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Max-Level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57)
만렙 회귀자입니다만-57화(56/300)
제 57화
아마 마리나의 머릿속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면, ‘빠직’ 하는 소리가 났을 것이다.
자신의 실력에 누구보다 자부심을 갖고 있고.
또한 늘 자신 있어 하는 마리나에게 신화의 말은 욱하는 감정을 확실히 끌어올리는 트리거가 되었다.
후웅! 후웅!
그러자 이번에는 더미가 양팔이 아닌 다리를 현란하게 움직이며, 신화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공격의 강도가 더욱 거세졌다.
방금 전까지의 공격은 그래도 ‘죽지는 않게 해 주겠다’는 속뜻이 분명히 느껴지는 공격이었다면.
지금은 정말 실전이나 다름없었다. 저 발차기는 맞는 순간, 최소 턱뼈가 으스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거센 공격이었다.
‘확실히 위력적이야.’
신화는 감탄하고 있었다.
마리나도 신화의 실력에 연신 감탄하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으니 신화는 알지 못했다.
훗날 나인 로드가 될 존재라는 미래에 걸맞게 마리나의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사실, 전력을 다해서 아슬아슬하게 막아 내는 중이었다.
역습을 가해 더미의 오른손을 박살 낸 것도 온 힘을 다해 싸웠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마리나, 너도 니콜라스처럼 정말 타고난 금수저구나. 이때부터 꽤 쓸 만한 녀석이었네.’
신화는 웃었다.
그 와중에도 더미의 맹공이 십수 차례나 이어졌지만, 신화는 강철 강화로 깔끔하게 받아 냈다.
마리나의 장점은 다른 인체 – 혹은 더미 – 를 조종해 변칙적이고 생소한 공격을 가한다는 점이지만.
뒤집어 말하면, 그것 때문에 레퍼토리가 한정적인 것이 치명적인 단점이기도 했다.
물론 마리나의 재능은 매우 희귀한 것이고, 그래서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훨씬 많기는 했다.
하지만 전생에 수없이 마리나와 대련을 했던 신화의 입장에서는 예측 가능한 범주의 공격이었다.
‘결국은 마리나 본인이 싸우는 것만큼의 느낌과 감각을 정확하게 느낄 수는 없어.’
그 순간.
파아앗!
오로지 방어로만 일관하는 듯했던 신화가 무표정한 얼굴과 함께, 순간 도약을 했다.
금세 천장에 닿은 신화가 몸을 비틀어서는, 되레 방어 역장을 디딤대로 삼아 힘껏 발을 박찼다.
쿠웅!
파공음과 함께 급격하게 거리를 좁힌 신화는.
쉬이익!
날카롭게 빈틈을 파고든 더미의 왼손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해 냈다.
“앗……!”
당황한 그녀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더미의 공격 사각지대를 정확히 노리고 들어온 탓에 신화를 저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각이라고 해 봤자, 행동반경의 1%밖에 되지 않는 아주 좁은 구간이었지만.
신화는 너무 쉽게 그 사각을 찾아냈고, 바로 코앞에 도착했다.
스윽.
이윽고 장검의 형태로 변형시킨 신화의 오른팔이 마리나의 목 앞을 예리하게 노렸다.
“망할.”
마리나가 짧고 굵은 분노의 한 마디를 토해 냈다. 신화는 그녀의 목을 겨눈 채로 말을 이어 갔다.
“인체나 모형을 내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것은 분명 위력적이에요. 문제는 본체죠. 분신의 움직임이 극대화될수록 본체의 방어가 약해져요.”
“사각을 노렸나요?”
“노렸죠. 직접 눈으로 보고 대응할 수 있는 내 몸과 달리, 더미의 반응은 아무리 짧아도 딜레이가 있으니까.”
“…….”
“사각을 없애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죠. 하지만 공격성을 낮추고,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을 찾는 것은 쉬울 겁니다.”
“……제가 졌어요. 실전이었다면 이미 죽었겠네요.”
