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Fake Bride Who’ll Run Away Someday RAW novel - Chapter (89)
언젠가 도망칠 가짜 신부입니다 (89)화(89/91)
<89화>
마주치는 순간, 에리카의 시선이 피하듯 아래로 향했다.
가르얀의 미간이 잠시 꿈틀거렸으나, 그는 이내 평정을 되찾고 여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하실 일이 더 남으셨습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말끝을 흐리며 조금 더 침묵을 지켰던 에리카가 묵직한 숨을 뱉으며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간신히 답했다.
“이제 돌아가야지.”
소녀는 무척이나 어두운 표정으로 거듭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가르얀은 에리카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바로 다음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망설이시는군요.”
“…….”
허벅지 위에 얌전히 놓인, 소녀의 두 손이 손가락을 얽으며 꼼지락대기 시작했다.
가르얀이 지적한 게 맞았다.
“에리카 님. 오늘 외출에 대한 변명거리가 필요하신 거죠?”
잠시 주저하던 에리카가 이내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짐작하고 있는 대로야.”
그는 에리카가 발바닥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온종일 종종대는 걸 보았다.
무언갈 숨기려 하는 것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있었다.
에리카는 가르얀을 힐끔 훔쳐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은,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게 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마 함께 저택으로 돌아간 뒤, 가르얀은 펠릭스나 기사단장, 혹은 밀로드나 빈센트에게 오늘 제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 절대 말하지 않으리라.
그래서 에리카도 그 신의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지 않은 수준에선 진솔하게 답해 줄 생각이었다.
그 정도는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지만 가르얀은 그 질문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자리를 메우듯 내려앉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가르얀이 품을 뒤지더니 무엇인가를 꺼내 에리카를 향해 내밀었다.
“핑계는 제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에리카가 멀거니 바라보자, 가르얀이 주먹으로 쥐고 있던 것을 펴보았다.
“이걸 쓰십시오.”
그 순간 에리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건……!”
제게 건네진 걸 차마 받아들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에리카는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가 꺼낸 것은 마석 결정이었다.
화등잔만 해진 황금빛 눈동자가 서서히 가르얀의 얼굴로 들렸다.
도대체 뭐부터 물어야 할지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었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리던 에리카가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걸…… 가르얀이 어떻게 가지고 있어? 아, 아니. 그 전에……. 이게 뭔지 알아?”
그의 고개가 너무도 선뜻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야 뭐, 제가 직접 봤으니까요. 대공자님과 에리카 님이 그동안 그 소용돌이와 이상한 마물들을 없애려 몰래 외출하신 것도 사실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에리카의 얼굴에서 놀란 기색이 좀처럼 가실 줄 몰랐다.
사실 경계와 마물에 대해선 가르얀이 모르려야 모를 순 없는 노릇이다.
그가 피해 생존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르얀이 세바스티안과 에리카의 외출에 대해서도 짐작하고 있으리라곤 꿈에도 몰랐다.
일단 그는 에리카가 좀처럼 자신이 준 것을 가져갈 생각을 하지 않자 꺼낸 것을 테이블 위에 슬쩍 올려놓았다.
자신이 다시 가져갈 생각은 없다는 듯 말이다.
달칵, 하는 소리가 작게 들리고, 에리카의 시선이 다시 절로 그쪽으로 빼앗겼다.
에리카가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 사이, 가르얀은 묵묵히 소녀가 제게 했던 다른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이건 그날 제가 주웠던 것 중 하나입니다.”
“그 말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단 소리야?”
“그렇습니다.”
가르얀이 어깨를 으쓱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에리카가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아니, 사과받으려던 건 아닌데!”
“본의 아니게 에리카 님을 속인 꼴이 된 것 같아서요.”
에리카는 잠시 말을 골랐다.
사실 이해하자면 못할 것도 없었다.
로렌에게 앙헬리카 제국에 대한 수업도 배우게 되면서 가르얀의 출신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민족들이 이 땅에서 얼마나 살아남기 힘든지 또한.
아클리프 대공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곤 하나, 십수 년을 배척당했던 가르얀으로선 단박에 마음의 문을 열기 힘들었을 테고 무언가 하나 무기가 될 만한 걸 쥐고 있고 싶었을 수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에리카의 짐작이 맞다는 듯 이어지는 가르얀의 말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혹시 몰라서요. 그냥 언젠가 쓸 일이 있을까 해서 가지고 있어 봤습니다만, 딱히 쓸모는 없더라고요.”
