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Max-Level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76)
만렙 회귀자입니다만-176화(175/300)
제 176화
‘역시 예리해.’
예상은 했다.
사실 일라이저를 만났었을 때도 암흑 기 순응 테스트에 대한 경계는 늘 하고 있었다.
다만 일라이저는 그 전에 많은 교감이 이루어져 더 이상의 의심은 하지 않고 넘어갔지만.
아일라는 나에 대한 확신을 좀 더 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녀의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는 갔다.
전생에도 아일라는 무척 꼼꼼한 성격이었고, 빈틈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스르르르.
이내 암흑 기가 내 몸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왔다.
수준급의 흑마법사, 즉 사도인 그들이 부리는 암흑 기이기 때문에 쉽게 감지하기 힘들다.
다시 말해서 벨릭 같은 ‘추종자’들은 자신이 암흑 기 스캔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를 수 있다.
나 역시 전생에 유사한 경험을 해 보지 않았다면, 위장한 게 들통 나서 여기가 곧바로 전장이 됐을 터였다.
“그나저나 오늘은 참 날이 우중충하네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며 창밖을 바라보면서 체내로 들어온 암흑 기를 적당히 붙잡아 뒀다.
지구인이라면 암흑 기에 대한 태생적인 방어기제가 있어, 무조건적으로 암흑 기를 밀어낸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암흑 기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 작업을 곧바로 진행한 것이다.
‘잘했다고 칭찬해 주고 싶군. 절대 방심하지 않고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 둔 내가 옳았어.’
자화자찬을 했다.
이 정도의 칭찬이 전혀 과하지 않을 만큼, 지금의 내 대응은 매우 적절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다소 진중해 보였던 아일라의 표정도 한결 밝아졌다.
“강신화, 나스 대륙에서의 이름은 무엇이었지?”
“사도께서 제 미천한 이름을 어찌 아실 수 있겠냐마는…… 자레드였습니다. 자레드 칸탈레스.”
“옛 크리비아 제국의 초대 황제의 이름이라! 레체로 님께서 썩 좋아하지는 않으셨겠는걸?”
“천년 전엔 귀한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흔해 빠진 이름 중 하나가 되었으니까요.”
“하긴, 그렇지. 호호.”
능숙하게 둘러대자 아일라는 웃으면서 넘어갔다.
이 역시 전생에 레체로와의 교전에서 내 손에 목숨을 잃은 ‘악당’의 이름을 가져다 쓴 것이다.
실제로 클리자드 전투단 소속이기도 했다. 사실에 근거한 거짓말을 하니 아일라도 깜빡 속을 수밖에.
우리 각성자들이 판타지 대륙이라고 부르던 ‘나스 대륙’도 참 신기한 것이 많은 동네다.
특히 내가 이름을 둘러댄 자레드라는 사람.
정확히는 ‘자레드 폰 유칼레스’라는 이름을 가진 천 년 전의 제국 황제는 흥미로운 소문이 많았다.
이를테면 그가 본토인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현대 문명권에서 온 사람이라든가…… 하는.
어쨌든 결과는 해피엔딩.
아일라는 내 출신을 의심하는 듯한 가늘게 뜬 눈빛을 더 이상은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사상 검증’을 위한 아일라와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는 내내 그녀에게서 느낀 것은 지구의 문명에 대한 엄청난 적개심이었다.
“자레드, 네 생각은 어떻지? 내가 보기에 지구의 각성자 시스템은 우리 대륙에는 재앙이야.”
“제 생각도 같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지금도 다른 차원을 헤매겠죠.”
“지능을 가진 이종족도 많이 끌려갔지. 그리고 녀석들에게는 몬스터라는 딱지가 붙어 버렸고.”
“많은 사람이 던전에 갇혔을 테고, 그 안에서 죽기도 많이 죽었을 겁니다.”
“빌어먹을 지구 놈들…….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개 같은 짓을…….”
까드득.
이를 갈면서 분노를 표출하는 아일라의 모습은 온통 독기로 가득해 보였다.
전생에 내가 보았던, 천사처럼 순수하고, 상냥하고, 착해 보였던 그녀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아일라가 내게 한 말이 훗날 지구와 연결된 나스 대륙의 존재들이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우리를 적이라고 인식했다.
