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141
46 테러, 테러, 테러 (3)
테이블 위에 올라간 제미니가 다리를 흔들거리며 말했다.
“그냥 빨리 끝내고 나가면 안 되는 거야?”
“굳이 빨릴 끝낼 필요 있어? 여기 아주 노다지라고.”
욕심, 그놈의 욕심이 문제였다. 조립가, 큐브는 아머리를 탈탈 터는 중이었다. 워낙 수집벽이 있으신 양반이라 이곳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테러하러 와서는 한다는 짓이 좀도둑질이라니.
“흐응.”
제미니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눈을 흘겼지만, 큐브를 말리지는 않았다. 트릭스터 또한 큐브를 거들었다.
“우리가 언제 시리우스의 심장을 털어 보겠어. 여기가 싹 다 털리면 그놈들 얼굴이 볼만하게 될 것 같지 않아?”
“으으! 지루하다고! 빨리 다 죽여 버리고 싶은데!”
“죽일 거야. 조금만 더 시간을 끌고.”
트릭스터의 말에 제미니는 눈을 흘겼다. 대체 왜 시간을 끌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그래야, 저기에 있는 인간들이 충분히 절망스러워할 테니까.”
그들에게 잡힌 인질을 살려 보겠다고 바깥에 온 헌터들. 그들은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구하지 못할 거다. 그제야 제미니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아하! 이마아안큼이나 시간을 줬는데도 너희는 한 명도 못 구했다, 뭐, 그런 거?”
빌런이라고 해서 감정이 없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누구보다 감정적이었다. 누군가의 가슴을 후벼 팔 방법 또한 많이 알았다.
“그래.”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좀만 기다려.”
“응.”
제미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잘 기다리나 싶었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눈이 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는 한 남자에게로 향했다.
트릭스터의 환영에 당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눈앞에 있는 녀석은 멀쩡했다.
“박춘태.”
“제 이름은, 그, 그게 아닌데…….”
“알 게 뭐야. 내가 박춘태라고 부르면 박춘태인 거지.”
제미니는 그 녀석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저와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덜덜 떠는 꼴이 우습지도 않았다.
“웃어, 웃으라고.”
제미니는 쿡쿡 그 녀석을 찔렀다. 그때마다 김춘태는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었다.
그 꼴을 보고 있던 조립가가 슬쩍 말을 던졌다.
“뭐 하러 그걸 괴롭히는데.”
“그냥 얘 얼굴만 봐도 열이 받잖아. 넌 안 그래?”
조립가는 제미니의 말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김춘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재능이 써먹을 만해도 영 마음이 가지 않는단 말이지.
이곳까지 왔지만 같은 팀원 취급이 아니라 인질들과 함께 처박아 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조립가는 툭툭 김춘태를 건드리는 제미니를 모른 체하고 다시 아머리 안쪽으로 들어갔다.
“제미니, 이거 봐.”
트릭스터의 말에 제미니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주먹만 한 루비가 박힌 목걸이라. 보기에 예쁘긴 하지만 제미니의 취향은 아니었다.
“여자라고 다 반짝이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거든?”
“잘 봐, 이게 뭔지.”
자세히 보니 그 목걸이를 이루고 있는 건 최상급 마정석이었다. 그제야 제미니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게 있으면 네가 좋아하는 불꽃놀이도 가능하지 않겠어?”
“세상에.”
제미니는 그제야 활짝 웃었다. 목걸이를 받아 든 제미니의 눈이 반짝였다.
“이거 줄 테니까, 괜한 짓 말고 조금만 참아라.”
트릭스터의 말에 제미니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응!”
잠깐만, 아주 잠깐만 참는 거다.
* * *
“저 안에 지금 제, 제 딸이 있다니까요?”
“상황은 알겠지만, 저 안으로는 지금 접근이 불가합니다.”
“그럼 어떡하라고오! 자식새끼가 저 안에서 무슨 꼴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참으라고?”
김용원은 쩔쩔매며 백화점 안으로 들어서려는 사람을 막았다. 그 여자 하나만이 아니었다. 딸을, 아들을, 때로는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을 구해 달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백화점 바깥을 가득 메웠다.
사방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서 밖은 통제 불가능한 아비규환 상태가 되었다.
뒤늦게 도착한 각범부가 사방을 통제하기 시작했지만, 각범부의 인원으로는 이 모든 이들을 막는 건 역부족이었다. 주변에서 차출된 경찰관들 또한 인원 통제에 손발을 보탰다.
“아, 아주머니!”
앞에서 울부짖던 중년의 여성이 실신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김용원은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팀장님, 그립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일은 꽝인 김용원은 사람들의 틈바귀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팀장님이 계셨다면, 상황 통제를 확실하게 해 주셨을 텐데.’
“저기, 밀지 마세요! 거기 까집니다, 더 넘어오시면…….”