가르얀이 일부러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렇게 에리카 님께 도움이 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선 마석 결정을 손끝으로 다시 짚고는 슥- 에리카 쪽으로 밀었다.
소녀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런 뒤 결심했다는 듯 가르얀이 준 마석 결정을 집었다.
‘이거라면, 내 진짜 의도가 가려질 거야.’
또 거짓말을 하나 덮어씌우게 되는 셈이 되는 터라 마음이 몹시도 무거웠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정말 고마워. 오늘 도움만 받네.”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에리카 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정말이지 더없는 기쁨입니다.”
가르얀이 회색 눈동자가 햇빛을 받은 아침 이슬처럼 반짝였다.
* * *
조너선 블랑체는 다시 암굴로 내려와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캘더 남작과 샬럿이 사지를 늘어트린 채 허망하게 뒹구는 중이었는데, 열린 동공 어디에도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썩 마음에 차는 재료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달할 수고는 덜었으니 납기일은 맞추겠군.”
그가 거슬린다는 듯 구두코로 툭 남작의 어깨를 치자 큰 몸이 너무도 맥없이 쓰러졌다.
피 냄새를 맡은 마물들은 이미 철장 안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시끄럽게 굴지 마라. 네놈들 먹이가 아니니까.”
짜증스레 내뱉은 조너선 블랑체가 품을 뒤적거렸다.
곧 그가 호박색 마석 결정을 두 개 꺼냈다.
그는 손수 허리를 굽혀 하나는 캘더 남작의 입에, 그리고 하나는 샬럿의 입에 넣고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황실도, 아클리프 대공가도 모른다.
경계가 닫히고 난 뒤 남는 이 ‘마석 결정’이 사람의 몸을 양분 삼아 마물을 자라게 한다는 것을.
그리고 조너선 블랑체는 이 과정을 배양 작업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로 연이 닿은 신성국의 이단 심문관이 아니었다면, 그 역시 이러한 사실을 영영 몰랐으리라.
“고결한 척은 저들이 다 하면서, 추잡스러운 짓도 마다하지 않는 종자들 같으니라고.”
조너선 블랑체가 거칠게 혀를 찼다.
신성국의 이단 심문관들은 지위로 보자면 대신관보다 아래였지만, 그 특수성을 고려해 독립적인 기관으로 그 지위를 인정받고 있었다.
하여 대신관들이 모르는 일도 비밀리에 많이 하고 있었고, 몇몇 경우는 제대로 보고도 하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마석 결정 연구’와 심판을 통한 ‘참회’였다.
심판은 신성국의 가르침을 등지고 떠나려 한 배신자들에게 치죄를 하는 일이었다.
과거에는 형벌을 내린 모양이었으나 현재는 다른 식으로 참회시키는 것 같았다.
바로 마석 결정 연구에 억지로 참여시키는 일이었다.
‘이단 심문관들 쪽에서 날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지.’
심문관들은 꾸준한 후원을 원했으며, 거부로 소문난 블랑체 후작에게 비밀리에 접선했다.
연구비를 후원하는 대가로 넘겨받은 대가가 바로 마석 결정 연구에 대한 것이었다.
마물은 참으로 쓸모가 많았다.
그들은 신체 능력과 공격력이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나 병기로 쓸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피와 살을 섭취했을 때 현재 의술과 약으로는 고칠 수 없는 불치병도 한시적으로 낫게 할 수 있었다.
뭐, 중독과 환각이라는 약간의 부작용은 감수해야 했지만 말이다.
죽은 저 계집 역시 말을 더듬었지만, 마물의 고기를 먹고 싹 고쳤다.
‘덕분에 새로운 사업을 개척할 수 있었지.’
조너선 블랑체는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손수건으로 손가락을 슥슥 닦으며 시신들로부터 뒤돌아섰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강한 빛이 터져 나왔다.
조너선 블랑체가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봤다.
“뭐야, 저 계집……!”
그의 미간이 강하게 찌푸려지며 욕설이 튀어나왔다.
“설마, 축복을 받은 적 있었나? 아니면 신성력에 닿기라도 한 거야?”
뭐가 됐든 낭패였다.
조너선 블랑체가 혀를 차며 샬럿의 시신으로 다가가려 했다.
지금이라도 입에서 마석 결정을 빼내려 했지만, 상황은 이미 늦어 버린 모양이었다.
마석 결정은 샬럿의 몸에 뿌리를 내리고 발아할 준비를 마쳤다.
곧 그녀의 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고, 괴기스러운 거품 같은 것이 들끓기 시작했다.
“크윽……! 빌어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