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112
37 가장 밝게 빛나는 별 (1)
모래 폭풍으로 시선을 분산시킨 뒤 우리는 근처에 있는 숲으로 숨어들었다.
한서현은 잔뜩 지친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진짜 끝인가요?”
“아니, 이제 시작일지도 몰라.”
설록진은 곧 자신의 실패를 알게 될 거다. 그러고는 곧장 다른 작전을 짜겠지.
유선제를 다시 노릴지, 아니면 다른 쪽으로 손을 뻗을지는 아직 모르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인간은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당분간 저 녀석은 계속 감시해 둬.”
암살 작전이 실패했으니, 탑이 또 한 번 나설지도 몰랐다.
물론 배운 게 있으니 순순히 당할 것 같지는 않지만, 당분간은 보호해 줘야지.
“으, 정말 싫은데요.”
원래도 유선제를 그리 반기지 않았던 한서현은 이번 일로 유선제를 완전히 싫어하게 됐다.
그럴 만하지.
“나도 그 녀석이 좋아서 지키라는 건 아니야. 그냥 그 개고생을 하면서 살려 놨는데, 어이없이 죽어 버리면 화가 날 것 같아서 말이지.”
“알겠어요.”
내 말에 한서현은 잠자코 쥐돌이를 보냈다. 신호를 보내자 그림자를 타고 김재호가 나타났다.
무려 3주 만의 재회였다.
그동안 잘 있었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꼴을 보니 절대로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완전히 야만인 꼴이로구나.
‘예…….’
겨우 사람 꼴로 만들어 뒀더니, 이게 다 뭔가. 김재호의 머리는 어느새 산발이 되어 있었다. 삐죽삐죽 제멋대로 자란 머리도 머린데, 여기저기 찢어져 있는 옷은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갈아입으라고 옷도 가방 안에 넣어 줬던 것 같은데 그건 다 어디로 갔는지.
우리가 게이트에 들어갈 때 그 차림 그대로였다. 분명 목욕도 안 했을 거야. 기지에 데리고 가면 박박 씻기든가 해야지.
“너무 심심했어. 맨날 똑같은 거 먹으니까 맛도 없고.”
김재호는 우리를 보자마자 투덜거렸다.
“다음부터는 같이 가. 나 떼 놓지 마. 어엉? 알겠냐고.”
정말로 혼자 있는 게 싫었던지, 이런 말을 하면서 내 옷을 끌어당기기까지 했다. 이게 무슨 투정이냐.
“알았어, 인마. 이제 그만해. 옷 다 늘어나, 아니, 뭐야! 찢어졌잖아?”
힘 조절에 실패한 건지 내가 아끼던 티셔츠는 늘어나는 걸 넘어서서 찢어져 버렸다. 힘이 너무 세도 이런 게 문제구만. 찢어져 버린 옷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김재호는 내 뒤에 선 이혜원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여자는 누구지?”
“히이익!”
어둠 속에서 짐승처럼 빛나는 눈이 내가 봐도 무섭긴 하다만, 이렇게까지 놀랄 필요가 있었습니까. 나는 멋쩍은 얼굴로 재호에게 말했다.
“저 안에서 구조해 온 사람.”
“안, 안녕하세요.”
조심스러운 인사에도 김재호는 대답하는 대신 이혜원 팀장을 노려보기만 했다.
“나는 떼 놓고 갔으면서, 새로운 사람을 데리고 왔어…….”
그 점이 문제냐.
“으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나도 사실 저 사람을 달고 여기까지 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쪽에서 이혜원 팀장을 빼돌리는 게 최선이어서 말이지.
김재호는 이혜원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말했다.
“작지도 않고 귀엽지도 않잖아.”
이혜원 팀장은 상당히 장신이었다. 175cm 정도 되는 큰 키에 도시적인 외모로, 지금이야 저렇게 겁을 집어먹고 있어서 그렇지 원래는 굉장히 멋진 커리어우먼……. 아니,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걱정하지 마, 집에 들일 생각은 없으니까.”
“흥.”
콧김을 흥 하고 내뿜은 김재호는 그대로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어지간히 이혜원 팀장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사정이 이렇게 됐지만, 이혜원 팀장을 데리고 우리 집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
“너도 쟤 따라서 집으로 가 있어.”
내 말에 한서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보스는 어디로 갈 건데요.”
말 사이에 ‘저 여자랑’이라는 말이 빠져 있는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마라. 적당히 처리하고 갈 생각이니까.”
처리라는 말에 이혜원 팀장의 어깨가 다시 한번 떨렸다. 한밤중, 스산한 곳에서 입에 담기엔 지나치게 이상한 단어려나.
오해가 쌓이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겠다. 일단 이 녀석들 좀 떼어놓고.
