신부입니다 (50)화(50/91)
<50화>
여름의 햇살은 더욱 강해졌다.
그 햇빛을 고스란히 머금었던 땅은 해가 진 뒤에야 그 열기를 토해내었다.
그래서 밤이 되어도 상당히 후덥지근했다.
펠릭스를 대신하여 아클리프 대공령의 사무를 맡아보던 세바스티안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기지개를 켰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찌뿌듯함을 해결할 수 없었다.
세바스티안은 긴 숨을 토해내며 어깨를 돌렸다.
“가볍게 한 바퀴 뛰고 올까?”
벌써 연무장에 나가지 않은 지도 제법 되었다.
그러나 말과 달리 세바스티안은 쉽게 일어날 수 없었다.
힐끗 제 책상을 일별한 그는 다시금 가슴이 꽉 막혀드는 기분을 느꼈다.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렇게 낮부터 개같이 일했는데.
“아. 진짜 많다.”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중요한 결정은 펠릭스에게 있다고 한들 결재가 거기까지 올라가려면, 그것 역시도 세바스티안의 검토를 거쳐야 했다.
원래도 후계자 수업을 듣긴 했다.
그러나 펠릭스가 마물에게 부상을 입은 후 거동을 잘하지 못하게 된 시점부턴 대부분의 업무가 세바스티안에게로 넘어온 터였다.
거기다 가끔 열리는 경계의 토벌까지 도맡았다.
세바스티안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아무래도 연무장은 포기해야만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다시금 자세를 가다듬으려던 그때.
집무실 바깥에서 노크가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온 이는 밀로드였다.
“각하. 수도의 그림자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세바스티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따로 임무를 내린 기억이 없었다.
밀로드는 품속에 손을 넣어 쪽지를 하나 꺼냈다.
아무런 밀봉도 되어 있지 않은 종이는 전서구의 다리에 매여진 걸 바로 풀어내 가져온 것이었다.
세바스티안이 쪽지를 건네받으며 굳은 얼굴로 펴보았다.
아클리프 대공가에서만 사용하는 암호문으로 이루어진 쪽지였다.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붉은 눈동자의 움직임이 바빴다.
밀로드는 세바스티안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묵례만 남긴 채 조용히 집무실을 나갔다.
“후우.”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후작은 분명 아클리프 대공가에서 자신을 감시할 사람을 붙여 두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을 터다.
그런데도 이렇게 움직이다니.
그 말은 마음이 조급하거나, 혹은 다 상관없다고 여길 정도로 자신이 있다는 소리일 터였다.
그림자로부터 받는 모든 정보는 기밀.
그렇기에 세바스티안은 쪽지를 다 읽자마자 도로 접어 촛불에 불을 붙여 태워 버렸다.
세바스티안은 모서리부터 까맣게 타들어 가는 종이를 바라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불길은 갈수록 제 몸집을 키웠고, 그것을 담은 붉은 눈동자에 품은 불꽃 역시 점점 크게 타오르고 있었다.
* * *
세바스티안은 집무실을 나와 제 방으로 향했다.
어지간하면 일을 미루는 성정이 아니었지만, 그림자로부터 받은 보고에 머릿속이 복잡해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블랑체 후작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 끝에 에리카의 얼굴이 떠올랐다.
핏줄이라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소년의 마음속에서 조너선 블랑체와 에리카는 전혀 연관이 없는 사람으로 구분이 되고 있었다.
그가 걸음을 옮기면서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며칠째더라?’
에리카가 로렌과의 수업을 시작한 이후부터 쭉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간간이 얼굴을 마주할 수 있던 아침이나 저녁 식사도 같이하지 못한 지 제법 되었다는 걸 이제야 떠올렸다.
‘내일은 오랜만에 병아리 얼굴이나 한번 보러 가 볼까?’
세바스티안의 주먹에 힘이 실렸다.
얼마 전 에리카의 머리카락을 빗겨 준 일이 떠올랐다.
그때의 부드러웠던 그 감촉이 어째서인지 손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감각이 들었다.
‘잘 지내나.’
별일이야 없겠지만.
혹시라도 갑자기 하게 된 공부가 에리카에게 큰 스트레스와 부담감을 안겨 주진 않을는지 걱정이 되었다.
크게 아팠던 날 이후로, 에리카의 몽유병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방 밖으로 나오지만 않을 뿐, 방안에서만 빙빙 돌고 있을 수도 있긴 할 테지만…….
세바스티안은 바로 결심했다.
‘좋아. 상태라도 한 번 볼 겸.’
겸사겸사.
