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205
57 라스베이거스 (9)
차송진의 말을 전달받은 에디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그러니까 나, 에드워드 ‘알바트로스’ 시헬리스한테 교과서를 만들란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교과서를 만들라고?]
혹시 번역기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는 일이니(김재호와의 불통 이후로 자라난 불신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다시 한번 사실을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그래.]
진심인가?
교과서라니. 아주 어린 시절에 잠깐 만지고 만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 게다가 재료도 형편없었다.
범죄 조직의 리더라는 그 양반이 교과서를 만들라며 던져 준 것은 겨우 줄 따위가 그려진 공책 하나에, 볼펜 몇 개뿐이다.
그나마 색이 들어간 볼펜은 하나뿐이었는데 그건 에드워드의 손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빼돌려진 상태였다.
고로 에드워드에게 주어진 건 오로지 흑과 백을 표현해 낼 수 있는 검은색 볼펜이 전부였다. 창의력이 도저히 태어날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그냥 공책 하나뿐이잖아. 이걸로 어떻게 교과서를 만들라는 거야?]
[모른다. 나도. 그냥, 해라. 보스, 명령.]
마치 로봇 같은 딱딱한 말투에 에디는 머리를 움켜잡았다. 대화가 통하긴 하는데, 말을 하면 할수록 머리만 더 아파졌다.
어쨌거나 그래, 명령이라니까 해 줘야지.
에디는 그렇게 다른 일행들과 같이 거실에 앉아 볼펜을 들었다. 자신에게는 없는 삼색 볼펜을 든 애송이를 노려본 에디는 심호흡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최선을 다해 만들어 주겠어. 보기만 해도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멋진 교과서를 만들어 주마!
자신이 가르쳐야 할 과목은 ‘영어’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숨 쉬듯이 써 온 이 언어를 저 무지렁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생각에 골이 다 아팠지만, 그래도 자신은 에드워드 시헬리스였다.
어떻게든 해낸다.
아주 기본적인 단어도 못 알아듣는 꼬라지를 보니 알파벳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으니 알파벳부터 적어 내려가야겠다.
정신연령이 어리니까, 어린애들 수준에 맞추는 게 좋겠지.
에디는 열심히 꼬물꼬물 볼펜을 쥔 손을 움직였다.
A부터 Z까지. 귀여운 그림과 함께 설명을 곁들이자 자신이 보기에도 꽤 그럴싸한 첫 페이지가 완성되었다.
‘흠, 나 꽤 재능이 있을지도.’
그때 자신의 머리 뒤에서 꽥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뭐야, 왜 이렇게 잘해!”
어느새 자신의 뒤에 나타난 남자에 에디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뭐, 뭔데!]
“뭐, 뭐야!”
두 사람의 덤 앤 더머 쇼에 차송진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왜들 그러는데?”
“이, 이 자식이 막 소리를 지르잖아요.”
한서현의 말에 차송진이 두 눈을 끔뻑거리며 말했다.
“그야, 네가 먼저 소리를 질렀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
“지금 저놈 편을 드는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가! 한서현의 눈에는 배신감이 가득했지만, 차송진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사실을 말해 줬을 뿐인데 왜 배신감을 느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본 한서현은 깨달았다.
차송진 또한 호락호락한 인간은 아니라는 걸.
“어쨌거나 쟤가 그려 놓은 걸 보라고요.”
한서현의 말에 차송진은 고개를 쭉 빼서 에디가 그린 알파벳을 보았다.
“와.”
감탄이 나올 정도로 꽤나 괜찮았다.
그제야 자신이 그린 알파벳에 관심을 가졌다는 걸 안 에디가 우쭐하는 표정으로 자신이 만든 교과서를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그래, 한 번 구경해 봐.]
그림을 살핀 차송진은 양손을 들어 올려 따봉을 날렸다.
[멋있다! 완벽해!]
영어로 칭찬을 내뱉는 차송진의 모습에 한서현이 답답하다는 듯이 외쳤다.
“아니, 칭찬을 하라고 한 게 아닌데?”
“아니었어?”
아니야! 그렇게 외친 한서현이 차송진을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보스가 와서 저걸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잘했다?”
“그래! 그게 문제라고요. 내, 내가 그린 걸 봐요.”
국어를 맡은 한서현도 나름대로 열심히 교과서를 만들었다. 차송진은 한서현이 몰래 뒤로 찔러 준 공책을 펼쳐 보았다.
