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105
34 게이트를 공략하는 법 (6)
“세레나라면, ‘세레나의 빙궁’에서 나온 그 세레나요?”
“네.”
나는 편지를 그러모았다. 편지는 답장이 없는 일부뿐이었지만, 이 일방적인 편지만으로도 상황을 확인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이혜원과 이재은은 정신없이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내 주변에서 숨을 골랐다. 편지를 모두 읽은 나는 시선을 올렸다. 답을 기다리는 듯한 이혜원의 시선에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충 이 안에서 있었던 일을 알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그건 모두가 모였을 때 이야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나는 레이에게 속으로 물었다.
‘다 기억했죠?’
━물론이다.
나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가죽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이 편지의 내용대로라면 이곳에 그 아이템이 있을 거다. 그 주머니를 벌린 순간 눈앞에 창이 떠올랐다.
「반복되는 세계의 ‘키 아이템(Key item)’을 발견했습니다.」
키 아이템?
그 창에 떠오른 말을 읽은 것과 동시에 시야가 암전되기 시작했다.
* * *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낯선 공간에 홀로 서 있었다. 심지어 내 몸조차 정상이 아니었다. 마치 유령처럼 투명해진 몸을 보며 나는 얼굴을 구겼다. 이게 무슨…….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다. 나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부르려 입을 열었지만, 마치 물속에 들어온 것처럼 편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레이!’
나는 레이를 불렀지만, 레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레이 또한 사라지다니.
결국 나는 주변 사람들을 부르는 걸 포기하고 주변을 훑기 시작했다.
곧 나는 이곳이 ‘얼어붙지 않은’ 성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미 며칠 동안 머물면서 샅샅이 훑었던 곳이지만, 얼음이 덮여 있지 않은 성은 마치 처음 온 곳처럼 낯설기만 했다.
나는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키 아이템을 건드리고 나서 온 공간이라. 내게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이라도 보여 줄 셈인가.
그런 거라면, 대충 감이 왔다.
내가 가야 할 곳도 명확하다. 나는 그동안 한 번도 직접 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첨탑이다.
복도로 나오고 얼마 걷지 않아 나는 이곳을 돌아다니는 시종들과 마주쳤지만, 당연하게도 시종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시종들의 얼굴은 지구에 사는 이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중간중간 청소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하인들 또한 눈에 들어왔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았다.
3획짜리 재능 번역과는 달리 통역은 5획이었으니까. 이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아쉬웠지만, 중요한 건 이들이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첨탑을 올랐다. 낯선 이들이 들어가는 걸 막는 듯 경비병 몇이 첨탑을 지키고 있었지만, 나는 여유롭게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유령이어서 이거 하나는 좋군.
나는 마침내 첨탑 끝에 있는 방에 닿을 수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통과해 이 모든 일을 일으킨 주인공과 마주할 수 있었다.
헤르맨 백작은 이 첨탑 안에 있는 것이 괴물이라고 말했지만, 내가 보고 있는 여자는 괴물이라고 불리기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은괴를 녹여 뽑아낸 것 같은 은발에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 눈동자. 투명하게 비쳐 보일 듯 희게 빛나는 피부까지. 거기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수하고 맑은 표정은 이 여자를 자신의 나이보다 몇 살은 더 어리게 보이게 만들었다.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요정 같은 모습으로 여자는 캐노피가 드리워진 자신의 침대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동안 한서현에게 말로만 들었던 첨탑의 방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한서현의 말대로 이 방은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이 방에 가구를 들인 것은 헤르맨 백작의 부인 세레나 헬렌이었다.
이 아이의 삶은 세레나가 오기 전과 후로 급격히 나뉜다.
그래서였을까.
아이는 세레나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단 한 번도 직접 얼굴을 맞댄 적이 없음에도.
똑똑, 문을 열고 시녀 한 명이 들어왔다. 시녀는 공포를 애써 억누르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여자는 시녀의 공포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시녀를 반가워했다.