“먼저 가 있어.”
“알겠어요.”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나와 이혜원을 흘긴 한서현은 바닥을 쿵 찍어 모래로 된 재규어를 불러냈다. 까맣게 물든 재규어 등에 올라탄 한서현은 그렇게 사라졌다.
“저, 저는 어디로 데리고 가실 생각입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주 믿음직한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갈 테니까.”
나는 두 사람을 기지로 보낸 뒤에 이혜원과 함께 차를 몰았다. 그렇게 해서 내가 도착한 곳은 언제 봐도 감탄이 나올 만큼 멋진 디자인의 거대한 저택 앞이었다.
근처에 차를 세워 둔 나는 이혜원과 함께 저택 앞으로 걸어갔다.
설명을 요구하는 이혜원을 옆에 세워 두고 나는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내 전화를 피하는 건 아닌가 했지만, 다행히 전화는 금세 연결되었다.
“금 박사님.”
[으응? 어! 이게 누구야! 되게 오랜만이네.]
“예, 오랜만이죠.”
나와 거리를 두고 싶다는 게 뻔히 느껴지지만, 어떻게든 비비면 그만이다.
“한 가지만 부탁합시다.”
[어? 부탁이라니, 뭘? 아니, 요새는 바빠서 전처럼은 시간을…….]
“일단 문 앞이니까 문 열어요.”
[뭐?]
“열어 주지 않아도 상관없긴 한데, 열어 주는 편이 좋을걸요.”
[아, 알았으니까! 가, 가만히 있어!]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요란한 목소리에 나는 전화를 끊었다. 이제 기다리고 있으면 알아서 나오겠지.
내 옆에서 이혜원이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 대체 누굴 만나러 온 거예요?”
“아까도 말했듯이 아주 믿음직한 사람이요.”
음, 음. 그렇지. 이렇게 무해한 호구가 또 없다니까. 얼마나 지났을까. 요란한 소리와 함께 멀리에서부터 착착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몇 겹의 문을 통과해 나온 금 박사의 꼴은 처참했다.
“후하! 오랜만!”
동글뱅이 안경에 반쯤 타들어 간 머리카락까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아아, 이런저런 실험을 하던 중……. 그러는 자네는 연락도 없이 여기에는 어떻게, 아니, 잠깐! 여기 아름다운 여성분은 누구시지?”
요란한 금 박사의 말에 이혜원이 내게 눈을 부라렸다.
자기를 이런 미치광이 과학자한테 정말 맡기고 갈 생각이냐고.
미안합니다, 이혜원 씨. 저에게는 딸린 자식, 아니, 팀원들이 있어서요. 나는 이혜원 씨를 금 박사 쪽으로 밀었다.
“잘 부탁합니다.”
“으응? 뭐, 뭘?”
“서, 설마 저를 여기에 두고 갈 생각은 아니죠?”
나는 이혜원 팀장의 간절한 시선을 무시하고 그대로 발에 마나를 보냈다. 공중으로 튀어 올라간 나는 두 사람에게 산뜻하게 인사했다.
“하하! 그럼 잘 부탁합니다!”
“이, 이, 나쁜 자식아!”
“뭐, 뭘 부탁한다는 거야?”
훌쩍 떠난 뒤로 두 사람의 비명이 들려왔지만 난 모르는 척했다.
━너 인마, 이거 유기야!
유기라니요. 좋은 보호자를 찾아준 건데.
나는 떳떳했다.
* * *
‘세레나의 빙궁’의 공략은 성공했지만, 시리우스의 주가는 하한선을 쳤다.
7성 헌터 둘, 6성 헌터 서른, 5성 이상의 서포터 서른, 짐꾼 마흔. 무려 총 인원 백둘로 시작했던 공략대에서 돌아온 사람은 고작해야 넷.
7성 헌터 하나, 서포터 셋.
공략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한 성적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진연화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기자회견을 준비했고, 호사가들은 시리우스가 이 일로 입은 타격을 계산하느라 바빴다.
“이 일로 시리우스가 입을 타격이 얼마나 될까요. 도화가 시리우스를 추월할 정도일까요?”
“김대권을 잃기야 했지만, 유선제가 살아남았잖습니까? 어쨌거나 S급 게이트를 공략하기도 했고요. 그 인원을 전부 다 잃고도 게이트를 공략했다는 점이 중요하죠. 어쩌면 7성급이 아니라, 8성급에 다다랐을지도…….”
“어머, 그 나이에요?”
“말도 안 돼.”
“하지만 서포터 넷만 데리고 S급 게이트를 공략한 건 맞지 않습니까? 기자회견에서도 그랬지요.”
어제 시리우스는 기자회견에서 S급 게이트의 공략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발표했다.
