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257
69 리더의 자격 (1)
“셋?”
“저기에 있어요.”
한서현은 이어진 길을 눈으로 가리켰다. 우리는 피의 길을 따라 걸었다. 걸음을 옮기며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지.
아무리 한지무가 무슨 수를 썼다고는 해도 이 정도로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졌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은 마력의 흔적은 이들의 대처가 발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걸 보여 줬다. 제대로 된 전투조차 벌어지지 못했다는 거다.
여기에서 죽어 나간 건 바벨의 졸업생들이었다. C급 게이트는 몇 번이든 공략했을, 그런 애들이라고. 거기에 유선제에, 트레이너까지 따라붙었다.
처음 게이트에 들어온 헌터들도 이보다는 나았다.
바벨의 졸업생들이, 시리우스에 뽑힌 루키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발버둥이나 치다 죽어 나가다니.
이건 말이 안 된다.
내 표정이 굳자, 우리 일행의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뭐라고 말을 할 때라는 걸 알았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겨우 한 시간. 겨우, 한 시간이 지났을 뿐이라고.
길을 따라 걸은 우리에게 나타난 것은 두 번째 학살의 현장이었다. 여태까지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제법 전투의 흔적이라고 부를 만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는 시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기원호 트레이너……. 그는 억울하다는 듯이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완전히 뜯겨나가 사라져 버린 하체만 아니었더라면 아직까지 살아 있다고 착각할 만큼 표정이 생생했다.
‘뭐라도 해 보려고 한 것 같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네요.’
기원호 트레이너의 재능은 상대방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기억할 수 있는 거였다.
트레이너를 하기에는 최적의 재능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몬스터를 상대하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기원호 트레이너는 그저 그런 헌터 아카데미를 졸업해 바로 트레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각성자들을 지켜보고 그들을 헌터로 키워 냈지만, 자신이 직접 전투에 참여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랬기에 이런 상황에서 완전히 패닉한 거겠지.
하지만 당신이 조금만 더 침착하게 대처했다면, 이런 상황까지 벌어지진 않았을 텐데.
‘상대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기억할 수 있다는 건, 몬스터의 움직임도 완벽하게 기억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목숨을 직접 끊어 내진 못해도, 충분히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될 법한 능력인데…….’
후, 이미 죽은 사람의 능력을 아까워해서 무슨 의미가 있으랴. 나는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옆에는 또 다른 헌터의 시체 조각이 널려 있었다. 그의 옆에는 역시나 비슷한 모양으로 터져 있는 몬스터의 사체가 있었다.
‘마지막 발악으로 자신의 마력을 전부 폭발시킨 것 같은데요.’
━마력 폭발이라니.
제 몸의 마력을 폭발시키는 것도 웬만한 각성자는 못한다. 자신의 마력에 대한 완전한 이해력과 통제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그런 각성자가 죽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여기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괴롭히던 몬스터 하나는 저승길 동무로 삼았으니 이 녀석은 만족했을까. 나는 다시 무릎을 펴고 섰다.
“저기……!”
한서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미 공중에는 내가 만들어 낸 마력으로 짜 올린 얼음 창이 떠 있었다.
크으륵!
괴상한 소리를 내는 땅개가 눈에 들어왔다. 저 땅개가 이곳의 참극을 만들어 낸 범인인 걸까. 겨우 C급에 불과한 땅개가? 내 생각에 대한 반박이라도 하듯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땅개의 몸이 쩌억 반으로 갈라졌다. 그 끔찍한 모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저런 거라면 정신이 나갈 만하네.”
“미, 미친!”
그 모습을 본 차송진이 뒤로 물러나다 그대로 자빠졌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는 미리 공중에 띄워 놨던 얼음 창을 그대로 놈의 몸에 꽂아 넣었다.
퍽, 퍽. 땅개의 몸은 그대로 꼬치가 되어 땅바닥에 박혔다. 그 상황에서도 바닥을 벅벅 긁는 녀석의 질긴 생명력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내 옆에서 치고 나간 한서현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흑마력이네요, 저 녀석을 움직이고 있는 거요.”
“흑마력?”
“예, 전에도 한 번 느껴 본 적이 있는 사람 거예요. 혈마요. 그 사람의 마력이 느껴져요.”
