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Max-Level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88)
만렙 회귀자입니다만-88화(87/300)
제 88화
파앗!
바로 그레이 하귀드 군락을 향해 뛰어들었다.
캬시이!
오랜만에 사람의 체취를 맡아서인지 군락 전체가 꽃잎과 줄기를 펄럭이며 광기를 표출했다.
붉은 줄기를 가진 녀석들.
놈을 보통 대장이라고 부른다.
독성이 없는 노란 줄기와 달리, 물리면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와득! 찌익!
여기저기서 노란 녀석들이 나를 열심히 물었다.
가속 재능을 이용해 최대한 피하기는 했지만, 수백이 넘는 놈들의 이빨을 다 피할 수는 없었다.
샤아아. 샤아아.
입구에서 분주히 움직이며, 정교하게 거리를 재서 힐을 넣고 있는 한소준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의 강점이다.
아무리 먼 거리여도 경로 예측을 정확히 해서, 안정적으로 힐을 공급하는 센스.
보통의 힐러들은 변수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1m 남짓의 거리에서 정확도 높은 치유를 전개한다.
하지만 한소준은 10m, 20m 떨어져도 정확하게 치유 구체를 ‘배달’하는 계산 능력이 탁월했다.
내가 녀석을 탐낸 이유다.
원래는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 만날 생각이었는데, 던전의 특성상 힐러가 꼭 필요했기에 만남을 앞당기게 됐다.
현재 팀 구성상 디버퍼 신부님, 암살자 윤별이와 포지션도 겹치지 않으니 영입 대상으로는 최고다.
후웅! 콰앙! 후우웅!
한편 마리나가 은사로 조종하는 칼라킬은 내가 앞서간 이동 루트를 빠르게 따라붙었다.
그리고 내게로 한껏 시선이 쏠린 그레이 하귀드를 무지막지하게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애초에 사체가 된 몬스터이기에 달리 물리거나 뜯긴다고 해서, 전투력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바로 그때.
크샤하!
대장이 나타났다.
그것도 내가 움직이고 있던 루트의 양쪽에서.
‘일단 첫 타는 받아 낸다.’
나는 줄기를 이리저리 현란하게 움직이며, 내 몸을 정확하게 물어뜯을 궁리를 하는 녀석을 살폈다.
마치 뱀처럼 좌우로 줄기를 흐느적거리던 녀석은 내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서 있는 것을 보자.
캬시이!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단숨에 줄기를 쭉 뻗으며, 내게 성난 이빨을 들이밀었다.
높이는 3m인데, 순간 고무줄처럼 늘어난 몸은 6m에 가까운 거리를 단숨에 좁혀 버렸다.
‘강철 강화.’
즉시 강철 강화로 대응했다.
전신이 단단해지는 만큼 기동성은 떨어지나 어설픈 이빨 따위로는 뚫리지 않는 철옹성이었다.
카칭! 치잉!
수액인지 침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쏟아 낸 대장의 이빨이 허망하게 차가운 금속을 훑었다.
다음 순간.
홰액!
나는 즉각 강철 강화를 해제하며,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던 대장 하나의 꽃잎을 움켜쥐었다.
탄성으로 인해 늘어난 만큼,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과학적인 원리니까.
그시시!
다만 과정이 순조롭진 않았다.
대장의 곁을 지키는 다른 식물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공격을 집중했기 때문이다.
‘묵철 폭권, 제5장 진권.’
나는 마력을 힘껏 끌어올려, 벼락의 권격인 진권을 그대로 발동시켰다.
그리고 움켜쥔 대장 꽃잎을 중심축으로 삼아서, 주먹을 힘껏 내뻗는 순간.
꽈르릉!
우레와 같은 천둥소리가 터져 나오며, 사방으로 진권의 충격파가 퍼졌다.
충격파에 휘말린 대상 모두의 방어력을 대폭 깎아 내는 일격.
이는 밀집 형태로 있을수록 대단히 치명적인데, 지금 그레이 하귀드가 딱 그러했다.
쿠구구구!
진권의 영향권에 들어간 모든 식물이 좌우로 흔들거렸다.
겉으로는 표가 나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단단했던 줄기가 ‘야들야들’해진 것이 보였다.
쇄액!
키햐아아아……!