나스 대륙과 지구가 연결되는 2025년부터는 그야말로 피 튀기는 ‘대전쟁’의 연속이었다.
전 세계 전역으로 연결된 게이트(Gate)를 중심으로 5년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그래서 전 지구 차원에서 결성된 원정대가 꾸려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2030년.
똑같이 지구와 연결된 뒤,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동맹 관계를 구축한 무강 대륙과는 전혀 다른 운명인 셈이다.
‘마카디도 괜히 보고 싶네.’
마카디 라이케니아.
적성 대륙으로 여긴 나스 대륙의 출신이지만, 우리 나인 로드의 일원이 되었던 녀석이다.
니콜라스가 인정했던 수재 – 난 이때도 35번째 수재니 뭐니 하는 개소리를 들었다. – 중의 수재이기도 하고.
다만 마카디와 아일라의 사이는 생각보다 좋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소름이 끼친다.
왜냐하면 마카디는 레체로를 위시한 ‘레크나트 교단’에 엄청난 반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사건건 암흑 교단의 존재부터 레체로의 모든 것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던 마카디였으니…….
사도 출신인 아일라가 마카디를 좋게 봤을 리 만무했다. 이 둘의 불화가 두 여자의 성격 차이 때문인가 보다 하고 다들 가볍게 넘긴 게 지금 생각해 보니 오싹해졌다.
“지구의 각성자라는 놈들, 언젠가는 다 파멸시켜야 할 족속들이죠.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왕 위장하는 거,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열심히 아일라에게 지껄여 댔다.
어설프게 선을 그어 놓고 움직이면 그게 더 바보 같은 짓이다.
일라이저와 아일라 같은 녀석들에게 신뢰를 얻어 둬야 더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같은 편이라고 생각할수록 마음을 열고 깊은 이야기까지 털어놓게 될 테니까.
나는 일단 할 수 있는 대로 능력껏 정보를 수집해 둘 생각이다.
그리고 나중에 니콜라스가 회귀하면, 내용을 잘 정리해서 전달해 주면 되겠지.
“맞아. 그러기 위해서는 일라이저처럼 구심점이 큰 조직을 만들거나 아니면 세계 기구 같은 곳에 들어가야 하는데…….”
웃으며 입맛을 다시는 아일라의 말에서 나는 그녀의 오랜 노림수도 읽어 낼 수 있었다.
‘이때부터 노리고 있었구나.’
큰 조직 혹은 세계 기구.
회귀한 니콜라스가 아일라를 찾아와 건넨 나인 로드 영입 제안은 일생일대의 찬스였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미래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회귀자의 아군이 된다니.
그것보다 더 적진 깊숙하게 침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잖은가?
‘니콜라스, 이 멍청한 XX!’
전, 현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표현이 절로 나왔다.
멍청한 니콜라스!
내게 니콜라스는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완전무결하고 똑똑한, 그렇기에 완벽한 존재였다. 신과 같은.
하지만…… 아니었다.
여기저기 헛다리는 물론이고.
싸질러 놓은 똥이 제법 되는 결점 많은 녀석이었다. 그걸 현생의 내가 열심히 치우고 있다.
1시간에 가까운 긴 대화.
아일라는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난 것 같다며 내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도로서 네게 거는 기대가 매우 커. 강신화, 더 성장해서 이왕이면 내 편으로 붙어 주길 바라.”
“스카우트 제의입니까?”
“꼴 보기 싫은 일라이저의 세력이 너무 크잖아. 어차피 따까리 노릇은 벨릭이 다 하고 있고.”
“그렇죠.”
“그럼 추종자인 너도 줄을 잘 서야 하지 않겠어? 이래 봬도 내가 발이 좀 넓거든.”
“하하, 말씀 감사합니다.”
“잘 생각해 봐. 물론 이건 지극히 사적인 부분이고, 공식적인 길드의 제안은 당연히 유효해.”
“그렇게 하지요.”
“즐거웠어, 자레드.”
“감사합니다. 사도 님.”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속을 부글부글 끓게 만든 역겨운 대화가 끝이 났다.