피를 다루는 탑의 빌런인 혈마가 왜? 아니, 잠깐. 우리를 제외하고 살아 있는 사람이 셋 있다고 했지. 설마 그 한 명이 혈마?
“혈마가 여기에 와 있다는 거야?”
분명 게이트에 들어선 사람은 한지무 하나뿐이었다. 끔찍한 상상이긴 하지만 한지무가 혈마를 직접 업고 이 안으로 들어온 게 아닌 이상에야, 이 안에 혈마가 있을 리가…….
“아니요, 그건 아닌데. 저 녀석의 몸에서 그 사람의 마력이 느껴져서요. 그러니까 마치, 무언가를 심어 놓은 것처럼…….”
━흠, 확실히 흑마력에 있어서는 저 녀석이 나보다 유능한 것 같다. 나에게는 그냥 덩어리진 마력밖에는 느껴지지 않거든. 저 땅개에 네가 손을 얹어 주면 확실히 파악이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절대 사양입니다.’
나는 치를 떨었다. 저기에 손을 얹으라고? 당신 양심에 손이나 얹어요! 아, 손이 없지?
━……너는 양심이 없고.
‘당신이 내 양심 해 준다면서요!’
━오늘부로 퇴사한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한서현이 있었다. 한서현은 땅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땅개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 녀석의 몸에서 천천히 무언가가 딸려 나왔다. 검붉은 피를 본 한서현이 말했다.
“이거예요, 놈을 조종하고 있던 것.”
피를 빼앗긴 놈은 곧 먼지가 되어 바스러졌다.
“세상에.”
[방금 그게 뭐야?]
에드워드의 말에 내가 간단히 답했다.
[저 괴물을 조종하고 있던 거.]
한서현은 공중에 뜬 검붉은 피를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새로운 인형을 발견한 듯한 김재호처럼. 그 위험한 눈빛에 나는 대뜸 소리를 질렀다.
“지지야, 그거 버려!”
“그냥 버리기에는 아깝지 않아요? 연구할 가치가 충분할 것 같은데…….”
“으으! 그거야 그렇지만, 그렇게 들고 다니다가 또 다른 몬스터에 들러붙으면 어떡하냐!”
“아하.”
고개를 끄덕인 한서현은 배낭에서 분홍색 캐릭터가 그려진 텀블러를 꺼내 그 안에 피를 옮겨 담았다. 으아, 저 텀블러는 이제 다 썼다. 캐릭터 상품이라 무려 4만 원을 주고 산 건데…….
━그 무슨 이 상황에 맞지 않는 좀생이 같은 생각이냐?
‘그러게요.’
하지만 하필이면 그 텀블러여야만 했냐고!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럼 이제 유선제를 찾으러…….”
“아, 아직 저쪽에 살아 있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한데요.”
“뭐?”
가면을 뒤집어쓴 나는 한서현이 가리킨 곳으로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한서현이 말했다. 이곳에서 살아 있는 사람은 우리를 제외하면 모두 셋이라고.
한지무. 유선제.
그리고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한 사람.
비탈길 아래, 돌 밑에는 파리하게 질린 여자가 두 눈을 부릅뜬 채 있었다. 곧 깨질 것처럼 위태로운 방어막을 올리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온통 피에 젖어 있었다. 얼굴뿐만 아니다. 눈, 코. 입에서까지 흘러내린 피가 의미하는 바는 딱 하나였다.
한계에 한계까지 몰릴 정도로 재능을 혹사했다는 것. 저건 몸이 보내는 신호다. 재능을 사용하는 걸 멈추라고. 아니면 너는 죽게 될 거라고. 하지만 그녀는 방어막을 내릴 수 없었을 거다.
그랬다간, 눈앞에 있던 땅개가 자기를 덮쳤을 테니까.
우리를 봤음에도 여자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눈가에는 절망이 깃들었다.
“아.”
맞다, 나 지금 검은 가면을 쓰고 있었지? 웃는 얼굴이 드러난 가면은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수상쩍긴 할 거다.
“흐, 흐흑.”
“오해입니다. 저는 그쪽을 구하러 온 거라고요.”