굳이 이유를 만들어 낸 세바스티안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생각들 하는 사이 어느덧 제 방이 위치한 층에 다다라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어둑한 복도 끝, 제 방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빙글빙글 돌고 있는 작은 인형(人形)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가 이내 다시 제 크기로 돌아갔다.
‘에리카?’
잠시 멈췄던 걸음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릿하고 힘 빠져 보이던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다리에 힘과 속도가 더해졌다.
단숨에 에리카의 앞까지 도착한 그가 소녀의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뭐 해, 병아리.”
평정을 가장한 목소리.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의 입술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딱 그때 뒤를 돌아선 터라 그가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에리카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 세바스티안 님.”
그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놀란 눈이 이내 곱게 휘어졌다.
세바스티안은 그 변화가 몹시도 마음에 들었다.
“이 시간까지 일하셨어요?”
“나야 뭐, 매일이 그렇지.”
“그러다 몸 상하신다구요.”
“네 몸이나 챙겨. 내가 너보다 더 건강해.”
“그거야 그렇겠지만…….”
그러다 말을 채 끝까지 잇지 못한 채, 짧은 기침을 하자 세바스티안의 미간이 삽시간에 좁아졌다.
이런 더운 계절에도 에리카의 기침병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일단 들어가. 왜 이렇게 얇게 입은 거야?”
“더운 걸요.”
“쯧.”
세바스티안이 못마땅함에 혀를 차며 서둘러 에리카를 제 방으로 넣었다.
에리카는 떠밀리듯 걸으며 그를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있잖아요. 아버지께 또 편지가 도착했어요.”
“아.”
에리카는 세바스티안의 도움을 받아 조너선 블랑체에게 첫 번째 답장을 보냈다.
그로부터 다시금 수도에서 연락이 왔다.
지금까지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것을 생각하자며 참으로 빠른 반응이었다.
소녀는 세바스티안에게 가져온 편지를 내밀었고, 그도 당연하다는 듯 받아서 열어 보았다.
[소식 잘 받았다.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워낙 몸이 허약해 잘 지내는 것 외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야무진 아이인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그리고 몸도 많이 나아진 듯하니 앞으로도 종종 안부를 주고받자꾸나.]
“이럴 줄 알았지.”
그의 입술에 싸늘한 웃음이 맺혔다.
본격적으로 제 어린 딸에게 간자 노릇을 시킬 모양인 듯 보였다.
“답장 또 보내.”
“또요?”
“그래. 종종 안부를 묻고 지내자잖아.”
세바스티안은 에리카더러 앉으라는 듯 의자를 빼 주었다.
에리카는 잠시 주저하다가 종종걸음으로 세바스티안이 빼 준 곳으로 갔다.
소녀는 가끔 이런 순간에 설레곤 했다.
세바스티안이 자신을 레이디 대우해 주는 찰나 같은 순간.
대부분 장난기가 섞여들어 있었지만, 그래도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 속절없이 설레고 말았다.
곧 소녀의 앞에 밋밋한 편지지 한 장과 잉크, 그리고 펜도 하나 놓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상하네?’
안부 인사부터 적어 내려가던 에리카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몇 달 전에 봉피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텐데.’
왜 후작님은 그녀를 대신할 사람을 보내지 않으시는 거지?
저를 믿어서?
‘그럴 리가.’
에리카의 입술에 비소가 맺혔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얼굴에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한번 자리를 잡은 그 감정은 좀처럼 물러가지 않았다.
만약 조너선 블랑체가 에리카를 믿었으면 소녀의 어머니를 볼모로 잡고, 소녀에게 정체 모를 구슬을 삼키게 만들었을까?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답은 ‘아니’였다.
‘그렇다면 대체 왜 날 감시하지 않는 거지?’
심각한 표정으로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던 에리카는 반사적으로 제 목을 만지작거렸다.
구슬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집중하자 괜히 목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크게 앓았던 날 이후, 피는 토하지 않았지만 잔기침은 몇 번인가 더 이어졌다.
그때마다 주위 사람들이 어찌나 걱정을 하는지…….
에리카는 알마 부인과 펠리스, 세바스티안과 조안나, 가르얀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몇 번은 숨어서 터져 나오는 기침을 삼키기도 했다.
‘그거야 어쨌든.’
처음에 아클리프 대공령에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봉피쥬를 대신할 새로운 감시자를 보내리라 생각했는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계속 이렇게 편지만 주고받을 생각인 건지…….
‘아니면 내게만 말을 하지 않았을 뿐, 후작님께선 이미 감시자를 이곳에 보내신 걸까?’
그런 생각에 이르자 에리카의 호흡이 절로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