나는 톱날 형태로 변형시킨 오른팔로, 우선 대장의 꽃부터 확실히 베어 냈다.
보통 같으면 날이 반쯤 박히고 말았을 몸체지만.
진권에 방어력이 50% 이상 깎인 줄기로는 당연히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지금이다.’
바로 지면을 박차고, 군락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진권으로 인한 ‘방깎’의 지속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래서 단기 승부가 필수였다.
콰악! 콰아악! 콰악!
호랑이 굴에 들어온 만큼, 호랑이에게 물리는 일은 당연지사.
여기저기서 노란 녀석들이 나를 힘껏 깨물었다. 통증이 느껴졌지만, 충분히 버틸 만했다.
게다가 뒤를 체크하니, 한소준이 정확히 날린 치유의 구체가 날아드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제자리에서 몸을 고속으로 회전시켰다.
가속 능력을 이용해 회전을 극대화한 것으로, 내 오른팔이 톱날 형태로 변형되어 있는 만큼.
실상 살아서 움직이는 믹서가 된 셈이나 진배없었다.
서걱! 서걱! 서걱!
크시이! 키시이! 키히!
고속 회전을 하며 미친 듯이 줄기를 베어 낼 때마다, 그레이 하귀드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놈들의 줄기 윗부분은 사람으로 따지면 목과도 같아서, 단숨에 베어 내면 살아날 도리가 없었다.
투욱. 투욱.
여기저기서 주인 잃은 꽃이 우수수 떨어지고, 탐욕의 이빨을 드러내던 꽃들이 순식간에 시들었다.
시히이!
그 와중에 제법 영리하게 줄기를 늘려, 내 머리와 목 방향을 노린 녀석들이 있었다.
‘보인다.’
하지만 놈들의 이동 경로가 대부분 예측됐다.
물론 초월 재능에 뇌 개변을 합친 만큼 매우 정교한, 대량의 다중 연산까지는 안 됐지만.
열두 마리 정도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은 초월의 꽃으로 얻은 재능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솨아아악!
힘껏 허공에 호선을 그었다.
언뜻 보기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의미 없는 헛손질을 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예측 경로를 벤 것이다.
프스슷!
깔끔했다.
내 목을 노린 열두 마리의 그레이 하귀드 모두 단 한 번의 일격에 깔끔하게 줄기가 베였다.
콰직! 콰직!
내가 난장판을 만들자, 덩달아 마리나의 ‘인형’인 칼라킬도 무지막지한 무력의 힘을 발했다.
시너지가 좋았다.
한번 닦아 놓은 길을 따라 진입한 녀석은 마리나의 손길을 따라, 우악스럽게 줄기를 잡아 뜯었다.
캬샤!
그때, 또 한 마리의 대장 식물이 나를 노리고 걸쭉한 침을 토해 내며 이빨을 드러냈지만.
까앙!
강철까지 무시해 낼 역량이 없는 녀석의 이빨은 다시 내 강철 강화 재능에 막혔다.
그간 화염 재능의 각성자가 없으면 아예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이쪽 루트에 활로가 열리고 있었다.
* * *
같은 시각.
‘멍청하고 무식한 게 아니라 대단히 전략적이야.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는 작은 상처는 무시하고, 큰 상처만 피하고 있어.’
한소준은 계속 놀라고 있었다.
처음에는 신화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애초부터 신화는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전투에서 필연적으로 겪지만 익숙해지기 힘든 고통을 감당해 낼 준비가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즉, 정신력의 문제였다.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며 집중력이 흩어지는 것과 참아 내며 집중하는 것은 천지 차이이기 때문이다.
신화는 후자 쪽이었다.
몸 여기저기에 수많은 핏방울이 튀었지만, 그 흔한 신음 한번 내지 않았다.
덕분에 한소준도 외적인 요소에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신화의 치유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재밌다, 재밌어.’
한소준의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 미소가 걸려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힐을 해 주는 보람을 느꼈다.
의미 없이 체력만 대거 소모하고 부상을 입어 자신의 치유를 받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인 판단에 따른 결과물로 치유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힐을 받을 자격, 가치.
한소준은 그간 생각해 왔던 자신의 깐깐한 기준에 신화가 완벽하게 부합한다고 여겼다.
‘그가 흘리는 피 한 방울, 내가 치유에 사용하는 마력 한 톨,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움직임.’