나는 황급히 그렇게 덧붙였지만, 여자의 눈에는 여전히 불신이 가득했다.
“방어막 내려 봐요. 그러다가 다쳐.”
내 말에 여자는 오히려 방어막에 힘을 더했고, 그 결과…….
내 앞에서 피를 토하며 기절하는 여자를 본 나는 혀를 찼다.
“이런.”
* * *
“내가 보고 있을게.”
기절한 여자를 데리고 움직일 수는 없었다. 차송진은 기꺼이 그 여자를 떠맡는다고 말했다.
“포션 좀 먹여 둬. 혹여 깨어나거든, 우리는 그쪽을 구조하러 온 거라고 말해 두고. 우리 정체는 비밀이지만, 목적까지 비밀로 할 필요는 없으니까.”
내 말에 차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 위험한 건 없는 것 같지만…….”
차송진의 눈에는 불안이 비쳤다. 그 어떤 전투 능력도 없는 차송진을 이곳에 혼자 남겨 둘 수는 없다. 나는 김재호에게 말했다.
“재호가 여기 남아서 송진이 형 좀 봐 줘.”
“나도 같이 가고 싶은데…….”
김재호는 입을 삐죽였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차송진의 표정은 그제야 편안해졌다.
이제 유선제를 만나러 갈 때였다.
내 눈짓에 한서현은 모래로 독수리를 불러냈다.
“좀 멀어요.”
모래로 된 독수리를 타고 우리는 날았다. 숲은 곧 초원으로 이어졌다. 초원을 날며 나는 땅 밑에 있는 흔적을 살폈다. 날카로운 무언가에 뚫린 땅들과 까맣게 타들어 간 풀들.
아까 우리가 봤던 땅개의 시체들도 중간중간 흩어져 있었다.
유선제와 한지무의 전투가 이어졌던 흔적이다. 나는 그 흔적을 훑으며 머릿속에 그들의 전투를 그렸다.
━뭐라도 알아냈냐?
‘풀들이 까맣게 타들어 간 부분이요. 모두 땅이 뒤집힌 곳이었어요.’
━그 말은?
‘유도했다는 거죠, 번개를.’
나 또한 유선제를 상대할 방법으로 전에 생각해 뒀던 거다. 유선제의 번개에는 단연코 취약한 약점이 있다.
‘제가 괜히 몸의 전기 신호를 조종할 수도 있진 않을까, 생각한 게 아니라니까요.’
정수리에 번개를 꽂아 넣기 전에 몸을 마비시킨다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테니까.
‘물론 상대방의 몸을 조종하는 거니 엄청나게 어렵겠지만요. 기본적으로 각성자는 자신의 몸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있고, 마력 또한 그러니까. 하지만 유선제는 S급이잖아요. 마력량이 어마어마한 괴물이요.’
그러니까 어쩌면 마력의 차이로 찍어 누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지. 하지만 유선제는 그 정도까지 자신의 능력을 키우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꼬인 건 모두 유선제 탓입니다.’
━제대로 능력을 갈고닦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요,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죠. 그 녀석에게는.’
나는 멀리에서 보이는 번쩍이는 빛에 정신을 집중했다.
내 예상대로 한지무의 옆에는 금속으로 된 창들이 여러 개 떠 있었다. 유선제의 번개는 번번이 그 창에 가로막혀 무의미하게 흩어졌다. 유선제의 몸은 엉망진창이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유선제의 시체를 볼 뻔했다.
갑자기 공중에 나타난 독수리에 한지무는 깜짝 놀란 듯이 우리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공중에서 거친 숨을 내쉬고 있던 유선제의 낯빛이 내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밝아졌다.
나는 공중에서 가볍게 몸을 날렸다.
“보스!”
한서현이 놀란 듯 소리쳤지만, 내 몸은 무사히 땅바닥으로 착륙했다. 나는 나를 향해 날아드는 창을 가볍게 피했다. 검은 독수리에 타고 있는 에드워드가 위에서 두 손을 뻗어 창의 운동에너지를 흡수해 준 덕분이다.
나는 유선제를 보며 가볍게 말을 던졌다.
“내 도움 필요해 보이네.”
백마, 아니, 검은 독수리를 탄 구원자의 등장이다.
제25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