내용은 길었지만 요약하자면, S급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가 ‘예상보다’ 강해 사고가 터졌다는 거였다. 게이트 안에서 사고가 터지는 일이야 흔했지만, 와중에 게이트 공략을 성공했다는 게 중요했다.
시리우스는 게이트 공략이 성공했던 이유로 유선제의 성장을 꼽았다. 예상보다 강한 몬스터 때문에 모두가 휩쓸렸지만, 유선제가 각성해 이래저래 처리하고 나올 수 있었다는 거다.
덕분에 가뜩이나 최연소 7성으로 주목받던 유선제의 가치가 더더욱 뛰었다.
이 게이트에서 목숨을 잃은 헌터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세상은 패배자를 기억하지 않는 법이었다.
“정말 8성이라도 된 걸까요?”
만약 유선제가 8성에 오른 게 사실이라면, 시리우스가 이번 게이트에서 잃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터였다.
모두의 관심이 유선제에게로 쏠렸다.
하지만 그 모든 질문의 답을 해 줄 유선제는 ‘가족 같은 공략대원을 잃은 슬픔을 가눌 길이 없다’라며 자숙을 선언해 버렸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설을 내놓으며 호기심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선제에게서 그동안의 사정을 모두 들은 진연화의 얼굴엔 그 어떤 웃음기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요, 누군가 너를 죽이려 했다고.”
질질 끄는 말투도 잊은 채, 진연화는 낮은 목소리로 유선제를 보며 말했다.
“그러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게이트를 공략, 탈출에 성공했다고.”
“네.”
“그런데 범인은커녕, 우리를 도와준 사람들이 누군지도 모르겠다?”
“이름은 알죠.”
“이름이 뭔데요?”
“스미스요. 당연히 가명이겠지만요.”
잠시 유선제의 입가에 미소가 감돈 것 같았지만, 착각인가. 다시 바라본 유선제의 얼굴은 다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공략을 도와주는 대가로 그들에 대한 걸 알려 줄 수 없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흐응, 알았어요. 일단 우리의 적이 아니라는 거니까. 문제는 혜원이를 세뇌하고, 우리 쪽을 덮친 쪽이겠죠. ‘탑’ 쪽에는 세뇌 능력자가 없으니까…….”
다른 제3자가 있다는 뜻이다.
“그나저나 혜원이는 어디에 있어요?”
“……믿음직한 사람과 있습니다.”
“그래, 당분간은 죽은 걸로 해 두자고요. 범인을 찾기 전까지는.”
진연화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감히 시리우스를 건드렸다 이거지.
누군지는 몰라도 그녀를 물먹인 사람은 제대로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생각을 정리한 진연화는 뿔테 안경을 올려 쓰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어쨌거나 선제 씨도 수고했어요오. 이제 가서 푹 쉬도록 해요오.”
유선제를 내보낸 진연화는 뿔테 안경을 내려놓고 입술을 씹었다.
처음 옥션에서도, 그리고 이번 공략에서도. 이혜원을 통해서 정보가 샜다면 납득이 갔다.
“그럼 이번 일의 배후에 벨츠머츠가 있다는 건가?”
옥션에서 그녀를 이용하고 물건을 가져간 건 벨츠머츠였으니까. 벨츠머츠도 탑에 등반했을 테니, 이번 일에 탑의 빌런들이 나선 것도 그렇다면 이해가 됐다.
“하지만 그놈들이 왜?”
문제는 짚이는 동기가 없다는 것. 그냥 엿이나 먹으라고 들이댄 거라면 모르겠지만, 그쪽은 시리우스와는 단 한 번도 얽힌 적이 없지 않나.
나중에 이혜원이 돌아온다면 그때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다.
보풀이 일어난 후드 티를 챙겨 입은 그녀는 조용히 차를 타고 한 병원으로 향했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진연화는 이곳에 들렀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삼엄한 경비를 넘어 진연화는 한 병실에 다다랐다. 단 한 명만을 위해 준비된 병실은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꽃을 피워 내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 한 송이 한 송이 아름답게 피워 낸 백합. 그 사이에 놓인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그녀의 조부인 진용석이었다.
빌런들의 습격을 받고 혼수상태에 빠진 그는 생명 유지 장치에 의해 생명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진연화는 그의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오.”
빙긋 미소를 지은 진연화가 톡톡 진용석의 손등을 건드리며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번 일만 잘 처리되면 할아버지를 보내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에에, 아직은 안 되겠네요오.”
어딘가 섬뜩한 그 목소리에도 진용석은 깨지 않았다.
“거기에 누워서 기다려요, 아빠를 죽인 복수는 꼭 해 주고 말 테니.”
살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진연화가 속삭였다.
제11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