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Fake Bride Who’ll Run Away Someday RAW novel - Chapter (90)
언젠가 도망칠 가짜 신부입니다 (90)화(90/91)
<90화>
빛은 갈수록 세기가 더 강해졌고 종국에는 눈을 제대로 뜨고 있는 것이 힘들 정도가 되었다.
결국 조너선 블랑체는 팔을 들어오려 제 눈썹께에 가져다 대었다.
간신히 그늘을 만들어내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을 보기는 힘들었다.
“젠장,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캘더 남작의 형편을 생각하자면, 축복을 받았을 리 없다.
어디 그뿐인가? 대신관들의 콧대는 정말 높아서 아무리 돈을 싸서 들고 가 바쳐도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한미한 귀족이 축복을 받는 일은 평생이 아니라 몇 대에 걸쳐도 받기 힘들었다.
그렇다는 말은 결국, 샬럿이 최근에 신관을 만난 적이 있다는 소리였다.
‘저 정도라면 중급 사제 이상이다. 꽤 오래 붙어 있었어.’
마석 결정은 게걸스럽게 신성력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이단 심문관들이 넘겨준 연구 기록에 따르면 희한하게도 마석 결정은 제게 바쳐지는 제물 중 신관을 가장 좋아했다.
하여 평범한 사람들의 몸에서 일반적으로 마물들이 서너 마리가 자란다면, 하급 사제의 몸에선 그의 두 배가, 중급 사제에게선 세 배 이상이 태어났다.
그 이상은 실험해 볼 수가 없었던 듯 기록이 없었다.
경계가 열리며 마물이 나타나기 시작한 게 몇 년 되지 않은 데다 배신자 수도 적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석 결정은 대부분 아클리프 대공령에 보관되어 있었다.
후작이 알기로 본래대로라면 연구 목적으로 황실과 신성국에 꼬박꼬박 일정량을 보냈어야 했건만 최근의 아클리프 대공가는 그러지 않고 있었다.
그 탓에 조너선 블랑체의 암시장 역시 마물 배양을 하기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계속 눈치가 보였었지.’
암암리에 마물을 찾는 고객은 늘어나는데 공급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희소하여 몸값이 뛰는 거야 좋았지만 문제는 마물 고기와 부속품이 섭취하면 할수록 중독을 일으킨다는 점이었다.
이미 중독된 고객들의 성격은 손쓸 수 없이 포악해졌고, 정도를 모르는 수준으로 진화했다. 마치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처럼 말이다.
조너선은 조련사처럼 고객을 다루었다.
우선 비축해 두었던 것을 적게나마 배분하는 것으로 그들의 분노가 폭발하지 않게끔 억눌렀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동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초조함에 조너선 블랑체도 신관들을 제물로 삼아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마물을 얻을 수 있는 양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로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건 죄수나 일반인들이 사라지는 것에 비해 그 문제의 경중이 현격히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단 심문관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상당히 위험했다.
이단 심문관들은 저들 역시 신적에 이름을 올리긴 올린 사람이라고 신성국에 대한 소속감과 애착이 남달랐다.
배신자들에 대한 실험이야 애초에 그들이 먼저 ‘배신’을 했기 때문에 치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므로 큰 죄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 죄 없는 일반 사제들을 건드리는 것은 교권에 대한 도전 혹은 박해라고 생각해 도리어 블랑체 후작을 위험에 빠트릴 가능성이 컸다.
‘자신이 하면 정의이고 남이 하면 박해라 이거지. 하여간에 어이가 없는 놈들 같으니. 처음부터 상종을 말았어야 하는 건데, 퉤!’
조너선 블랑체는 샬럿의 몸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대체 누굴 만난 거야!”
그러다 결국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또 한 번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가 파악하기로, 샬럿은 내내 아클리프 대공령에 있었다.
‘혹시 누가 다치기라도 한 건가?’
저렇게 큰 힘을 발휘할 정도라면 분명 고위급 신관이 움직였다는 걸 테다.
후작이 머릿속으로 빠르게 후보를 추렸다. 펠릭스, 세바스티안 혹은 로렌이나 유모의 딸.
유모의 딸은 제게 도움을 요청하는 소식을 보냈으니 제외.
‘잠깐. 그런데 왜 그러한 소식은 편지에 함께 알리지 않은 거지?’
으득 이가 갈렸다.
‘약아빠진 계집 같으니라고.’
이쪽에서 제 엄마라는 목줄을 쥐고 있으니 납작 엎드린 줄로만 알았는데 순전히 저 좋을 대로만 굴고 있던 모양이었다.