통제된 선을 넘어온 사람을 본 순간 김용원은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낡은 후드 티를 입은 여자는 손가락 하나로 김용원을 그대로 밀어냈다. 각성자도 아닌, 자그마한 여자의 손짓 따위 간단하게 무시할 수 있었지만, 김용원은 힘없이 밀려났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얼굴을 알아본 김용원은 파리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진연화와 시리우스 길드원의 등장에 모세가 가른 홍해처럼 인파들 사이로 길이 생겼다. 그녀의 등장에 바빠진 건, 이 주변에 쫙 깔린 기자들이었다.
그녀의 앞을 누군가 막아섰다. 백화점 안으로의 진입은 누구라도 불허한다는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여,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으응? 내가 지금 여길 왜 왔는지 묻는 거예요? 감히 내 구역에 발을 디딘 빌런들이 있다는데, 집에서 쉬고만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오? 한번 얼굴이라도 봐야지이.”
그렇게 말하며 안경을 올려 쓰는 진연화의 얼굴이 서늘했다.
“그러니까 비켜 줘요, 내가 해결할 수 있게에.”
“죄, 죄송합니다만 통제된 구역 안으로의 진입은 불허합니다.”
“내 구역을 지키는 데에 왜 누구 씨 허락이 필요한 건지 모르겠는데에에.”
그렇게 말하는 진연화의 뒤로 선 시리우스의 헌터들이 일제히 눈앞의 경찰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세레나의 빙궁 사건 이후 공략을 쉬고 있던 터라 시리우스의 1군이라고 부를 수 있는 헌터들 전부가 이 자리에 와 있었다.
그중에는 최근 가장 촉망받는 유망주로 꼽히는 유선제 또한 있었다.
시리우스의 길드원을 본 인질들의 가족, 지인들의 얼굴에는 희망이 솟아났다.
어쩌면 유선제라면 이 모든 일을 해결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를 또 한 번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그야, 안쪽에 인질들이 잡혀 있으니 그렇지요. 섣부른 진입으로 인질들이 희생된다면 어떻게 합니까?”
유들유들한 얼굴로 나선 박철완은 진연화를 달랬다.
“저 안으로 헌터들을 섣불리 진입해서 피해를 키웠다, 그런 기사를 보고 싶으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말투가 부드러워서 그렇지, 협박이다.
진연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니 그냥 보고만 있으라고요오?”
“저희 각범부도 애를 쓰고 있으니…….”
“그 대단하신 각범부의 전력이 어떻더라아? 아마, 엄청나게 형편없었던 것 같은데.”
진연화의 말에 박철완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대 시리우스 길드 앞에서는 아니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당장 진연화의 어깨 뒤에 있는 유선제가 나선다면, 이곳에 있는 인원쯤은 순식간에 제압이 가능할 테니까.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고, 범인들과 협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섣부른 진입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게 오늘, 박철완에게 내려온 지령이었다.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것.’
* * *
근처 옥상에서 상황을 살펴보던 나는 유선제의 등장에 눈을 찌푸렸다.
“뭐야, 저 자식이 여기에는 왜 왔어?”
하긴 시리우스가 지은 백화점이니, 저 녀석이 여기에 오는 게 당연한가.
갑작스러운 등장이었지만, 내 계획에 방해가 될 인물은 아니었다. 아니, 이거 잘만 하면 꽤나 도움이 될 수도.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진 내 옆에서 한서현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구한 녀석이니, 한 번쯤 써먹어 줘야 하지 않겠냐.”
“저기에 있는 사람한테 어떻게 접근할 건데요?”
한서현도 만능은 아니다. 저렇게 인파가 몰려 있는 데서는 아무래도 접근하는 게 어렵겠지. 뭐, 이쪽에서 접근하는 게 어렵다면야 저쪽에서 찾아오게 만들면 그만 아닌가.
나는 가면을 툭툭 건드려 얼굴을 바꿨다. 세레나의 빙궁에서 활동했던 ‘스미스’의 얼굴이었다.
“갑자기 얼굴은 왜 바꾼 거예요?”
한서현의 질문에 나는 씩 미소를 지었다.
“귀한 인재신데, 모시러 가야지.”
“예?”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나는 한서현과 김재호를 둔 채로 옥상 아래로 내려왔다.
━까, 깜짝이야! 갑자기 뛰어내리지 말라니까!
자기 몸도 아니면서, 아주 난리다. 어차피 바람을 이용하면 다치지도 않는데.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레이의 말에 나는 쯧쯧 혀를 찼다. 하여간, 겁은 많아서는.
건물 아래로 내려간 나는 건너편 인도에서 유선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잠재력 S급 정도면, 저 멀리에서도 나를 알아볼 수 있겠지.
━다시는 저놈이랑 만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냐?
‘이왕 마주치게 됐는데, 저런 전력을 써먹지 않는 것도 아깝지 않습니까? 게다가 저 녀석을 이용하면, 벨츠머츠가 이 일에 끼어들었다는 걸 숨길 수도 있고요.’
