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Fake Bride Who’ll Run Away Someday RAW novel - Chapter (9)
언젠가 도망칠 가짜 신부입니다 (9)화(9/91)
<9화>
“그렇습니다.”
뒤따라 나온 하녀장인 봉피쥬가 공손한 척 대답했다.
“단출하군.”
고작 가방 두 개라니.
귀족 영애가 먼 길을 떠나는 것인데, 어딘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굳이 관심을 두고 싶지는 않았다.
왜 이렇게 짐이 없냐고 한마디를 던졌다가, 쇼핑할 시간까지 만들어 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뭐, 시간은 많이 잡아먹지 않으니 좋군.’
그때였다.
봉피쥬가 세바스티안이 따로 하문하지도 않았건만, 잠시 시간을 두고 뜸을 들이다가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저도, 함께 대공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무척이나 긴장한 목소리였다.
“불허한다.”
하지만 이미 단단히 미운털이 찍힌 모양인지, 세바스티안은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단칼에 잘라 말았다.
“대공자님!”
세바스티안의 차가운 목소리는 절로 살을 떨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블랑체 후작으로부터 에리카에 대한 감시를 명받은 봉피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소녀를 따라가야만 했기에 목소리를 높여 항변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따라가야만 해!’
이대로 후작가에 돌아가 봤자, 제 능력이 쓸모없다는 걸 증명하는 꼴밖에 되지 않으니, 잘리기밖에 더하겠는가.
봉피쥬는 이 일에 사활을 걸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아가씨 혼자 보낼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당하시면…….”
그러나 봉피쥬는 말을 끝낼 수 없었다.
세바스티안이 서늘하기 그지없는 눈빛이 그녀를 향하며 붉은 안광을 빛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소년이 느릿하게, 그러나 온기 따윈 조금도 느낄 수 없는 서늘한 목소리를 입 밖에 꺼냈다.
“아클리프 대공가가, 이 조그만 어린 여자아이에게 무슨 짓을 할 거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들리는군.”
공기가 일순간 바뀌었다.
세바스티안을 따라온 아클리프 대공가의 기사들도,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나온 신전의 사람들도 한마음 한뜻으로 표정을 굳혔다.
이중 오직 한 사람만이 느긋하게 굴 뿐이었다.
바로 세바스티안.
생각할수록 웃긴다는 듯 그의 입술 끝을 비틀었다.
“그건 블랑체 후작의 뜻인가?”
“그, 그게 아니오라…….”
하지만 봉피쥬는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따라갈 허락을 얻어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 또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샘솟은 굵은 식은땀만이 그녀의 광대를 따라 흐르다가 툭, 떨어졌다.
노신관이 끼어들었다.
“대공자.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우선은 진정을…….”
“신관님. 저는 지금 침착합니다. 더할 나위 없이 머리가 차갑게 식어서 말입니다.”
세바스티안은 노신관을 향해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명백히 선을 긋는 태도에 노신관도 차마 더는 입을 열어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아클리프 대공가가 모욕을 당한 것은 분명했고, 따라서 세바스티안은 이 일에 정당하게 분노할 권리를 가졌다.
그런데 여기서 자신이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세바스티안을 더 말리게 된다면, 신전이 중립인 것을 포기하고 블랑체 후작가의 편을 드는 것으로 비칠 공산이 크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허어…….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네.”
노신관은 입을 다물었고, 세바스티안의 시선은 다시 봉피쥬에게로 향했다.
중재해 주리라 믿었던 노신관이 한발 물러서자 봉피쥬의 얼굴이 파랗다 못해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세바스티안이 조용히, 그러나 포악한 기세를 숨기지 않고 되물었다.
“대답해 봐. 정말 그게 블랑체 후작의 진심인가?”
봉피쥬가 연신 고개를 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 대공자님.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저벅.
세바스티안이 그녀를 향해 한 걸음 크게 내디뎠다.
겁에 질린 봉피쥬는 주춤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으나, 어떻게 된 건지 거리를 벌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세바스티안이 눈은 웃지 않은 채, 입술만 끌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 말을 도대체 내가 어떻게 믿어야 하는 거지?”
“대, 대공자님.”
“자네의 주인이라는 자가, 부리는 이 앞에서 얼마나 경망되게 입을 놀렸으면, 네까짓 게 이렇게 무의식중에 무례한 말을 내뱉는단 말인가?”