후작의 분노가 낙엽처럼 켜켜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빛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있었다.
물론 새끼 마물의 수도 늘어나고 있었다.
끼끽, 끼기긱. 끼끼긱.
바로 밑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제야 조너선 블랑체가 샬럿에게서 시선을 떼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 이게 뭐야!”
빛에 정신이 팔려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샬럿에게서 태어난 마물들이 어느새 바닥을 틈 없이 메워 자신이 서 있는 곳까지 기어 오고 있었다.
크기는 아직 작았고 종류도 제각기 달랐지만, 그 수만큼은 감히 셀 수조차 없었다.
조너선 블랑체는 자신도 모르게 호흡을 멈췄다. 그는 비정상적으로 태어난 이 마물 새끼들이 얼마나 빠르게 성장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이, 이, 이건 폭주다.’
심각함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건 제힘으로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끼끽, 끼끽.
새끼 마물들이 그의 다리를 타고 오르려는 모양이었다.
그가 기겁하며 다리를 힘차게 털었다.
“아, 안 돼.”
이건 안된다.
더는 여기 있으면 안 된다.
제 목숨이 위험한 일이었다.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던 블랑체 후작은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등 뒤로 문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서늘한 등골에 식은땀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리는 그 감각에 소스라쳤다.
그리고 그 순간, 그가 이를 악문 채 등을 돌리곤 미친 듯이 빠르게 계단을 몇 개씩 밟아 지상으로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런 데서 개죽음을 당할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샬럿의 몸에선 계속 마물이 솟구쳐 태어나고 있었다.
* * *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며, 오늘따라 유독 푸르고 높았던 하늘 역시 분홍빛과 오렌지빛으로 서서히 물들기 시작했다.
에리카의 방 발코니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있던 세바스티안의 그림자도 어느새 그의 본래 키보다 길어졌다.
에리카의 가출, 아니 외출은 대공저의 사람들 중에서도 아주 극소수만 아는 비밀이 되었다.
따라서 펠릭스 역시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오늘치 일과를 살펴봐야지만 했다.
대충 급한 일만 해결한 뒤 지팡이를 짚고 다시 올라온 그는 아침과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제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이미 신관 호르헤로부터 몇 번이나 세바스티안의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아, 펠릭스는 제 아들에게서 확인을 받고 싶었다.
“세바스티안.”
펠릭스가 무거운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분명 자신이 들어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도 꼼짝도 하지 않던 아들의 붉은 눈동자가 그제야 움직였다.
펠릭스는 온종일 내내 묻고 싶던 것을 이제야 비로소 입에 담았다.
“너, 정말 괜찮은 게냐.”
목적어가 생략된 질문이었으나 무엇을 염려하는 건지 알아듣기엔 충분했다.
“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세바스티안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펠릭스의 시선이 제게서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자, 그가 잠시 입안에서 말을 골랐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땐, 조금 더 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걱정하지 마시라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진짭니다. 빛을 보아도 고통스럽지 않고 피곤하지도 않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말짱합니다.”
보고하듯 덤덤하게 말을 마친 세바스티안이 다시 보고 있던 풍경으로 시선을 던졌다.
뭐랄까. 제 아들은 지금 때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아침에 펠릭스와 약속했던, 해가 지는 그 순간만을.
누구보다도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펠릭스만큼은 알았다.
제 아들의 속이 지금 얼마나 끓고 있는 모양인지.
만약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한 저와의 약속이 아니었다면 당장 찾으러 가고도 남았으리라.
‘뭐라 더 말을 걸어도 귀에 들어오지도 않겠군.’
펠릭스가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그래. 그렇군. 네가 괜찮다고 하니, 다행이구나.”
“여러모로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누구보다도 네가 제일 힘들었겠지.”
펠릭스가 여러 말을 생략한 채 세바스티안의 어깨를 툭툭 가볍게 두드리고 돌아섰다.
‘여름이 가긴 가는 모양이군.’
짧은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그새 하늘빛이 더 어둑해졌다.
펠릭스의 시선이 의자 팔걸이를 움켜쥐고 있는 세바스티안의 손등에 가 닿았다.
굵은 핏줄이 한껏 도드라져있었다.
아무래도 곧 세바스티안이 일어설 듯싶었다.
자신은 미리 아래로 내려가서 군마와 더불어 세바스티안과 함께 에리카를 수색할 입 무거운 기사들을 준비시켜놓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끼익-!
무척이나 듣기 싫은 소리가 크게 귀를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