내 계획에는 화력이 필요했다.
원래는 한서현의 모래를 이용해 깽판을 치려고 했지만, 그 경우 모두에게 한서현의 모래가 들키게 된다는 단점이 있었지.
하지만 유선제를 이용한다면, 적어도 대중들에게는 비밀로 해 둘 수 있을 거다.
━저 싸가지 없는 놈이 네 말을 순순히 들을까?
‘저번에 살려 준 은혜를 갚으라고 하면, 그래도 움직여 주지 않을까요?’
아니, 엄밀히 말해 은혜를 갚는 것도 아니다. 시리우스 길드 입장에서도 이번 참사를 되도록 잘 처리하고 싶을 테니까. 내가 그놈을 또 돕는 게 되는 거지.
길 건너편에 서 있는 나를 알아본 유선제는 옆에 선 진연화에게 무어라 속닥거렸다.
저대로 나를 향해 걸어오면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녀석은 사람들을 피해 구석으로 사라졌다.
“좋아, 적당한 데서 만나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네가 여기에는 무슨 일이지?”
“히익!”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뭐, 뭐냐! 언, 언제 내 뒤로 온 거야?”
“최근 번개를 다른 방식으로 써먹는 방법을 알아내서 말이지.”
번개를 튕긴 유선제가 그쪽으로 순식간에 몸을 이동했다.
“허.”
번개를 매개체로 자신의 몸을 전송하는 건가? 완전 사기잖아?
유선제의 단점은 몸이 유리라는 거였다. 하지만 이런 기술을 사용한다면, 유리 대포라는 단점도 어느 정도 상쇄가 되겠지. 일단 맞지 않으면 방어력이 구린 것도 별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
그동안 대체 얼마나 괴물이 된 건지.
하긴 과거에는 자신의 잠재력을 전부 발휘하지도 못하고 죽었으니…….
“사람 노려보는 건 그만하고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주면 좋겠는데.”
참 사람 민망하게 만들기는. 속으로 혀를 찬 내가 답했다.
“당연히 테러를 막으러 왔지.”
“네가?”
“저 안에 있는 건 탑의 빌런들이야. ‘세레나의 빙궁’에서 우리를 물 먹였던 그 셋이지.”
내 말에 유선제의 표정이 굳었다.
“그걸 어떻게 안 거지?”
“다 아는 수가 있지.”
“하긴 네 녀석은 그놈들을 쫓고 있다고 말했지…….”
고개를 끄덕인 유선제가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나를 도우러 온 건가.”
그 말에 닭살이 다 돋았다. 내가 널 도와? 참 나, 착각도 유분수다! 하지만 저렇게 착각해 준다면, 이쪽에서야 나쁠 건 없다.
“뭐, 그렇지.”
어차피 내게는 저 녀석의 협조가 필요했으니.
“트릭스터가 저 안에 있는 이상, 함부로 저 안에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다. 너도 그 녀석의 환영에 걸려 봤으니 알 거 아니야.”
트릭스터의 환영은 마치 현실과도 같다. 고위급 헌터까지 속여 넘길 정도로 그의 환영은 완벽했다. 환영만으로는 무엇도 해칠 수 없지만, 그래서 트릭스터가 늘 다른 놈들과 함께 다니는 거지.
환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으면 몸의 안팎이 뒤집혀 죽거나, 불타서 재가 될 거다.
셋은 제법 궁합이 잘 맞는 트리오였다.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나에게는 환상이 통하지 않아.”
저 환상을 깨려면 트릭스터를 직접 공격해야 했다. 그게 가능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서 ‘신호’를 보내면, 그때 들어오라고.”
“인질들은?”
유선제의 말에 나는 놀랐다. 이 녀석, 자기만 알더니 조금은 달라진 건가?
“인질들이 죽으면 곤란해지거든.”
아아, 기대했던 내가 바보다. 여전히 유선제는 유선제였다.
“이쪽에서 보호할 테니 걱정 말고 들어와.”
“알겠어.”
유선제는 별다른 말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널 어떻게 믿냐, 어떤 방법을 쓸 거냐. 그런 질문을 예상하고 잔뜩 긴장했던 내가 허망해질 정도로 깔끔한 동의였다.
이게 내가 알던 유선제가 맞나. 그래도 몸에 구멍이 뚫렸던 보람이 있구만.
“잘 부탁한다.”
그 말에 나는 입을 딱 벌렸다. 뭐? 잘 부탁해?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빛이 번쩍하더니 유선제의 모습이 사라졌다.
“도대체 뭐야.”
지금 내가 말을 나눈 사람이 유선제가 맞긴 맞나. 환상 아닌가. 아니면 도플갱어?
헛소리도 이쯤 해 둬야지.
그래도 유선제 저놈은 평생 독선적일 줄 알았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저놈도 변하긴 변하는구나.
“흠.”
어쨌거나 유선제의 협조도 구해 뒀다.
나는 백화점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하러 가 볼까요.”
제14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