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Max-Level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16)
만렙 회귀자입니다만-116화(115/300)
제 116화
“시간이야 많죠.”
나도 웃으며 그의 잔을 받았다.
“와, 일라이저가 신화 씨에게 관심이 많은가 본데?”
“아까 나는 얘기 좀 해 보려고 했더니 인사만 가볍게 하고 그냥 지나가던데.”
“야, 너랑 신화 씨는 격이 다르잖아, 격이.”
일라이저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는 사실에 다들 놀란 듯했다.
같은 각성자 신분이지만, 일라이저의 명성이나 유명세만 놓고 보면 거의 ‘연예인’과도 같기 때문이다.
가까이하기는 너무 먼 유명인이 직접 내게 말을 거니, 부러워하는 시선을 보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양화 길드에서의 공식적인 각성자 생활은 어떻습니까?”
일라이저가 운을 떼며, 연회장 외곽 쪽으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멀찍이서 지켜보던 진보미가 종종걸음으로 우리에게 따라붙었다.
아마도 내가 일라이저와의 대화에서 당황하거나 실수를 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일라이저는 진보미가 가까이 오자, 미리 손을 뻗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강신화 씨와 단둘이 나누고 싶은 대화가 있어서 말입니다. 호의는 감사하게 마음으로만 받겠습니다.”
“아……. 죄송해요.”
진보미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나는 눈짓으로 그녀에게 괜찮다는 시그널을 보냈다.
가끔 진보미를 보면 나를 챙겨 줘야만 하는 ‘남동생’으로 취급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마치 엄마 같다고 할까?
물론 그런 관심이 싫지는 않지만, 가끔 황당할 때도 있었다.
우웅- 우웅-.
반지는 계속 반응하고 있었다.
당사자가 바로 옆에 있어서 그런지, 이제는 손가락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적응하는 것이 참 힘들죠?”
일라이저가 넌지시 속내를 떠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치열한 경쟁과 노력의 연속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복잡한 세계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재밌는 각성자의 세계이기도 하죠.”
“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일단 확실한 공감대가 있군요.”
소개팅 하는 것도 아니고, 공감대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니 속으로 구역질이 났다.
비겁한 새끼.
레체로의 수족으로 지구에 넘어왔으면, 처음부터 화끈하게 정체를 밝히면 얼마나 좋아?
하는 짓이 딱 제 주인을 빼닮아서 음험하고 음흉하고 음침하다.
내가 알기로 일라이저에게 주로 붙는 수식어 중 하나는 화신(火神)이다.
불을 잘 다루기로 유명한데, 단순히 화염 마법과 같은 재능을 쓰기 때문만은 아니다.
각성자로서 경지의 차이가 심하게 나는 경우에는 약간의 정신을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대상을 자연 발화시켜 불태워 죽일 수 있다. 체내의 마력을 매개체로 삼아 불을 붙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앞에서 F나 E랭크 각성자는 파리 목숨으로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녀석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아.’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녀석의 정체를 알지 못하니 제대로 계산이 서지 않았다.
일라이저가 이하성 같은 사람처럼 단지 ‘강한’ 사람이었다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내 은퇴 계획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일라이저는 얘기가 다르다. 레체로와 확실하게 연관이 있고, 내가 모르는 흑막이기도 하다.
전생에 니콜라스도 녀석의 정체를 잘 몰랐던…… 하나의 변수인 것이다.
‘왜 니콜라스는 이 연관 관계를 눈치채지 못했을까? 녀석이 회귀하기까지의 역사에서는 그런 실마리가 될 만한 게 단 하나도 없었던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일라이저는 오래전부터 전 세계에 영향력을 확장해 왔다.
전생에 우리 나인 로드가 일라이저의 도움을 제법 요청했던 것도 그의 그런 막강한 영향력 때문이었다.
그가 이끄는 세력의 도움만 받아도 대재앙을 훨씬 더 수월하게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놈들은 돕지 않았다.
‘또 다른 레체로가 우리 바로 옆에서 웅크리고 있었던 걸 수도 있어. 나스 대륙에서 죽은 그놈은 단지 시작일 뿐이고.’
