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Fake Bride Who’ll Run Away Someday RAW novel - Chapter (81)
언젠가 도망칠 가짜 신부입니다 (81)화(81/91)
<81화>
에리카가 긴 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소녀의 얼굴은 한층 동요가 가셔 더 단단하게 굳어진 터였다.
몸이 힘든 것과 별개로 정신은 비교적 또렷해졌다.
그래서 며칠 전 수도에 다녀온 샬럿이 했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 샬럿은 그녀의 아버지인 캘더 남작이 블랑체 후작을 수행하여 펠로즈 영지에 내려가게 되었다는 말을 했었다.
‘후작은 벌써 수도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아직도 그곳에 있을까?’
그곳에 얼마나 체류할는지, 정확한 일정을 물어봐야 했다.
그래야지만 제 편지를 어디로 보낼지 정확하게 결정할 수 있으리라.
에리카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두 손으로 가볍게 제 뺨을 몇 번이나 찰싹찰싹 두드리며, 에리카는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 * *
도도도도.
빠르게 제 옆을 스쳐 가는 소리에 짐을 잔뜩 든 사용인의 고개가 돌아갔다.
“어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용인이 결국 제 옆의 사람에게 물음을 건넸다.
“지금, 작은 마님 아니에요?”
덩달아 뒤를 훌쩍 바라보던 고참 하녀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그런데 실내에서 웬 보닛이죠?”
실로 이상한 차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때,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오던 마구간 지기 윌터 씨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곤 허허 웃으며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말을 보탰다.
“희한하게 이맘때의 아이들은 쓸데없는 고집을 하나씩 부리곤 하더군요.”
“어, 그래요?”
“우리 손주 놈도 뭔가에 단단히 꽂히면 그럽니다. 얼마 전까지는 돌 모으는 것에 빠져서 말이에요. 집에 돌이 얼마나 많이 쌓였는지 몰라요.”
윌터 씨가 말을 하다 말고 중간에 후후 웃었다.
아무래도 그때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그전에는 잎이 네 장인 클로버를 모으겠다고 들판을 쏘다녀 옷에 온통 풀물을 들여왔었지요. 아무튼 종종 바뀝니다. 아이의 세계를 뒤흔드는 물건은 무수히 많으니까요.”
하녀들은 재밌는 얘기를 들었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그럼 우리 작은 마님께도 그러한 때가 오신 모양이네요?”
윌터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한 하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낯서네요. 항상 의젓하셨잖아요.”
“그렇기야 합니다만, 이제 고작 열세 살 아닙니까.”
윌터 씨의 말에 새삼 에리카의 나이를 상기한 하녀들이 납득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 하긴요’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다 풋 웃었다.
“귀여우셔라.”
“보닛에 장식할 리본으로 꽃을 만들어 선물해 드릴까 봐요.”
에리카가 들으면 미안해할 이야기들을 나누며 세 사람은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녀가 걱정하는 것보다 실내에서 보닛을 착용하는 일은 훨씬, 별일이 아닌 것처럼 넘어가고 있었다.
* * *
세바스티안은 느지막이 눈을 떴다.
평소보다 늦은 기상이었다.
그 덕분인지 몸은 무척이나 개운했다.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은 세바스티안은 지난밤,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있던 체온이 사라졌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끼며 텅 빈 손을 말아쥐었다.
“그래. 갔겠지.”
간밤의 제가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굴었다는 것을 머리론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아쉬웠다.
때마침 바깥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들어오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호르헤가 들어왔다.
“오늘은 기상이 늦으셨군요.”
“시간이 얼마나 됐지?”
“점심때가 훌쩍 지나 벌써 해 질 녘입니다.”
“뭐라고?”
세바스티안이 적잖이 놀랐다.
자신이 그렇게나 오래 잤단 말인가?
어쩐지 지나치게 개운하더라니.
한나절이 사라진 셈이었다.
세바스티안이 습관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왜 깨우지 않고…….”
“그냥 주무시게 두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요. 어제, 무리하지 않으셨습니까.”
어두웠지만, 세바스티안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뻔히 짐작된다는 듯 호르헤가 말을 이었다.
“피로가 너무 많이 쌓이면 이럴 수도 있는 겁니다. 회복하기 위해서 몸이 잠을 택한 거니 이상하다 여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였구나, 하고 반성을 하셔야죠.”
