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252
68 복수에 대하여 (3)
청 과장, 그러니까 설록진의 목표는 시리우스를 무너트리는 거였다.
유선제는 그 목표를 위해 필요한 수단이었다. 유선제를 무너트린다면, 굳이 다른 걸 건드리지 않아도 시리우스는 무너질 거라는 판단이다.
진연화는 시리우스를 개편하며 이전 시리우스, 그러니까 북극성의 황금기를 이루었던 이들을 모두 배제하고자 했다.
어차피 나이가 들어 은퇴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붙잡아 둘 수도 있었던 이들을 미련 없이 내쳤다.
그래, 그건 내쳤다는 표현이 알맞다.
‘적당한 직책을 주고 길드 내에 매어 둘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으니까요.’
각성자의 전성기는 재능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은 60대 전후에 은퇴하는 편이었다. 신체가 아니라, 마력을 주로 사용하는 각성자의 경우에는 그 은퇴 시기가 더 늦는 편이었고.
뛰어난 각성자일수록 신체 노화도 느려져 60대라고는 해도 겉으로 보기에는 젊은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지금 당장 세계에서 상위권에 랭크된 각성자들 중에도 몇몇은 70대 이상이었고.
실제로 진연화의 할아버지이자 제1세대 각성자로 꼽히는 진용석의 경우에도 사고를 당했을 때 70대였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40대 중반으로 보일 정도로 정정했고.
괴인들의 습격으로 혼수상태…… 라니, 누구도 못 믿을 만한 뉴스였지.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헌터가 습격을 당해 혼수상태라니.
━설록진이 관여했다고 보는 거냐?
‘그렇다고 말할 순 없지만,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죠.’
진강훈의 자살에 관해서 이야기했을 때, 설록진은 내게 모든 걸 털어놓지 않았다. 분명 내게도 말해 주지 않은 비밀이 있었던 거다. 애초에 ‘자살’이라니. 설록진이 너무나도 좋아하는 방식의 죽음이라서 말이지.
만약 설록진이 진강훈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면, 진용석의 사고 또한 설록진이 계획했다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나중에 시간이 나면 이쪽도 한번 캐 보면 좋겠는데요.’
설록진이 직접 움직인 거라면 증거가 남았을 리 없지만, 만약 그 진실에 닿을 수 있다면 진연화라는 든든한 아군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유선제를 구한 걸로는 부족한 거냐?
‘시리우스의 명운이 그놈에게 걸려 있을지는 몰라도 진연화에게 유선제는 쓰기 좋은 말,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니까요. 유선제를 구했다고 생색을 내 봤자, 저한테 제법 좋은 보상을 줄지 몰라도 설록진을 무너트린다는 계획에 합류하지 않을 겁니다.’
시리우스라는 길드를 이끌어 나가는 입장에서 모든 걸 걸고 그런 짓을 할 리가.
하지만 가족의 원수라면? 이성적인 판단은 상관없이 모든 걸 걸고 달려들고 싶어지지 않을까.
‘진연화는 언제나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말했어요. 특히 진용석이 그렇게 된 다음부터, 계속해서.’
그토록 끔찍하게 사랑했던 아버지의 원수가 설록진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진연화는 완전히 우리 편이 될 거다.
‘문제는 그게 만약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거지만요.’
과거로 타임머신이라도 타서 증거를 가지고 올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내가 알기로 미래에도 시간을 넘나들 수 있는 재능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껏해야 예지자 정도, 하지만 그 잘난 예지자도 과거를 읽어 내진 못했으니…….
‘그래도 세상은 넓으니까 언젠가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과거와 달리 시리우스가 무너지지 않게 하는 거다.
‘그걸 위해서는 유선제 그놈을 구해야 하고요. 그래도 처음보다는 싸가지가 좀 생겨서 다행입니다. 계속 예전 같았으면 정말 꼴도 보기 싫었을 텐데.’
━그러고 보니 저번에 이상할 정도로 협조적이긴 했지.
‘그래도 명색이 생명의 은인이니까요.’
적들이 계속 집요하게 유선제를 노려대서 허접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실 유선제는 쉬운 타깃이 아니었다.
당장 대한민국의 미래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각성자가 쉬운 타깃일 리가.