이게 문제였다.
물론 아직까지는 확실한 물증이 없는 내 추측에 가깝기는 하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일라이저는 그 존재만으로도 내 은퇴 계획에 심각한 방해가 되는 셈이다.
만약 녀석이 레체로보다 더한 흑막이라면?
은퇴는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피할 수 없는 멸망이 예정된 세상에서 은퇴해 봤자 그 돌아간 자리가 ‘묏자리’밖에 더 되겠는가?
‘홀로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망해 갈 세계에서 유유자적하고 싶은 것은 아니니까.’
녀석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나중에 회귀할 니콜라스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때, 일라이저가 화제를 돌렸다.
“바람이나 좀 쐬실까요?”
“그러죠.”
사람이 없는 연회장 한옆의 테라스로 나를 유도했다.
남들과 격리된 곳에서 대화를 원하는 걸 보니 그의 속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놈과 같은 편인 척하고 정보를 캐내는 게 좋겠어. 어차피 이런 놈들이 한둘이 아닐 거고, 서로 암묵적으로 비밀을 지켜 주는 룰 같은 게 있을 거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몇 년 전에 감명 깊게 본 영화 중에서도 이런 내용이 있었다.
한 경찰이 신분을 위장하고 범죄 조직에 들어가 조직 내 파벌의 한 남자를 형님으로 모시고…….
그와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조직 내에서 영향력을 넓히고, 민감한 내부 정보를 조사하는 그런 얘기.
일라이저는 한눈에 봐도 신중한 사람이었다. 고도의 위장을 하지 않으면, 쉽사리 비밀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끼이이. 쿵.
이윽고 닫힌 문을 뒤로한 채.
나와 일라이저는 넓은 테라스의 바깥 길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철저한 침묵 속의 발걸음이 몇 걸음이나 이어졌을까?
일라이저가 다시 운을 뗐다.
그런데.
“레체로 님은 잘 계신가?”
말투가 싹 바뀌었다.
그뿐만 아니라 내게 건네는 말도 영어에서 나스 대륙어로 완벽하게 바뀌었다.
누가 봐도 시험이다.
나스 대륙에서 오지 않은 존재라면 절대 나스 대륙어를 할 수 없을 테니까.
미안하지만 나는 나스 대륙어의 언어영역은 만점이거든!
또렷하게 기억하는 나스어로 대답했다. 특히 리얼리티를 더하기 위해 약간의 방언도 집어넣었다.
“오늘도 끊임없이 연구에 골몰하고 계십니다.”
“당연히 그러시겠지. 하루도 허투루 보낸 적이 없는 분이시니까.”
태연하게 레체로와의 기억을 얘기하는 일라이저의 모습에 살짝 감정이 욱할 뻔했다.
‘정말 레체로의 선발대였나.’
나와 니콜라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레체로의 마수가 뻗쳐 있었다는 사실이 역겨웠다.
심지어 대재앙을 막아 낸 시점까지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게 더 화가 나기도 했고.
하지만 여기서 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면, 일라이저는 절대 마각(馬脚)을 드러내지 않을 터.
어쨌든 내게는 전생에 레체로를 죽인 이후, 그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얻은 지식이 있었다.
디테일하게 모든 정보를 꿰뚫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아는 척을 할 정도는 된다.
“어디 소속이지?”
아니나 다를까, 나를 테스트해 보기 위한 일라이저의 질문이 바로 이어졌다.
“클리자드 전투단 소속입니다.”
“클리자드 전투단……. 레체로 님의 총애를 받았겠군.”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클리자드는 훗날 레체로의 곁을 끝까지 지키다가 죽는 심복들 중 하나다.
레체로는 심복의 이름을 딴 전투단을 여럿 만들어 뒀었는데, 클리자드 전투단도 그중 하나였다.
“네 소문은 익히 들었다. 최근 한국의 각성자를 떠올리면, 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터.”
“그저 잔재주나 좀 부리고 있을 뿐입니다.”
근데 이 자식, 왜 아까부터 자꾸 반말이지?
물론 공식적인 나이가 서른넷으로 나보다 열 살이 많긴 하지만.