“음…….”
한서현은 제대로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차송진은 무어라 칭찬을 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봐도 완성도가 영 그랬다. 글씨도 삐뚤빼뚤했고 그림이랍시고 그려 놓은 건, 글쎄. 꿈에 나올까 무서운 형상이었다.
에디가 만든 교과서를 보기 전이었다면 아무런 생각이 없었을 테지만, 그걸 보고 난 다음이라 그런가. 유난히 허접해 보였다.
“재, 재료가 형편없어서 그래요!”
“으응?”
차송진은 한서현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료?”
“예! 나한테도 멋진 재료가 있었다면, 어? 저, 저런 거보다 훨씬 잘 그릴 수 있거든요?”
재료가 뭐든 간에 기본적인 실력이 처참한 이상 별로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은데. 차송진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목숨이 중요했으므로 적당히 입을 닫은 채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다.
[다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는 거야?]
에디의 말에 차송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우리, 이야기. 쇼핑. 갈까?]
[쇼핑?]
차송진의 말에 에디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가뜩이나 이 호텔에만 있느라 몸이 근질거리던 중이었는데 아주 잘 됐다.
다만 이어지는 말에는 그러면 그렇지 하고 입을 삐쭉거릴 수밖에 없었다.
[교과서. 만들. 쇼핑.]
[에이, 기대했는데.]
그렇게 투덜거린 에디가 차송진을 향해 물었다.
[그나저나 그쪽은 이름이 뭔데?]
[나? 나는…….]
그때, 옆에서 둘 사이의 말을 가만히 듣던 한서현이 끼어들었다.
“형 이름 알려 달래요?”
“헉, 그건 어떻게 알았어?”
“내가 바보도 아니고! 왓쪄넴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거든요? 저도 중학교까지는 제대로 나왔다고요.”
“그런 거치고는 잘 모르던데…….”
“뭐라고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 그나저나 이름을 알려 주는 게 왜?”
차송진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눈을 흘긴 한서현이 이번만 봐준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야, 저놈은 임시 교사잖아요. 언젠가 여길 나갈 사람인데 정체를 알려 줄 순 없죠.”
아하. 눈치를 본 차송진이 슬쩍 한서현에게 물었다.
“우리가 ‘그거’라는 건 아는 거야?”
“모르겠는데, 보스가 뭐라고 한 말 없어요?”
“없, 없는 것 같은데. 게다가 난 병실에 누워만 있어서 잘 몰라. 네가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아뇨, 우리 보스는요. 나한테 일을 잘 공유 안 해 주거든요.”
나, 진짜 보스를 좋아하거든요? 좋아하는데……. 그렇게 입을 연 한서현이 한탄하듯이 말을 쏟아 냈다.
“가끔 이렇게 대책 없이 일을 저질러 놓을 때마다 진짜 한 대 콱 때려 버리고 싶어요.”
그 말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차송진은 몸을 잘게 떨었다. 뭐, 뭔데! 순식간에 장난 아니게 우울해지잖냐! 강이신, 당신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러 왔던 건데!
그렇게 한서현과 차송진이 신세 한탄을 하며 어두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을 때.
“나는 김재호.”
김재호는 아무런 제지 없이 자신의 이름을 에디에게 말했다.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에디가 눈을 깜빡이자, 김재호는 자신의 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재호.”
그제야 김재호가 자기를 소개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에디가 재빨리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줴이호.]
그 형편없는 발음에 김재호의 얼굴이 구겨졌다.
“재호.”
[췌이호?]
뒤늦게 김재호의 행동을 깨달은 한서현이 김재호에게 달려왔다.
“아니, 형 그냥 이름을 말해 버리면 어떡해.”
“말해 줘도 못 알아듣잖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중요해! 내 이름이잖아.”
김재호는 자신의 이름에 자부심이 아주 넘쳤다. 소중하던 친구의 이름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이름이 어떤 이름인데. 제대로 말도 못 하고. 김재호가 에디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바보!”
[바아보?]
“뭐야, 나더러 바보라고 한 거야?”
[놔둬러 바아보라고오 한 궈야!]
“이 새끼, 이거 일부러 이래! 이거!”
한서현은 에디에게 달려들려는 김재호를 막아서며 말했다.
“형이 참자, 형이 참아! 안 돼, 저놈을 때려죽이면 보스가 화를 낸다고!”
