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Fake Bride Who’ll Run Away Someday RAW novel - Chapter (8)
언젠가 도망칠 가짜 신부입니다 (8)화(8/91)
<8화>
에리카는 잔 안에 담겨 있던 액체의 수면이 조용히 찰랑거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각자 하나씩 들어 반을 드시고, 잔을 교환하여 남은 것을 다 마시셔야 합니다.”
합환주였다.
물론 세바스티안과 에리카, 두 사람이 아직 미성년이므로 술 대신 성수로 내용물을 대체한 터였다. 이는 이대로 의미가 있었다.
세바스티안이 먼저, 그리고 에리카가 뒤따라 손을 뻗어 잔을 나눠 들었다.
‘이걸 마시고 나면…… 수도를 떠나야 해.’
그걸 의식하고 나니 왠지 심장의 움직임이 둔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에리카는 노신관과 시선이 마주쳐 버렸다.
에리카가 망설이는 이유를 무엇으로 해석한 것인진 모르겠으나, 노신관은 마셔도 괜찮다는 듯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마치 그녀에게 용기를 주는 것만 같았다.
에리카는 잔을 든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마시자.’
그제야 비로소 결심이 섰다. 그녀는 잔을 제 얼굴 앞으로 가지고 왔고, 그 뒤 조심스럽게 성수를 머금었다.
내용물을 반쯤 비운 뒤 원래 자리로 내려놓자, 세바스티안이 기다렸다는 듯 에리카의 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숨에 내용물을 비웠다.
반면 에리카는 조금씩 머금어 삼키다가, 소년이 ‘탁’ 소리를 내며 빠르게 잔을 내려놓자 덩달아 빠르게 마셨다.
노신관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분 모두 잘하셨습니다. 이로써 이제 모든 예식이 끝났군요.”
세바스티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단호한 소년의 말에 노신관의 얼굴에 서운한 빛이 살짝 어렸다.
“오랜만에 만난 것인데 차 한잔 함께 나눌 시간조차 없는 게 아쉽군요.”
“양해해 주십시오. 워낙 경계의 상황이 좋지 않은 터라, 곧장 내려가 보아야 합니다.”
“이해합니다. 그저 늙은이가 섭섭함을 이기지 못하고 주책을 부린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대공자.”
허허, 소리 내어 웃은 뒤 노신관은 에리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귀한 옷을 입고 예쁘게 치장했지만, 잔뜩 긴장한 티를 도무지 숨길 수 없어 하는 소녀에게 아까부터 지나치게 마음이 쓰인 터였다.
‘아직 열 살밖에 되지 않았으니, 얼마나 무섭겠는가.’
그래서였다.
노신관이, 굳이 한마디를 더 붙여 버린 것은.
“잠시만.”
세바스티안을 따라 몸을 돌려세우려던 에리카가 멈췄다.
“네? 왜 그러세요, 신관님?”
세바스티안 역시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노신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잠깐 시간을 더 끌어도 되겠습니까? 어린 아가씨께 축복 하나를 내려드리고 싶습니다.”
“축……복이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에리카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대신관의 축복은 일반 평민들은 물론 그저 그런 작위를 가지고 있는 귀족들도 좀처럼 받기 힘든 귀한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축복은 황족들과 아클리프 대공가를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귀했다.
그만큼 특정 소수를 제외하고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축복을 정말로 내가 받아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옆에 있던 세바스티안이 넙죽 노신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배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
에리카가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세바스티안이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식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에리카도 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금의 세바스티안처럼 그저 고맙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하지만 제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신관이 푸근한 미소를 띤 채 다시 에리카에게 물음을 건네 왔다.
“괜찮습니까, 아가씨? 무엇이 걱정되어 망설이는 건지 이 늙은이에게 알려 주세요.”
“아, 저…… 그게.”
그런데도 에리카는 곧장 답하지 못하고 말꼬리를 늘이다가 남몰래 시선을 돌렸다.
봉피쥬의 눈치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역시나 하녀장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진짜인 에리카 블랑체 아가씨도 받지 못한 축복을 내가 받게 되었으니 기분이 좋지 않으신가 봐.’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했다. 자신이 졸라서 받게 된 것도 아니고, 순전히 저쪽의 호의에서 발생한 일인데.
‘하지도 않은 일로 눈치와 욕을 먹어야 한다니.’