‘얼마 전에 테이카 쿠퍼를 만나고 와서 그런지, 영 전만큼 멋져 보이지 않긴 한데요…….’
미국의 스케일은 대단했지. 병원비의 스케일도 대단했지만…….
쩝, 어쨌거나 유선제는 당장 우리 쪽에서도 추적이 어려웠다. 왜냐, 공기 중에 떠다니는 정전기 입자까지 모두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있었으니까.
유선제 근처에는 모래를 접근시키기도 어렵단다. 근처에 마력이 이상하게 흐르는 걸 느끼면 곧장 그쪽으로 매서운 눈빛을 쏘아댄다나.
과거 유선제는 제대로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기도 전에 죽었지만, 살아 있는 지금은 자신의 능력을 개발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당장 백화점 테러 사건 때만 하더라도 전생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기술을 쓰지 않았는가.
전류를 이동시켜 순간 이동하는 그 기술은 유리 대포라는 유선제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유선제 정도 되는 딜러가 포지셔닝을 자유자재로 하면서 딜을 욱여넣을 수 있다? 그거 좀 끝내주거든요.’
가뜩이나 번개 속성의 공격은 그 범위가 말도 안 되게 넓은 편인데, 거기에 자유로운 이동까지? 아주 끝내준다.
유선제의 재능을 본 순간 욕심이 생겼다.
번개라는 건, 전기를 다룬다는 건 무척이나 매력적인 재능이다.
‘단순히 공중에다가 번개를 쏘아 내는 것 말고도, 여러 가지 응용 방법이 있죠. 당장 우리 몸을 움직이는 것도 전기 신호잖습니까? 만약 상대방 몸에 흐르는 전기 신호도 교란할 수 있다고 하면…….’
상대방의 움직임을 방해하거나, 정말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상대방을 죽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뭐, 굳이 그럴 필요 없이 정수리에 낙뢰를 한 번 꽂아 넣으면 바로 상대방을 죽여 버릴 수 있으니, 그렇게까지 섬세하게 능력을 다룰 필요까지야 없겠지마는…….
‘전기로 움직이는 전자기기들하고 상성이 얼마나 잘 맞을지 궁금하긴 한데요. 도어락도 막 딸 수 있으려나. 흠, 스마트폰 충전도 되려나…….’
━헛소리는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라.
레이의 말에 나는 헛기침을 큼큼 내뱉었다.
‘하지만 유선제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죠.’
━자기만 아는 머저리라는 거?
‘뭐, 그것도 엄청난 단점이긴 하지만……. 그놈을 위험하게 만드는 단점은 따로 있습니다. 시리우스에 속해 있는 유명 헌터라는 거죠. 일거수일투족이 누군가에 의해 계속해서 드러나는 위치인 데다가, 유선제의 일정을 알 수 있는 인원이 너무나도 많으니까요.’
당장 유선제가 위험에 빠졌던 세레나의 빙궁 공략 때만 하더라도 미리 스케줄이 유출되었기에 설록진이 그 판을 짜는 데에 성공한 거다.
물론 이혜원이라는 내부 조력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작전이었지만. 그 이후로 진연화도 이래저래 내부에 있는 사람들을 솎아 내며 재발을 방지하려는 모양이었지만, 설록진은 그 모든 방지책을 무용지물로 만들 거다.
‘적들은 무조건 유선제가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를 노릴 겁니다. 방심할 수밖에 없는 틈을 만들어서요.’
게다가 게이트의 경우에는 이런저런 사고가 일어났다고 일을 꾸미기도 좋으니, 범죄를 저지르기엔 완벽한 상황이었다.
‘마침 며칠 뒤에 게이트에 들어갈 일도 있고요.’
한서현이 물어다 준 정보로 나는 적들의 계획을 예측했다.
지금 바벨 아카데미에서 데리고 온 아이들을, 진연화는 유선제의 팀으로 만들려고 했다.
1군이 모두 사라진 지금, 시리우스에서 가장 절실한 건 간판스타를 받쳐 줄 팀이었으니까.
아무리 유선제가 잘났어도, 테이카 쿠퍼도 아니고 단신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유리 대포인 유선제의 경우에는 든든하게 앞을 받쳐 줄 전위가 필수였으니까.