한서현의 만류로 인해 다행히 살인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도대체 이 상황에서 뭘 하라는 건지. 차송진은 뭉크의 절규처럼 머리에 손을 얹었다. 강이신이 사라졌을 뿐인데, 벌써부터 개판이었다.
차송진은 애써 흩어지는 이성을 도로 모았다.
그래도 내가 형이다. 이 중에서는 제일 나이가 많다. 어른이라고! 차송진은 모두에게 외쳤다.
“일, 일단 모두 앉아 봐!”
차송진은 차분히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은 대충 부를 수 있는 호칭이라도 정해 두자. 그래야 서로 편할 거 아니야.”
차송진의 말에 한서현과 김재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서현은 언제든 나갈 수 있는 놈한테 자신의 이름을 알려 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고(사실 강이신이 돌아오면 한서현의 이름을 불러댈 테니 효용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고집임에도), 김재호는 자신의 이름을 다른 걸로 말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든 차송진은 뭐가 됐든 좋으니 그냥 자기가 좋은 대로 정하자고 했다.
“한이라고 불러.”
“재호.”
“나는 차.”
[에디.]
차송진의 눈물 나는 교통정리 끝에 겨우 통성명을 마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겨우 통성명을 마친 네 사람은 교과서를 만들 재료를 사기 위해 문구점을 찾았다.
거기에서 일행은 강이신이 주고 간 카드로 문구를 쓸어 담았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와 어떻게든 ‘에드워드’보다 나은 교과서를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처음에는 에드워드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같이 만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차송진의 솜씨를 질투한 한서현이 신경질을 내면서 차송진은 드레스 룸으로 도피했고, 뭐…….
그다음부터는 강이신이 본 그대로다.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강이신은 입을 떡하고 벌렸다.
“그러니까 교과서를 만들려고 한 거라고?”
“이게 다 저, 저 자식이 교과서를 너무 잘 만들어서 그런 거잖아요!”
한서현이 얼굴이 벌게진 채로 중얼거렸다.
“적당히 눈치껏 맞출 줄도 알아야지. 혼자서 그렇게 끝내 주는 걸 만드는 게 어딨어요?”
“그래서 저놈보다 나은 걸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이 난리를 피운 거야?”
수치심에 말을 잇지 못하는 한서현의 얼굴을 바라본 강이신은 곧 배까지 붙잡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그렇게 끅끅 웃어대던 강이신이 엉망이 된 거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건 이따가 다 같이 치우자.”
“……네.”
시무룩한 한서현의 어깨를 툭툭 두들긴 강이신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단 핫도그부터 먹고.”
* * *
다음 날, 카지노로 가는 길. 나는 카지노 앞 벤치 뒤에 몸을 구겨 앉은 꼬맹이를 발견했다. 나는 녀석에게 푸드 트럭에서 사 온 핫도그를 그대로 안겼다.
“뭔데요, 이건.”
“외부 음식 반입 금지인 걸 까먹고 핫도그를 샀지 뭐냐.”
“아저씨 진짜 오지랖 넓네요.”
꼬맹이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내 핫도그를 받아들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벤치에 앉았다.
그렇게 말없이 핫도그를 삼키던 때, 꼬맹이가 나에게 대뜸 말했다.
“아저씨 같은 사람은 저기 안 갔으면 좋겠어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하는 건지. 나는 애써 꼬맹이의 말을 가볍게 넘겼다.
“나도 너 같은 꼬맹이가 여기 앞에 안 있었으면 좋겠다.”
“나한텐 선택지가 없거든요.”
핫도그를 우물거린 녀석이 내게 말했다.
그 말에 가슴이 찡해졌다. 어째서 이렇게 어린 녀석이, 이런 말을 하는 거냐. 나는 녀석에게 말하고 싶었다.
선택지가 없긴 왜 없냐. 앞으로 네 인생이 얼마나 찬란할 줄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너 같은 어린 녀석에게는 널린 게 기회다. 그러니까 그런 우울한 소리 마라.
하지만 그 다음으로 이어진 녀석의 말이 내 말문을 막았다.
“아저씨한테는 있잖아요, 선택지.”
그 말에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보며 꼬맹이가 말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나를 봐요?”
“……아니, 없어.”
“네?”
선택지. 그런 게 나 같은 놈에게 있을 리가.
“나도 네 아빠랑 똑같은 인간이거든.”
제20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