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Max-Level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87)
만렙 회귀자입니다만-287화(286/300)
제 287화
“불쾌하군. 대단히 불쾌해…….”
대천사가 그려진 옥좌(玉座)에서 일어난 흑마법사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로브 사이로 드러난 얼굴과 피부는 하나같이 새하앴다. 핏기가 전혀 없이 창백했다.
손톱은 언제 잘랐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길게 자라 있었고, 그 손톱의 끝에서는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묻힌 지 얼마 안 되는 따뜻한 피였다.
흑마법사는 혓바닥을 살짝 내민 채, 흐르는 피를 음미하듯 천천히 마셨다.
“으으으!”
“으흐흐!”
흑마법사의 앞에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도록 단단히 포박된 기사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미 넝마가 된 기사들은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겨우 죽음만 면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기사는 역시 기사인 것일까.
불굴의 정신력과 회복력으로 그래도 많이 회복한 상태였다.
물론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득했던 용기는 이미 사라졌고, 두려움과 공포만이 남아 있었지만.
“살려 주십시오! 제발!”
“……레체로를 죽이고 신성 제국의 깃발을 다시 제단에 꽂겠다고 하지 않았었나?”
“아,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이상하군. 난 너의 얼굴을 똑똑히 봤는데 말이야.”
흑마법사가 긴 손톱 끝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지명된 기사는 기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차가운 바닥 위에 이마를 찧으며 소리쳤다.
“옆에 있는 놈이 했던 말입니다! 착각하신 겁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그럼 그 옆의 놈에게 묻겠다.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나?”
“전혀요! 없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저항군의 고급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호오, 그래?”
흑마법사의 눈빛에 호기심이 도는 것을 보자, 기사들의 표정도 살짝 밝아졌다.
그가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좋아, 그럼…….”
바로 그때.
쉬이이익!
뭔가 말을 이으려던 흑마법사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손톱으로 허공을 쭉 그었다.
“……?”
분명 그의 손톱은 누군가를 건드리지 않고, 그저 빈 공간을 갈랐을 뿐이지만.
“컥.”
기사 하나가 단말마의 비명을 터뜨렸다.
그 순간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든 기사들의 목에 붉은 줄이 그어졌다.
푸슈슈슈!
그것으로 끝이었다.
일렬로 서 있던 열 명의 기사는 그렇게 한자리에서 참수(斬首)로 최후를 맞이했다.
“좋아. 아주 좋아. 이제야 기분이 좀 풀리는 것 같군. 신선하고 뜨거운 피. 이것이야말로 혈법술과 혈마술의 근원이 아닌가!”
시종일관 염세적인 눈빛이 가득했던 흑마법사가 힘껏 환호하면서 피를 들이켜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는 주변의 부하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의 행복한 춤사위에 맞장구를 치지도 않았고, 감정을 드러내는 표현을 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해서는 안 되는 일임을 잘 알고 있기에 보인 학습된 행동이었다.
흑마법사의 창백한 얼굴에 핏기가 돌고, 전신에서 검붉은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이글거리듯 피어오르는 기운에는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한 ‘악마’의 형상이 드러나 있었다.
철컹. 철컹철컹.
바로 그때.
피의 색깔을 쏙 빼닮은 붉은 카펫 위로 중무장을 한 기사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꽤나 가까운 거리까지 왔음에도 그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흑마법사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리고 다섯 걸음 앞까지 그가 당도했을 때, 흑마법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미카시스, 무슨 일이냐?”
“친애하고 존경하는 레체로 님께 아룁니다. 아무래도 저항군의 움직임이 수상합니다.”
그랬다.
기사의 정체는 레크나트 나이츠의 수장, 기사단장 미카시스였고.
옥좌에 앉아 있던 흑마법사의 정체는 바로 레크나트 교단의 단주인 레체로였다.
그가 앉은 옥좌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성 제국의 깃발을 들고 싸웠던 어떤 왕국의 왕이 앉아 있던 옥좌였다.
물론 지금 그 왕은 살아 있지 않았다.