진연화는 단순히 유선제를 보조하는 걸 넘어서서 함께 움직일 수 있는 팀을 만들고자 했다.
‘그게 곧 시리우스를 대표하는 1군이 될 가능성이 크죠.’
그러려고 큰 출혈을 감수하고 바벨 출신의 루키들을 전부 쓸어 온 거겠지.
이번에 바벨 출신들이 모인 건, 일종의 1차 테스트다. 1차 테스트에서 가능성을 보인 몇몇을 뽑아 2차 테스트로 게이트를 공략하러 간다는 계획이다. 이런 식으로 몇 번의 시험을 거쳐 제대로 된 1군을 만든다는 게 진연화의 생각이겠지마는…….
‘잘 되진 않을 것 같은데요.’
━어째서?
‘그야, 바벨의 상위권들은 전부 자기만 아는 멍청이들이거든요.’
바벨에서 높은 순위를 얻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은, 남을 찍어 누르더라도 자신이 돋보이는 거였다. 물론 어느 정도의 팀플레이는 필요하지.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 돋보이는 거다.
‘팀플레이를 익히기에는 최악의 환경이라는 거죠, 바벨은.’
그리고 그건 모두 교장으로 앉아 있는 그 여자 때문이다. 그 여자를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장담하건대, 그 팀은 망할 겁니다.’
괜히 ‘바벨’ 출신들이 사방으로 퍼지는 게 아니라고.
* * *
“오합지졸이 따로 없네.”
유선제의 평가는 냉혹했다. 그 앞에 선 훈련생들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자신들이 생각해도 지금 보인 건 ‘추태’라는 말로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으니까.
유선제는 짧게 혀를 차고 그대로 사라졌다.
훈련생들은 저희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들을 가만히 보고 있던 기원호 트레이너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대체 왜 그런 겁니까?”
각자 재능을 보여 줄 때까지만 하더라도 괜찮았다. 바벨에서 갈고 닦은 그들의 실력은 확실히 거짓이 아니었고, 눈앞에 나타난 환영을 도륙 내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팀플레이에서 발생했다.
처음 4단계까지는 괜찮았다.
그 정도는 바벨에서도 흔히 내 주던 조별 과제 정도였으니까.
문제는 5단계에서부터였다. 바벨에서의 시뮬레이션과는 달리 시리우스에서 특별히 만든 이 단계에서는 변수가 나타났다.
변수의 종류는 다양했다.
보스 몬스터가 소환한 졸개 몬스터라든가, 갑자기 날아든 장애물이라든가. 여러 가지 요소들이 그들을 방해했다.
평상시였더라면 그들은 이런 요소에 잘 대처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눈앞에 유선제가 있었고,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유선제의 눈에 띄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장 빛나야 한다고.
반절은 이렇게 생각했다. 보스 몬스터에게 얼마나 많은 딜을 넣는지가 중요하다.
또 반절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요소들을 잘 처리하는 모습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만 들으면 반씩 자연스럽게 자신이 할 일을 나눠 가지면 되는 문제가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들의 모든 행동이 ‘자신이 가장 빛나기 위한 거’였다는 거다.
소환된 몬스터를 처리하려던 훈련생 하나는 너무 큰 기술을 써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던 이의 시야를 방해했다.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던 이는 동선을 고려하지 않고 앞으로 나가다 다른 이와 엉켜 넘어졌다.
갑자기 날아든 돌덩어리를 처리하기 위해 보호막을 깔았던 각성자는, 동료의 주력기 하나를 흡수해 버렸다. 보호막 안쪽에서 터진 마력 폭발에 휩쓸린 이만 세 명이다.
오합지졸이라는 유선제의 평가는 오히려 후한 거였다.
“최악이네요. 바벨 출신이라는 말이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기원호 트레이너의 평가에 훈련생들은 기가 죽었다.
“후…….”
한숨을 쉰 기원호가 훈련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 일주일입니다. 그 안에 어떻게 해서든 팀워크를 끌어내 봅시다.”
그 말에 훈련생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서로를 원망하는 그 눈빛엔, 기원호가 바라는 동료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제25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