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Fake Bride Who’ll Run Away Someday RAW novel - Chapter (91)
언젠가 도망칠 가짜 신부입니다 (91)화(91/91)
<91화>
뒤이어 콰당! 의자가 뒤로 나뒹굴었다.
‘뭐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 펠릭스가 대체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금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한데 그것보다, 세바스티안이 그를 지나쳐 에리카의 방을 빠져나가는 것이 더 빨랐다.
“세바스티안?”
좀처럼 당황하는 법이 없는 펠릭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멈추어 서지 않았고, 벌써 저만치 멀어졌다.
“허?”
기가 막혀 절로 헛바람이 입술을 가르고 튀어나왔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구겼다.
“저 녀석이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그러다 얼핏 스치듯 보았던 아들의 표정을 떠올렸다.
분명 눈매가 좁아졌었고, 미간에 옅은 세로줄이 패어 있었다.
세바스티안이 지금 그런 얼굴을 할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설마?!”
덩달아 마음이 급해진 펠릭스가 지팡이를 저만치 앞에 짚으며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 * *
세바스티안은 빠른 속도로 1층 현관에 내려왔다.
멀리서 나부끼던 붉은 물결은, 분명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시력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대공저의 연철문을 통과해서 들어오는 건 분명 에리카였다.
그리고 그녀의 옆을, 이민족 견습 기사가 당당히 지키고 서 있었다.
세바스티안이 입안의 살을 강하게 물었다. 눈매도 저절로 찌푸려졌다.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 함께 있었군.’
에리카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것과 동시에 기사단장으로부터 가르얀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가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세바스티안의 입매가 비틀렸고, 그 사이로 사늘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직은 거리가 멀기 때문인지 에리카는 세바스티안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가르얀에게 말을 걸었고, 견습 기사는 짤막하게 대답을 해 주는 모습이 계속 눈에 거슬리듯 보였다.
그는 잠자코 기다렸다.
곧 두 사람이 현관으로 오르는 계단 쪽으로 다가왔다.
에리카는 아무래도 혼날 것이 걱정되는 모양인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동 중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세바스티안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결국 세바스티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와?”
나직하게 건넨 물음에 계단을 오르던 소녀의 움직임이 멈췄다.
“……세바스티안 님?”
믿을 수 없다는 듯 에리카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다 이내 크게 흔들렸다. 어떻게 그가 이곳에 나와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세바스티안이 뭐라 입을 더 열려고 하려던 그때, 에리카가 치마를 양쪽으로 잡고 도도도도 남은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그런 뒤 세바스티안의 앞에 서서 토끼처럼 깡충깡충 제자리에서 뛰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그 행동을 세바스티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내려다보았다.
“지금 뭐 해?”
“뭐 하시는 거예요! 어서 눈감으세요!”
에리카가 나름대로 절박하게 외쳤다.
소녀는 두 손으로 서둘러 세바스티안의 눈을 가리려 했다.
“어쩌시려고 이러세요! 아직 몸도 성치 않은 분이!”
“아.”
세바스티안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탄성이 흘렀다.
얜 아직 모르지.
아무리 뛰어도 자신이 숙여 주지 않으면 절대 눈까지 손이 닿지 않을 텐데도 에리카는 굴하지 않고 뛰고 있었다.
자신이 잘못한 게 있으면서도 그것보단 세바스티안에 상태에 대한 걱정이 앞서 목소리가 높아지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기꺼워 화가 났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래서 세바스티안은 조금 풀린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작은 아내가 제 속을 썩게 했다고 저 역시 똑같이 굴고 싶진 않았다.
“보여.”
“……네?”
“보인다고.”
그 순간 에리카의 행동이 멈췄다.
소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조금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안 아프세요?”
세바스티안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아프고, 잘 보여. 신관도 괜찮다고 확인해 줬고.”
그런 뒤 세바스틴안은 마치 벌을 서고 있는 것처럼 여전히 위로 쭉 뻗은 상태로 굳은 에리카의 두 손을 가볍게 하나로 모아쥐었다.
그의 손이 워낙 큰지라 가능한 일이었다.
세바스티안이 살짝 힘을 주어 내리자 별다른 저항 없이 에리카의 팔이 따라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걱정이 가득한 소녀의 두 눈은 세바스티안의 붉은 눈동자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세바스티안이 혀를 가볍게 차며 말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옆을 지키고 있었어야지.”