레체로에게 죽음을 당했고, 그의 살가죽은 벗겨져 옥좌에 덧씌워졌다. 참으로 참혹한 최후였다.
심지어 옥좌 왼쪽 팔걸이에 놓인 작은 물병에는 그 왕에게서 적출한 안구가 담겨 있었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바퀴벌레처럼 조용하던 놈들이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상당히 돌출된 형태로 본 교단의 영역에 진출해 있습니다.”
“공격이냐?”
“그건 아닙니다만 척후로 보이는 인원이 대거 늘었습니다. 통상적인 정찰 개념은 아닙니다.”
“……흠.”
레체로의 눈빛이 깊어졌다.
레크나트 교단이 나스 대륙 전역을 장악한 이후, 저항군은 줄곧 연전연패를 거듭해 왔다.
신성 제국 연합은 오래전에 궤멸되었고, 남은 부흥 세력은 충분히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오블란의 존재가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의 앞마당을 벗어날 수 없는 절름발이 맹수일 뿐이었다.
즉, 오블란이 전장에 나설 리는 없었다. 혹 나선다 해도 그 즉시 레크나트 나이츠의 손에 죽을 것이다.
“짚이는 점이 있으십니까?”
“구심점이 될 만한 놈들은 일찌감치 모조리 죽였다. 구족까지 씨를 말려서 후환을 없앴지.”
“그렇습니다.”
“전략적으로 나스 대미궁이나 지하 동굴로 몰아넣고 한 번에 궤멸시킨 적도 많았다. 수십 차례의 토벌로 주축은 제거됐다.”
“늙은이가 노망이라도 난 것일까요?”
“오블란의 움직임은?”
“없습니다. 그 손녀딸이 최근에 본 교단에 의해 격파된 아슈파스 성에 잠깐 나타났다는 보고 정도만이 있을 뿐입니다.”
“손녀딸이라면 마카디 말이군.”
“예. 제법 실력 있는 X이지만, 그래 봤자 잔재주만 조금 가지고 있을 뿐이지요.”
“한 명의 목숨이 아쉬운 마당에 쓸데없는 짓거리를 한다는 것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얘긴데…….”
“죄송합니다. 제 선에서 파악을 끝냈어야 하는데,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터라.”
“아니다. 중요한 건 지금이지.”
레체로의 생각이 복잡해졌다.
얼마 전, 레크나트로부터 ‘계시’를 듣기는 했다.
그는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경고했다.
모든 것이 너무 순탄하게 풀리고 있는 지금, 바로 이 순간에 긴장의 끈을 더욱 바짝 조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올 만한 변수가 없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한데 바로 그때.
“급보입니다! 보고 드립니다!”
병사 하나가 다급히 달려왔다.
붉은 투구를 쓰고 있는 것을 보니, 지방의 각 암흑 제단에 연결된 정보를 담당하는 병사였다.
“무슨 일이냐?”
“마요르카! 마요르카 제단에 저항군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뭐라고? 마요르카 제단에?”
레체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요르카 제단은 레체로가 대륙 전역에 만들어 놓은 제단들 중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제단이었다.
사실 대다수의 제단이 겉으로는 번듯해 보여도,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다섯 개의 부제단은 달랐다. 이곳에 모이는 암흑 기는 마왕 레크나트의 망가진 영혼을 재생하고 부활시키는 데 꼭 필요한 순수한 암흑 기였다.
겉으로 본다면 허름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제단이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던 것이다.
우연일까? 우연일 수도 있었다.
오히려 허름한 외관이 저항군의 입장에서는 공략하기 쉬운 대상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약자인 놈들의 입장에서 충분히 가능한 노림수였다.
하지만 콕 핀셋으로 집어내듯, 마요르카의 부제단을 노린 것이 영 찜찜했다.
한데 바로 그때.
“보고드립니다! 급보입니다!”
“……무슨 일이냐, 또?”
“마요르카 제단의 중앙 코어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손도 못 쓰고 당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레체로의 표정에 당혹감이 실렸다. 불과 1분. 1분 만에 제단 하나를 두 눈 멀쩡히 뜨고 잃고 말았다.