세바스티안의 서늘한 분노가 맹렬히 불타올라, 주위를 압도했다.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고,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는 아클리프 대공가의 사람들은 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노신관은 적잖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이미 자신이 주례와 증인을 선 혼례 의식을 모두 마친 터였다.
하지만 지금 봉피쥬가 한 발언으로 이 모든 것을 무를 수 있는 상황에 처해 버렸다.
상황의 심각을 에리카도 알았다.
‘아, 안 돼.’
소녀는 숨을 멈추고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몇 번이나 제게 행동거지를 조심하라고 당부하던 봉피쥬가 왜 자꾸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인지.
어리고 여린 마음에도 자꾸만 원망이 샘물 솟듯 솟아났다.
하지만 원망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이 결혼이 파투나면 안 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소녀가 숨을 죽였다. 최악의 상황들이 물에 풀린 잉크처럼 머릿속으로 번져 나갔다.
‘죽는 건 결국 나야. 엄마도 안전해질 수 없어.’
엄마.
에리카는 줄리아를 떠올렸다.
제 작은 몸을 힘껏 끌어안아 주던 그녀의 따뜻한 품과 따스한 미소를 기억해내자, 사시나무 떨듯 떨리던 몸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 몸속 어디 깊은 곳에서부터 용기가 샘솟는 기분이 들었다.
에리카는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이로 콱 물고는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제법 그 소리가 컸던 터라 모두의 시선이 봉피쥬에게서 에리카 쪽으로 단번에 옮겨 왔다.
“아, 아가씨!”
당황한 노신관이 목소리를 높였고, 세바스티안 역시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언짢은 음성으로 물었다.
다들 에리카의 행동을 예상치 못한 것 같았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누군가가 저를 향해 외치는 게 들려왔다.
‘아마도 신전 쪽 사람이겠지.’
하지만 귀족 영애에게 차마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는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뒤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아아. 귀한 아가씨께서 무릎을!”
누군가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그렇게 탄식하는 게 들려왔다.
‘이까짓 건 아무렇지도 않아.’
물론 후작 영애가 이렇게 함부로 무릎을 꿇는 건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에리카는 지금 이 행동 말곤 세바스티안의 화를 누그러트릴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차피 무릎을 꿇는 건 한 두 번 해 본 게 아니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세바스티안이 화를 풀어 준다면 오히려 고마울 정도였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제 행동이 세바스티안의 주의를 사긴 한 모양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언짢은 기색이 어린, 소년의 서늘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잘할 수 있어. 힘내자.’
스스로를 도닥이며 입안에 고인 침을 꼴깍 삼킨 뒤, 에리카가 입을 열었다.
“대공자님께서 노여우신 것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염소의 울음소리처럼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리면 어떡하지, 괜히 비웃음만 사게 되는 꼴 아닌가 우려했던 것과 달리 에리카의 목소리는 괜찮았다.
“봉피쥬를 대신 제가 대신 답을 드리고 싶어요.”
“……네게 물은 일이 아닌데.”
“알지만…… 그래도 말씀드리고 싶어요.”
에리카가 금세 메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속삭이는 것처럼 작았지만 강단이 느껴졌다.
이곳에 모인 모두가 제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생각에 다시금 긴장이 찾아왔지만, 소녀는 주눅 들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나설 수밖에 없었어요.”
“오해?”
“네. 아버지의 뜻이 결코 아니에요. 봉피쥬의 뜻도 아니구요.”
흐음.
낮게 흘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리카는 기민하게, 세바스티안이 제가 던진 말을 물었다고 생각했다.
하여 다음 말은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이었다.
“제가……!”
입안의 여린 볼살을 한번 콱 깨문 뒤 에리카는 토해내듯 말했다.
“제가 낯선 곳에 혼자 가는 게 무서워서……. 그래서 봉피쥬에게 함께 가 달라고 떼를 썼어요.”
말끝을 늘이며, 에리카의 시선이 잠시 하녀장에게로 가 닿았다.
블랑체 후작의 감시역.
사실 없는 게 훨씬 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리카는 지금 당장은 그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봉피쥬 님을 떼어낸다고 해도 후작님은 새로운 사람을 보낼 거야.’
말아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해.’
에리카는, 봉피쥬를 거역할 수 없다.
하지만 봉피쥬가 저를 아는 만큼, 소녀 역시 봉피쥬를 알았다.
아는 것은 곧 무기라고 했었다.
어차피 감시를 당할 거라면 아예 모르는 사람보다는 봉피쥬처럼 어느 정도 속이 읽히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이 나았다.
‘그래야 나도 조금이나마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