뿌듯했다.
신화는 주제넘게 한소준의 힐이 어땠으면 좋겠고, 어떻게 맞춰 달라는 요구도 하지 않았다.
단지 확실하게 믿어 줬다.
그것은 처음부터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절대 보일 수 없는 마음가짐이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신화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동선을 완벽히 최소화하고, 광범위한 타격이 필요한 위치에 멈춰 서 주변을 단숨에 쓸어버렸다.
절제, 그리고 파괴.
공존하기 힘든 두 콘셉트가 함께하는 전투였다.
그 순간.
“…….”
신화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신화는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무심하게 닦아 내며, 그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어 보였다.
‘강신화, 당신 정도라면 내 힐을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는 것 같아. 앞으로도 계속 증명해 줘. 날 계속해서 자극해 주길 바랄게.’
한소준은 장갑 낀 오른손을 힘껏 좌우로 흔들며, 신화에게 리액션을 보였다.
간만에 각성자 대 각성자로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경험을 하고 있기에 누구보다 기쁜 한소준이었다.
* * *
20분 후.
군락 중심의 루트 공략이 끝났다.
나는 시종일관 대장 녀석들에게만 집중했고, 나머지는 철저하게 무시했다.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체력의 손실과 부상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한소준에게 맡겼고.
내게 어그로가 완벽히 쏠린 노란 녀석을 마리나에게 맡긴 분업도 효과적이었다.
“꼭 드넓은 옥수수밭 중앙에 트랙터로 길을 뚫어 놓은 것 같네.”
뿌듯하게 앞뒤를 꼼꼼하게 살피니 과연 한 줄의 넓은 길이 펼쳐져 있었다.
너비 8m 정도의 도로가 일직선으로 난 것이다.
불과 30분 전만 해도 여기에는 그레이 하귀드가 빽빽하게 자리를 채우고 서 있었지만.
지금은 전부 줄기가 잘려 나가 꽃과 꽃잎이 쪼그라든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번 팀플, 정말 마음에 드네.”
거의 무한 동력에 가까운 한소준의 힐과 마리나의 후속 처리가 연계되니 모든 것이 깔끔했다.
특히 체력과 부상 걱정을 일절 하지 않고, 오로지 전투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큰 이점이었다.
자기 본위의 전투.
나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아가는 전투를 좋아하는 내게는 최상의 조건이었다.
주우욱! 주욱!
싸늘한 사체가 된 그레이 하귀드의 줄기 안에서 수액을 쭉쭉 뽑아냈다.
그리고 미리 아공간에 챙겨 왔던 특수 용기에 담았다.
이 녀석들의 수액이 있으면, 앞으로 최상급 마력 포션에는 50%의 각성 효과도 함께 추가된다.
강화 포션만큼의 효과는 아니지만, 마력을 회복하면서 각성 상태도 함께 획득하게 되는 셈이다.
“솔직히 여기에 이렇게 길이 뚫릴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놀랍네요, 참.”
어느덧 내 뒤로 따라붙은 마리나와 한소준이 벌판이 되어 버린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꼭 만들어진 길만이 길은 아닙니다. 때때로는 직접 개척할 줄도 알아야죠.”
“하지만 리스크가 크니까요.”
“처음부터 우리 셋의 구성이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뭐, 보시다시피 생각대로 됐네요.”
“이걸로 이동 경로는 최소 하루가 단축됐어요. 게다가 B구역의 지옥 구간 두 개도 프리패스. 그러면…… 사실상 사흘 정도의 이득을 본 셈이에요!”
마리나는 우리가 취한 ‘이득’에 대해서 시기적절하게 짚어 줬다.
만약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이 우회 루트를 선택해야만 했을 것이다.
게다가 전리품을 절대로 주지 않는 ‘가비지 몬스터’를 상대하며, 느림보처럼 전진해야 했겠지.
“좋네요. 쭉쭉 들어갑시다. 오늘 안으로 C구역 초입까지 전력으로 가 보죠. 아, 출발에 앞서 녀석들 수액은 남김없이 채취하고요.”
나는 부지런하게 용기에 수액을 담고, 또 담았다.
이게 다 쓸모없는 액체 같아도 돈으로 환산하면, 한 병에 수십억 원의 값어치를 하는 내용물이다.
티끌 모아 태산!
이 던전에는 정말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