“실전이었다면 마리나 씨가 더 공격적으로 임했겠죠. 승패에 별로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젠장.”
신화의 쿨한 반응이 오히려 마리나에게는 큰 자극이 됐다.
매우 분했지만, 한편으론 신화의 재능이 갖는 본질을 본 것 같아서 만족스러웠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야. 요행도 절대 아니고. 신화 씨의 냉정한 노림수가 통한 거야.’
마리나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리고 신화가 방금 전 대련에서 보인 실력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했다.
‘이 정도면 A랭크급의 각성자도 쉽게 이길 수 있겠어. 힘의 위력 자체는 다소 부족하지만, 전투 경험이 풍부해.’
도대체 그 비결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이 정도의 노련함은 대격변 이후에 거의 던전에서 살다시피 하고, 줄곧 전투에만 임했던 것이 아니면 절대 터득할 수 없을 경지다.
거의 대부분, 아니 전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각성자가 상대 공격을 정석대로 방어하는 방법을 쓴다.
가장 쉬운 방법이고, 위험이 적은 대응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화는 대응에 실패했을 경우 전자보다 몇 배 이상은 위험해질 수 있는 체술을 썼다.
그 덕분에 아주 적은 힘으로도 공격을 피했고, 오히려 역으로 빈틈을 노렸다.
“잘 배웠습니다.”
마리나의 목을 노렸던 검 끝을 거둬들이며, 신화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쉬리릭!
그러자 그녀도 한 팔을 잃은 채로 초라하게 서 있는 더미에게서 은사를 회수했다.
테스트를 너무 진지하게 수행한 탓에 5억 원짜리 더미의 수리가 필요해졌다. 괜히 입맛이 씁쓸했다.
“정말 대단해요. 제가 확실하게 졌어요. 전력을 다했음에도 당했으니 달리 할 변명이 없네요.”
“이제 호기심이 좀 풀렸나요?”
“뭐……. 조금이 아니라 확실하게 풀렸다고 할 수 있겠네요.”
마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VVIP와의 미팅을 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말을 이어 갔다.
“신화 씨.”
“예?”
“사실 오늘의 대련은 신화 씨가 VVIP를 만날 자격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자리이기도 했어요.”
“VVIP라고요?”
몰라서 되물은 것이 아니었다.
신화도 누군지는 알았다.
바로 WSA의 수장.
하지만 대외적으로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존재이기도 했다.
전생에 기억을 되짚어 보면.
‘일라이저 그룹’도 그랬지만, 특히 WSA도 수상한 구석이 꽤 많은 조직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두 조직은 대재앙 대비에 무척 소극적이었으며 협력도 잘하지 않았다.
나인 로드가 도움을 요청하면, 매번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거절하거나 지원을 지연하곤 했다.
그런 이유로 필요한 던전 공략을 못 하거나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갔던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VVIP는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재앙을 물리침으로써 이 땅에 예고된 잔혹한 종말을 막아 낸 이후로도 나타나지 않았다.
‘강신화, 나도 이건 완전 추측인데……. VVIP 저 XX,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이제 다 끝났는데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듯해. 모니터링은 내가 계속할 테니 너는 푹 쉬어라.’
신화는 니콜라스가 대재앙의 승리 직후에 남겼던 말을 떠올렸다.
그도 VVIP의 극단적인 폐쇄성과 침묵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유를 정확히 짚어 내지는 못했다.
‘어쨌든 VVIP라면 재밌긴 하겠네. 돈과 명예, 실력을 모두 가진 고객이라면 나야 좋지.’
어차피 상대가 누구건,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건 간에 지금의 신화에게는 단지 고객일 뿐이다.
신화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마리나가 말했다.
“나중에 WSA의 게스트로 참여하시면, VVIP와 화상으로 대화를 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 이제 진지하게 강화 포션에 대한 판매 협상을 해 볼까요?”
“원하던 바입니다. 물건을 팔기도 전에 두 남녀가 너무 화끈하게 놀았네요.”
그녀의 화제 전환에 신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협상은 빠르게 진행됐다.