그리고 아일라를 ‘정중하게’ 배웅하고 난 뒤.
흙빛이 된 얼굴로 숙소에 돌아왔다. 지금까지의 그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더러웠다.
* * *
“씨X! 은퇴도 이후에 아무 문제가 없어야 의미가 있지, 지옥불의 재림이 예정된 미래에 X 같은 은퇴가 다 무슨 소용이냐고!”
방에 돌아오자마자 애꿎은 침대에 주먹을 내리꽂으며 분노를 표출했다.
힘 조절을 10%, 아니 5% 아래로 하지 않았더라면 침대는 물론 객실 바닥도 터져 나갔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이성을 붙잡고서 힘 조절을 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랄까.
벌컥벌컥. 벌컥벌컥.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속을 달래기 위해 캔맥주를 단숨에 두 캔이나 비웠다.
아일라의 앞에서는 간도 쓸개도 다 빼 줄 것처럼 추종자의 연기를 신들리게 했지만.
그건 내 본심이 아니었다.
그래서 뒤돌아서서 혼자 남겨진 자리에서 느끼는 분노는 평소보다 훨씬 더 컸다.
“망할…….”
회귀를 처음 했을 때만 해도.
내가 기억하는 대로 열심히 돈 벌고, 힘을 키워서 빠르게 은퇴하면 될 줄 알았다.
길어야 3년이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작정하고 인생의 지름길을 달리는 데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
그러면 설령 당장은 아니더라도, 2025년에 니콜라스가 회귀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녀석의 회귀 역시 전생의 ‘역사’를 따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무조건의 대전제였다.
다만 영문도 모르고 내가 회귀를 한 만큼, 나는 니콜라스의 안배가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조기에 더 빨리 회귀할 가능성도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이 늘 니콜라스 녀석의 근황을 궁금해했던 이유였다. 당장 오늘도 회귀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니콜라스의 회귀는 오리무중이고, 심지어 녀석도 몰랐을 흑막이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무슨 줄줄이 비엔나소시지도 아니고 이게 다들 뭐 하는 짓거리냐. 이 썩을 놈들아!”
끼잉- 끼잉-.
분노를 풀 수단이 필요했을까?
나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아공간에서 꺼낸 윌슨을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움켜쥐고 있었다.
물론 윌슨이 정말 터질 리는 없겠지만, 녀석이 고통스러운 듯한 소리를 내기에 황급히 힘을 뺐다.
“미안. 윌슨, 미안하다.”
팅! 팅팅! 팅팅팅!
뜻하지 않게 분풀이 대상이 되어서 그런지, 윌슨은 연신 바닥을 튕기면서 항의(?) 시위를 했다.
귀여운 녀석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제법 가라앉기는 했지만……. 여전히 씁쓸한 마음은 남아 있었다.
‘반대로 생각하자. 잘잘못을 누가 했는지 따지고, 왜 놓쳤는가를 원망하는 건 무의미해.’
재차 생각을 다잡았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생각이 남 탓을 하는 것이다. 절대 생산적인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분노 표출은 이 정도면 충분히 했고, 지금은 무조건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였다.
‘좋게 생각하자. 내가 회귀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았다면, 일라이저나 벨릭, 아일라 같은 흑막과 만날 일도 없었을 거야.’
내 자신의 회귀와 그 행보에 의미를 부여하기로 했다.
내가 그들의 눈에 띌 만한 활약을 했고, 적절하게 대응을 했기에 그들이 마각을 드러낸 것이다.
어찌 보면 음지에 숨어 있던 변절자들을 양지로 끌어올린 셈이었다.
그게 설령 소 뒷걸음질치다가 쥐 잡은 격이든 어쨌든 말이다.
그래서일까?
내 낙천적인 성격이 빛을 발휘할 지극히 ‘결과론적인 해석’이 떠올랐다.
“그래, 이게 다 설계라고! 내가 처음부터 치밀하게 짜 놓은 거대한 설계 말이야. 그렇잖아?”
그래!
이건 내가 회귀한 이후로 짜임새 있게 그려 온…… 나만의 큰 그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