“내가 잘못한 거 알아. 그러니 잔소리는 이제 그만해 주었으면 하는데.”
뚱한 세바스티안의 대답에 호르헤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래서요. 컨디션은 좀 어떠십니까?”
“나쁘지 않네.”
“뭐, 대공자님이야 언제나 그렇게 말씀하시니까요.”
그의 말을 믿지 않는 모양인지 호르헤가 가까이 다가와 세바스티안의 몸에 스스럼없이 손을 대었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세바스티안 역시 그에게 제 몸을 맡겼다.
“……?”
집중하던 호르헤의 손이 움찔거렸다.
아주 미세한 동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멈칫거림을 세바스티안도 느낀 모양이었다.
“왜 그러지?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그가 곧장 물음을 건넸다.
하지만 호르헤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호르헤 신관?”
세바스티안이 한 번 더 말을 걸자, 그제야 호르헤가 저도 모르게 멈췄던 숨을 뱉으며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잠시만……. 조금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호르헤가 짧게 대답했다.
그는 지금 신중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은밀하게 호흡을 고른 뒤 다시 눈을 감고 집중했다.
무언가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세바스티안 역시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입을 다물며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호르헤가 다시금 세바스티안에게 제 신성력을 불어넣으며 몸 곳곳을 샅샅이 살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세바스티안에게서 신성력을 거두어들인 호르헤가 그의 몸에서 손을 떼냈다.
“대공자님, 하고 계신 가리개 좀 벗어 보십시오.”
“……어째서?”
호르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청이 이상하다 여겨지면서도 뭔가 이유가 있겠지 싶었던 세바스티안은 이내 순순히 신관의 청에 따라 끈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호르헤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사락사락, 눈가리개 풀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가 어디론가로 걸음을 옮겼다.
“호르헤 신관. 가리개를 다 풀었는데.”
그의 걸음이 멈췄을 때, 세바스티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십니까?”
어딘지 모르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답하며 호르헤가 움켜쥔 것에 더욱 힘을 주며 당겼다.
* * *
아침에 향주머니를 만들겠다는 소리를 했기에, 조안나가 재료를 모아왔다.
에리카는 할 수 없이 다른 하녀들과 함께 반나절 가까이 향낭을 만들어야만 했다.
게다가 세바스티안에게 선물로 주겠다고 말한 만큼 대충 만들 순 없었던 지라 세심하게 공을 들여야 해서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하녀들과 바짝 붙어앉은 거리도 걱정됐다.
혹시라도 제가 쓰고 있는 보닛을 그녀들이 이상타 여기지는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려가 무색하게도 함께 포푸리를 만드는 하녀들은 에리카가 보닛을 쓰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다.
‘귀여워해 줘서 다행이야…….’
양심이 콕콕 찔렸지만, 무난하게 하루를 흘려보낸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포푸리 만들기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고, 그래서 저녁까지 먹고 난 뒤에야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그제야 자유시간이 생긴 에리카는 샬럿을 만나러 갈 짬이 생겼다.
애가 닳은 상태로 몇 번이나 정중하게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는데, 이상하게도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뭐지?’
그래서 에리카는 실례인 줄 알면서도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산책이라도 하러 나간 건가?’
에리카는 그녀의 행방을 묻고 다녀보았으나 사용인 중에서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글쎄요? 오늘은 못 뵈었어요.”
결국 에리카는 별 소득 없이 제 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목욕 시중을 들어주겠다는 조안나의 제안을 극구 사양하며 홀로 돌아온 에리카는 방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방문부터 단단히 걸어 잠갔다.
‘지친다…….’
절로 어깨가 축 늘어졌다.
소녀는 턱을 바짝 조이고 있던 끈을 풀고 조심스럽게 보닛을 벗었다.
그러자 온종일 모습을 감추었던 새하얗게 빛나는 은발이 드러났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는 에리카의 황금빛 눈동자가 음울했다.
나이답지 않은 무거운 한숨을 또 한 번 푹 내쉬며, 에리카는 욕실이 아닌 책상 앞에 앉았다.
쉴 시간이 없었다.
‘얼른 편지를 쓰자.’
조사에 따르면 식재료를 실은 짐마차가 들어오는 것은 바로 내일 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