방금까지의 공적인 자리에서 했던 말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존대할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나를 자연스럽게 하대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만큼 더 레체로와 가까운 인물이라는 뜻도 될 것이다.
당연히 나를 ‘아랫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있을 테니까.
“멋진 성장이야. F랭크의 짐꾼으로 위장한 삶을 살다가 일약 재능을 개화하며 성장했으니.”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하긴……. 개화가 마음먹은 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 아직도 소식이 없는 녀석도 있더군.”
“맞습니다. 서두른다고 되지는 않더군요. 달리 조급해하지는 않았습니다.”
“역시 클리자드 전투단 소속다운 강인한 발상이군. 얼빵한 카젤라 전투단 놈들이 늘 말썽이지.”
“…….”
개화.
나는 일라이저의 말을 토대로 유추할 수 있었다.
나스 대륙에서 넘어온 녀석들이 각성자로서의 재능을 ‘개화’할 수 있는 어떤 수단이 있다는 것을.
그러니 사람마다 각각의 편차가 있고, 각성자가 당연히 될 것이라는 확신도 있는 듯했다.
샤미에게 레체로가 ‘저주의 씨앗’을 심는 것이 가능했듯이.
선발대로 파견된 자들에게 일종의 ‘각성의 씨앗’을 심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을 것이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일라이저에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놈이 현재 알고 있는 동료는 누구이며 그 수가 얼마인지, 각자의 사회적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하지만 그 순간, 모든 것이 파국이 될 것임을 잘 알기에 나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일라이저 같은 사람은 절대 바보가 아니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 나오는 단세포적인 악당과는 거리가 먼 똑똑한 놈이라는 얘기다.
정체를 완벽하게 숨기고 미국 최대의 길드인 일라이저 그룹의 수장이 된 녀석이다.
쉽게 넘어갈 리는 당연히 없고, 얕보면 내가 당한다.
“항상 존경하고 있습니다, 일라이저 님.”
“아냐, 오히려 나는 강신화, 너를 존경하고 있지. 대업을 위해서 흉내 내기 힘든 동양인의 얼굴까지 가졌으니까.”
아마도 나스 대륙에서 넘어오기 전, 적절하게 얼굴을 손보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래야만 지난번 흑마법사 3인조가 일라이저의 몽타주를 미리 가지고 있었던 것이 이해가 된다.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아시아 권역은 네가 휘어잡도록 해라. 지금의 성장 속도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레체로 님의 축복을 받은 우리의 압도적인 성장을 따라잡을 수 있는 자들은 없다.”
일라이저는 득의양양했다.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한 덕분인지, 나에 대해 살짝 마음을 연 듯했다.
기회다.
이것을 이용해 최대한 녀석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나는 놈을 전략적으로 이용할 생각이다.
일라이저의 착각을 잘 이용한다면, 녀석에게서 쓸 만한 던전이나 특혜를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니까.
“양화 길드와의 월 계약이 끝나고 나면, 별도의 팀을 만든다고 들었다. 맞나?”
“예, 맞습니다.”
“역시 명석하군. 적당한 연대와 적당한 자립, 그리고 전략적으로 주변을 이용하는 것…….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안배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부디 많이 알려 주십시오.”
“글쎄, 네 걱정은 딱히 안 해도 될 것 같군. 무엇보다 강신화, 네가 갖고 있는 재능이 부러워. 난 참 단순한 재능이란 말이지…….”
일라이저가 흡족한 표정으로 웃으며, 양손 위로 만들어 낸 불길을 자유로이 움직였다.
열화와 같은 불길이 손에서 타오르고 있었지만, 그의 손이나 옷은 멀쩡했다.
일라이저가 자랑하듯 내게 보이는 화염의 재능을 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녀석을 확실한 디딤대로 이용해서 더 빨리 성장하고, 더 많은 돈을 적극적으로 쓸어 담겠다고.
그래야 은퇴 계획은 물론, 미래의 변수까지 차단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해. 우리는 반지의 맹약으로 이어진 교단의 형제가 아닌가?”
일라이저가 시원하게 헛물을 들이켰다. 나만의 설계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