시녀는 여자에게 언제나처럼 ‘세레나의 편지’를 전했다. 배가 고팠을 텐데도 여자는 식사보다 편지에 먼저 손을 뻗었다. 여자에게 전할 것을 모두 전해 준 시녀는 마치 이곳에서 도망치듯 떠났다.
여자의 눈은 편지에 닿았다.
다행히 이 안에서도 마나를 움직이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나는 ‘번역’을 이용해 편지를 훔쳐보았다.
「안녕, 오늘도 잘 지냈니?
언제나 추운 첨탑에 홀로 있을 네가 걱정되는구나.
내게 더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안타깝다.
곧 겨울이 온다는 건 알고 있니?
이 헤론의 땅은 늘 따사롭지만, 겨울이 되면 차가운 바람이 뺨을 할퀴어 대지.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네 겨울을 따스하게 만들어 줄 물약을 넣어 두었단다.
식사를 마치고 물약을 마시면 네가 이번 겨울을 따스하게 보내는 데에 도움이 될 거란다.
그럼 오늘도 사랑을 담아.
네 어머니가 되고 싶은
세레나 헬렌.」
여자는 그 편지를 읽고 아이처럼 웃었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저 여자가 손에 들고 있는 포션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식사를 마친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붉은빛이 도는 포션을 삼켰다.
나는 눈을 감았다.
포션의 효과는 빨랐다. 두근, 두근. 여자의 심장을 타고 흐르는 마나가 일제히 폭주하기 시작했다. 여자는 당황하며 자신의 심장이 있는 쪽을 손으로 내리눌렀지만, 심장은 미친 듯이 박동했다.
마인과 인간의 혼혈인 여자의 핏속에는 엄청난 양의 마나가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포션은…….
그 마나를 폭주시켰다.
핏줄을 타고 흐르는 피가, 그 피 안에 녹아들어 있던 마나가 폭주하기 시작하며 여자의 혈관은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여자는 고통에 온몸을 뒤틀며 비명을 질렀다. 빛을 내뿜으며 몸을 뒤트는 여자의 모습은 기괴했다. 차마 그 모습을 더 지켜볼 수가 없어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흐, 흐어, 흐어억!”
괴로운 신음이 탑을 울렸지만, 그 누구도 이 안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 신음을 들었을 게 뻔한 시녀도, 경비병도. 그 누구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들에게 이 여자의 생사 따위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아니, 차라리 이 여자가 죽기만을 바라 온 사람이었으므로.
하지만 이건 여자만 괴롭고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이게 시작이었다.
고통에 결국 여자는 그동안 억눌러 두었던 자신의 마나를 모두 놓아 버렸다. 파괴적인 마나는 그녀의 뇌를 그대로 지배했다. 비틀거리던 몸을 일으킨 여자는 괴로운 신음 대신 고막을 찢을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이성을 잃은 여자는 그야말로 ‘괴물’로 변해 버렸다.
그녀의 주변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탑 안에 있던 아름다운 방은 얼음이 되어 버렸다.
그 뒤로는 내가 예상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첨탑의 창문을 깨고 내려간 그녀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뒤늦게 이 상황을 눈치챈 사람들이 그녀를 막으러 왔지만, 이미 늦었다.
완벽히 각성한 그녀는 병졸 몇이 막을 만큼 약하지 않았으니까.
그녀의 손짓에 따라 나타난 얼음덩어리들이 주변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얼음덩어리를 맞은 이들은 그 즉시 얼음이 되어 굳어 버렸다.
운이 좋게 얼음덩어리를 피했더라도 그 근처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발끝이 얼어붙었다면 모든 게 끝이다.
서서히 얼어붙는 제 몸을 붙잡고 사람들 몇이 비명을 질렀다.
급격히 낮아지는 온도에, 사람들은 입김을 내뿜기 시작했다.
푸릇푸릇한 잔디가 돋아 있었던 땅은 곧바로 희게 얼어붙었고, 잎을 달고 있던 나무도, 검은 벽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지나가는 곳으로 모든 것이 희게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모든 것이 전부 다.
그 사실을 알아챈 이들은 그녀를 피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시종들이 먼저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쳤고, 그 뒤를 귀족 몇이 뒤따랐다.