나는 팔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고, 마리나는 어떻게든 사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아마 마리나는 윗선으로부터 어느 정도 협상권까지 위임을 받은 듯했다.
대화 내내 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마리나는 팀 오사카 소속이면서 동시에 WSA의 일원이었으니까.
이런 중요한 구매 건을 진행하는 것을 보면, WSA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이번에 제작된 강화 포션 100팩을 구매하고 싶어요. 포션의 정식 명칭이 혹시 따로 있나요?”
“스티뮬러스입니다.”
“자극제라는 뜻이네요. 뭔가 되게 원초적인 어감인데요?”
“괜찮은 이름이죠.”
공식 명칭은 그렇지만, 어차피 각성자들 사이에서는 강화 포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그게 더 직관적이기도 하고.
“아까 신화 씨가 그랬죠. WSA에 구매 우선권을 주는 것이라고. 그러면 당연히 조건이 있을 듯한데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해 주세요.”
“첫째, 게스트 참여 시 WSA 소유의 던전 두 곳을 제가 원하는 던전으로 공략하겠습니다.”
“요청이 아니라 통보인가요?”
“뭐, 해석하기 나름이죠?”
“일단 나머지 조건도 마저 들어 보죠.”
“둘째, 가격 협상은 두 차례만 가능합니다. 결렬 시에는 미련 없이 다른 판매처를 찾겠어요.”
“스무고개도 아니고 두 고개로 제안을 끝내라는 얘기군요.”
“서로 이것저것 재면서 눈치 싸움은 하지 말자는 얘깁니다. 필요하면 필요한 사람이 확실하게 구매 의사를 보여야죠.”
나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 갔다.
“초강수를 두시네요.”
“거래가 성사됐을 때, 과연 누구에게 이득일지를 생각하면 쉬운 문제입니다.”
영업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경험상 가장 영악한 영업은 상대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방금 내가 한 말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이미 내 강화 포션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그녀의 귀에는 어떻게든 매력적인 말로 들릴 것이다.
자신감의 표현이 고깝게 들리는 게 아니라, 충분히 공감이 가능한 배짱이 되는 셈이었다.
“좋아요. 오늘 확보된 100팩의 구매가는 100억 원으로 하죠.”
개당 1억 원.
괜찮은 제안이다.
최상급 마력 포션과 달리, 이것은 제작 재료만 있으면 무한정으로 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2050년 무렵의 스티뮬러스 가격이 3억 원 정도쯤 했으니, 물가 변동률을 생각하면 적정가는 맞다.
‘말 그대로 적정가고, 그건.’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준 두 번의 기회 중 한 번이 그렇게 날아갔다.
지금 내 모습이 소위 ‘갑질’로 비쳐질 수 있다는 것도 잘 안다.
사실 대놓고 그렇게 느끼라고 선택지를 좁힌 것도 있었다.
나는 아쉬울 게 없었으니까.
본래 간구하고 애원해서 얻은 물건일수록 그 가치를 더욱 크게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아울러 물건의 가치를 높이면, 자연스럽게 내 가치도 높아진다.
이후에 무엇을 팔아도 웃돈과 같은 프리미엄이 붙고, 당연히 돈을 벌기가 한결 더 수월해진다.
즉, 훗날 몇 주 혹은 몇 개월의 빠른 은퇴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 참…….”
“적정가를 생각하지 말고, 파급력을 생각해 보면 판단이 빠를 텐데요.”
일시적이라고는 해도, 각성자가 다음 랭크의 전투 능력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보통 경험이 아니다.
확실한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물론 뒤집어 생각하면, 강화 포션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역효과가 날 수도 있지만.
원래 도핑의 양면성이 그런 부분이기도 하지 않던가?
다만 나는 중독성이 있는 약물을 파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떳떳했고, 마음에 걸릴 것도 없다.
“…….”
긴 침묵이 흘렀다.
판매자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숙고의 시간을 가진 뒤.
드디어 굳게 닫혀 있던 마리나의 말문이 열렸다.
“좋아요. 이 가격으로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