엄마만 아니었더라면, 저런 눈빛을 받을 바엔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에리카가 입술을 꾹 다문 채 시선을 떨구며 서러움을 참았다.
한편 세바스티안은 에리카가 이상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고민할 게 뭐가 있지?”
대신관 중 한 명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직접 축복을 내려준다는 데 이렇게까지 소녀가 대답을 미루고 꺼려 하는 것이 쉬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노신관의 반응은 달랐다.
“아직 어리시니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에리카가 왜 망설이는지 이해한다는 듯 그가 한결 더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혹시 아플까 봐 무서운 것입니까?”
딱히 그런 건 아니었지만, 사정을 다 설명할 순 없으니 에리카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그래요.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지요. 성력을 받아들이는 느낌이 낯설다 보니 그걸 고통으로 느끼는 자들이 간혹 있으니까요.”
“…….”
“하지만 그 점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대공자?”
일전에 받아 본 적 있던 모양인지 세바스티안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성인이라면 모를까, 아이들은 신성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편이죠.”
“맞습니다. 깨끗한 영혼들이니 친화력이 좋을 수밖에요.”
세바스티안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대신했다. 그는 빨리 대신전을 떠나고 싶은 듯 보였다.
이곳에서 이 일로 시간을 더 끌어 봤자, 밉보일 것이 뻔하니, 에리카도 더는 망설이고만 있을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그래서 이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런데 대신관님. 이 결혼 생활이 아니라, 저에 대한 축복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 정도는 욕심을 내고 싶었다.
‘어차피 결혼 생활은…… 가짜니까.’
솔직한 말로 축복의 효능이 다 믿기진 않은 이유도 있었다.
에리카는 그저, 누군가로부터 ‘결국엔 다 잘될 거야’라는 따뜻한 응원의 한마디를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순간 노신관의 눈동자에 놀람의 빛이 스쳤다. 그러다 이내 허허,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특하기까지 하시군요.”
그는 이내 그렇게 해 주겠노라고 답하며 오른쪽 소매를 살짝 걷었다.
“자, 아가씨. 잠시 이마를 가까이 대어 주시겠습니까?”
에리카가 두 손을 꼭 모아 쥔 채 반 발자국을 내디뎠다.
시선을 살짝 내리니 노신관의 손이 망설임 없이 다가왔다.
“삶이란,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고,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번갈아 일어나지요. 때로는 자의만으론 도무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이 있기도 할 겁니다. 그런 순간들은 필시 아가씨를 많이 지치고 힘들게 하겠지요.”
에리카는 주신께 기도하듯 양손에 깍지를 낀 채 조용히 숨죽여 노신관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하지만 결국엔 웃길, 그렇게 비로소 행복해지길. 이 힘은 그대의 잠자고 있는 가능성을 일깨워, 언제든 그대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형태로 도울 겁니다.”
“아…….”
“그것이 바로 내가 그대에게 주는 축복입니다.”
노신관의 손끝이 닿은 이마에 화한 느낌이 들다가 이내 따뜻해졌다.
에리카는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가까이 서 있던 노신관은 어느새 두어 걸음 물러서 거리를 벌린 상태였다.
“괜찮지요?”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기분이 조금 따뜻하고 울렁거리는 것 빼고는.
“네,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에리카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노신관이 세바스티안을 돌아보았다.
“대공자께도 내려드릴까요?”
“전 괜찮습니다.”
단칼에 제안을 거절하자 노신관이 멋쩍게 웃었다.
“허허. 이 늙은이가 아무래도 시간을 많이 빼앗은 모양입니다.”
“그럼 이제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세바스티안이 공손하게 예를 갖춘 뒤 에리카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지.”
“네, 대공자님.”
이제 더는 붙잡을 수 없었다. 노신관은 고개를 끄덕인 뒤, 세바스티안과 에리카의 뒤를 쫓아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들이 짧은 예식을 치르는 동안 대공가의 기사들은 지친 말은 교체했고, 다시 떠날 준비를 마쳤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지?”
“바로 출발하셔도 괜찮습니다, 주군!”
후작가에서 에리카가 타고 온 마차에서 대공가의 마차로 짐을 옮기는 중이었다.
세바스티안이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인상은 찡그린 채였다.
“블랑체 후작가에서 가져온 짐은 저게 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