호기롭게 검을 들고 나섰던 기사들 또한 자신의 앞에서 얼어붙는 동료를 보며 곧 검을 집어 던지고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에게서 도망칠 수 없었다.
그렇게 생동감이 넘쳤던 성은 내가 보았던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살아 있는 이 하나 없는 빙궁.
모든 생명을, 활력을 앗아 가며 여자는 슬프게 울부짖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 희미한 목소리가 하나 울려 퍼졌다.
━멈추고 싶어.
‘레이?’
아니, 레이가 아니다. 그렇다기엔 이 목소리는 높았으니까. 마치 여자처럼.
━싫어.
괴로움에 잔뜩 젖은 목소리는 내 안을 울렸다.
‘너…….’
━그만하고 싶어.
‘나도 알겠어, 너 괴로운 거 알겠는데…….’
━제발 나를 멈춰 줘.
대체 어떻게? 나는 그녀에게 그렇게 묻고 싶었다.
어느새 내 손안에는 그놈의 ‘키 아이템’이 들려 있었다. 이 모든 일을 끝내 줄 것은 그것뿐이라는 듯.
━부탁해.
어느새 주머니 밖으로 나온 노란색 물약이 내 손에 들려 있었다.
‘이걸로 어쩌라고. 너한테 던지라고?’
무어라 말을 잇기도 전 나는 그 세상에서 쫓겨났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침대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이재은이 내 얼굴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뭡니까?”
“가, 갑자기 쓰러지더니 갑자기 일어났잖아요! 놀랐다고요.”
“그거 미안하게 됐네요.”
“몸은 괜찮습니까?”
이혜원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갑자기 쓰러졌다고요? 제가 쓰러진 지 얼마나 됐습니까?”
“얼마 안 됐어요. 겨우 10분 정도가 지났으니까.”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 게이트의 공략법을 알아낸 것 같습니다.”
내 말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눈을 빛냈다.
“일단 사람들을 이곳에 모아 주세요.”
내 부탁에 이재은은 곧바로 방 바깥으로 나갔다. 이혜원 팀장이 내게 물었다.
“뭘 알아낸 겁니까?”
“예.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그날의 진실을 봤죠.”
“봤다고요?”
나는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예, 여기에 닿자마자 그날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 흘러 들어오더라고요. 일단 자세한 건 사람들을 모아 두고 하도록 하죠.”
곧 이재은이 모두를 끌고 왔다. 영 불만스러워 보이는 유선제도 벽에 기대어 자리를 잡았다. 유선제는 나를 보며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정말 ‘공략법’을 알아낸 게 맞아야 할 거라고.
나는 이 빙궁에 얽힌 이야기를 모두 알아냈다.
“성을 이렇게 만든 건, 세레나라는 여자입니다. 이 방의 주인이자, 헤르맨 백작의 두 번째 부인이었죠.”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얽힌 이야기를 꺼냈다.
백작의 권력을 노리고 이곳에 온 세레나에게 첨탑의 아이는 눈엣가시였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으로도 죽지 않는 괴물을 죽일 방법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어느 날 한 사람이 다가와 속삭인다.
그 아이를 죽일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다고.
세레나는 그 남자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랐다.
아이에게 약을 먹이기 위해, 세레나는 자신의 흉중을 숨기고 아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다.
사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거다.
직접 찾아가지도 않고 그냥 적당히 달콤한 말을 적은 편지만 주면 되니까.
아이가 세레나를 믿었을 때, 그리고 처음으로 행복을 느꼈을 때.
세레나는 아이를 괴물로 바꿀 약을 건넸다.
하지만 아이는 자멸하는 대신 폭주했고, 이 성 자체를 얼려 버리기 시작했다.
주머니에 있던 약을 꺼낸 내가 말했다.
“이 약만 뿌리면, 폭주가 가라앉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이성만 되찾을 수 있다면, 그 여자는 더는 위협 요소가 되지 못할 겁니다.”
나는 머릿속에 울려 퍼졌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말했다.
자신을 구해 달라고, 멈춰 달라고 외쳤던 그 간절한 목소리를.
제10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