지금껏 순탄했던 자신의 행보에 갑자기 어두운 먹구름이 드리운 듯한 기분이었다.
“씨X.”
저급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 * *
같은 시각.
“와, 이렇게 쉬울 줄 알았으면 진즉에 나스 대륙을 휩쓸고 다녔어야 했는데!”
짤그락!
나는 흑암의 목걸이에 마요르카 제단에서 얻은 원석 하나를 끼워 넣고 있었다.
맞춤형 제작이라도 한 듯, 원석은 깔끔하게 목걸이에 파인 홈 속으로 쏙 들어갔다.
첫 번째 공략은 탐색 차원에서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접근, 투명화를 이용해 침투했다.
사실 안 먹힐 줄 알았다.
물론 투명화 능력이 결코 허술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의 대비 체계는 있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편없었다.
방비가 어느 정도 되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이 알람 마법진 위주의 편성이었다.
내 눈에는 마나의 흐름이 선명하게 보이는 만큼, 알람 마법진을 피해 가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바닥에 그려진 선을 피해 돌아가는 것은 정신만 멀쩡하면 어린아이도 할 수 있는 일 아니던가?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너무…… 달렸나?”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한가득했다. 상당히 참혹했다.
뭐랄까.
제단에 진입하기 직전, 앞을 막아선 흑마법사와 교단의 단원들을 보고 분노했던 것 같다.
훗날 이 녀석들이 니콜라스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물론, 우리의 미래를 갉아먹고 있을 테니까.
지금의 이 녀석들이 과연 미래에도 그럴 것이겠냐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은 내게 필요 없었다.
“크으윽, 빌어먹을…….”
“다 도망친 줄 알았는데, 아직 살아 있는 놈이 하나 있었네. 아까 네가 뭐라고 했더라? 소드 익스퍼트급이라고 했나?”
“너는…… 누구냐?”
“강신화다.”
“뭐라고?”
“귀먹었어? 강신화라고.”
짝짝짝.
나는 비틀거리면서 힘겹게 몸을 일으킨 기사에게 나름의 존경을 담아 박수를 쳐 줬다.
역시 힘을 아끼면 이렇게 된다니까. 체력 안배 차원에서 가동할 수 있는 힘의 1할만 썼더니, 이렇게 생존자가 나왔다.
소드 익스퍼트.
소드 마스터와는 경지에서 아득한 차이가 있기는 해도 수준급 실력자다.
지구의 각성자로 따지면 소드 마스터를 EX랭크라고 했을 경우 익스퍼트는 S랭크쯤 된다.
녀석이 스스로의 경지에 나름의 자부심을 갖는 것은 그럴 만했지만, 문제는 그 상대가 나라는 점.
“와라. 빨리 보내 주마.”
“크아아아!”
붉은 안광을 폭사하며 흑기사가 나를 향해 다시금 질주하기 시작했다.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달려드는 녀석의 모습이 꽤 멋있게 보이기는 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니콜라스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했다.
자신의 암담한 미래를 알면서도 묵묵히 과거의 ‘나’에게 실마리를 던져 주고 있는 녀석.
녀석의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다면, 꽤 멋있는 모습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순간!
파팟!
나는 블링크 링으로 달려들던 흑기사의 등 뒤로 가뿐히 위치를 옮겼다.
그리고.
꾸드드득.
근육을 최대치로 개변시켜 신체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뒤.
“하아아압!”
갑주를 걸친 상태로 흑기사의 몸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그가 들고 있던 검을 힘껏 후려쳐서 무장해제를 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크아아!”
기사가 비명을 질렀다.
잔뜩 공포에 질린 비명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그대로 기사의 몸을 아래로 끌어내리면서 일찌감치 예열시켜 둔 무릎을 힘껏 위로 올려쳤다.
빠각!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접혀서는 안 될 방향으로 갑주와 함께 몸이 통째로 접히며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폴더폰처럼 직각으로 접혀 버린 몸뚱이는 안타깝게도 다시는 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