살짝 핀잔을 주는 말인지라, 그제야 에리카는 제가 지금 어떤 처지인지 상기했다.
“……죄송해요.”
세바스티안의 손 안에서 에리카가 꼼지락거렸다.
그는 에리카가 조금 더 편하게 있을 수 있도록 손을 고쳐 쥐었다. 하지만 놓아주지는 않았다.
그렇게 맞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에 가르얀의 눈길이 가닿았다. 진득한 시선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세바스티안의 마음이 괜히 더 비뚤어졌다.
그는 의식적으로 가르얀을 무시하며 에리카에게 물었다.
“어딜 갔다 온 거지?”
그때. 딱, 딱, 딱. 바닥을 짚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나도 궁금하구나.”
부지런히 세바스티안을 뒤쫓아온 펠릭스가 제 아들을 거들 듯 말을 보탰다.
에리카가 서둘러 펠릭스를 향해 돌아섰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세바스티안에게 잡힌 손이 빠져나왔다.
왠지 모를 진한 아쉬움을 느끼며 세바스티안의 눈이 에리카를 쫓았다.
소녀는 두 손을 포개어 모으며 펠릭스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 아버님. 말씀도 드리지 않고 정말 죄송합니다…….”
뚫린 공간인지라 차마 목소리를 높일 수는 없었기에 펠릭스는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딜 다녀왔느냐.”
“저, 그게…….”
에리카가 마른침을 꼴깍 삼킨 뒤 가르얀이 서 있는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세바스티안의 눈매가 다시 찌푸려졌다.
“겨, 경계가 느껴져서…….”
“……뭐?”
에리카가 주머니 가방 속으로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꺼냈다.
마을에서 가르얀으로부터 건네받았던 작은 마석 결정을 손바닥에 올려놓아 보여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착했을 땐 이미 경계가 닫혀 있었어요.”
소녀의 손바닥에 올려진 마석 결정을 집어 든 세바스티안이 재차 질문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토벌대를 데리고 가지 않은 거지?”
세바스티안이 차가운 목소리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가르얀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저 녀석은 토벌대도 아니지 않나?”
에리카가 마른 입술을 혀로 훑었다.
“가르얀은…… 토벌대원은 아니지만, 경계와 마물을 직접 본 사람이잖아요.”
에리카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가르얀을 위해서라도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심장이 자꾸만 따끔거렸다.
“죄송해요. 너무 경황이…… 없었어요. 빨리 가 봐야 한다는 생각에……. 마침 마주친 게, 새벽 훈련을 나와 있던 가르얀 뿐이었고…….”
“…….”
사실 말이 되지 않았다.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런 거라면 창문이 아니라 현관으로 당당히 나가도 되는 일이었으니까.
세바스티안이 그 부분에 대해서 물으려고 할 때였다.
“말씀 중에 실례합니다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직하게 끼어들었다.
모두의 대화가 일시에 끊기며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에리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공자비님. 잠깐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호르헤였다.
언제나 다정하게 웃고 있던 그가, 생전 처음 보는 딱딱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저, 말씀이세요?”
“예. 긴 외출로 피곤하시겠지만 지금 꼭 시간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태도였다.
에리카가 세바스티안과 펠릭스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호르헤에게서 뭔가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모양이었다.
부자는 짧게 눈빛을 주고받더니 이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가 봐라.”
“그래.”
이제 막 돌아온 아이를 이렇게 계속 현관에 세워 두고 할 얘기도 아니란 생각이 뒤늦게 들기도 한 터였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리카가 눈치를 살피며 주저하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소녀가 호르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 * *
호르헤는 자신이 묵고 있는 방으로 에리카를 데리고 왔다.
차 한잔을 내어준 호르헤는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은 불편한 기분으로 그의 앞에 앉아 있던 에리카는 눈알만 굴린 채 그의 방을 구경했다.
손님방이긴 했으나, 호르헤가 묵은지 상당히 시간이 흐른 까닭인지 이젠 제법 그의 취향이나 분위기 같은 게 많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에리카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바로 신성국에서 따로 챙겨온 것으로 보이는 여신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