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288
77 꿈에서 깨야 할 때 (5)
“여긴 어떻게…….”
뒤에서 그들에게 말을 건넨 건, 치앤츠리앤이었다. 물리적으로 이곳에 도착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어떻게든 일이 끝나기 전에 이곳에 도착했다.
그녀의 뒤에 있는 독수리를 본 순간, 차송진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너도 말 안 들었네.”
“……보스를 내버린 그놈이랑은 달라.”
한서현은 입을 삐죽거렸다.
“어쩌면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
그 모습이 퍽 귀여워 보였지만, 그냥 귀엽게만 여길 일이 아니었다. 차송진은 알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한서현은 언제든 치앤츠리앤을 저 지옥에 던져 버릴 사람이라는 걸.
“어, 어쨌거나 잘 왔습니다.”
치앤츠리앤이 여기까지 온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나 싶었지만. 차송진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치앤츠리앤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제가 여기에 온다고 크게 달라질 게 없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요.”
“그, 뭐, 예.”
입술을 달싹거린 차송진이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여기, 여기에라도 앉으실래요?”
조금 전까지 차송진이 앉아 있던 바위를 바라본 치앤츠리앤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됐습니다.”
“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치앤츠리앤은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으윽…….’
바보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닫은 차송진을 대신해서 입을 연 건 한서현이었다.
“납치범들이 일부러 마력 폭주를 일으켰을 리 없어. 그들의 목적은 그 사람을 무사히 데리고 가는 걸 테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한서현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이건 사고야. 그래, 사고. 하지만 말이야. 마력 폭주라는 건 쉽게 일어나지 않아.”
헌터 아카데미를 다녔던 한서현은 알고 있었다. 각성자가 폭주를 일으키는 상황은 극히 드물다는 것을.
자신의 격에 맞지도 않는 아티팩트를 무리해서 사용하려고 했거나, 아니면 독에 당했다거나, 아니면…….
“정신적으로 무너질 만큼 끔찍한 일을 당했다거나.”
한서현은 그렇게 말하며 치앤츠리앤에게 말했다.
“우리한테 말 안 한 게 더 있는 거지?”
검게 가라앉은 한서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치앤츠리앤은 숨을 삼켰다. 그녀의 차가워 보이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그게 문제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치앤츠리앤의 말에 한서현은 그녀의 앞으로 성큼 발을 옮겼다.
“우리한테 말하지 않은 게 뭐야.”
“그녀의 어머니, 린이 죽은 건, 샤오첸의 잘못이었습니다.”
그 말에 차송진이 앓는 소리를 냈다.
“……맙소사.”
* * *
“꿈을 꾸고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하고 말았다. 그만큼이나 놀라운 소리라서. 나는 다시 입을 닫고 레이에게 물었다.
‘자고 있단 말입니까?’
━저 여자애를 잘 봐라. 의식이 있는 것 같은가.
‘폭주를 일으켰으니 의식을 잃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만…….’
폭주 때문에 정신을 잃은 게 아니라, 꿈을 꾸는 사이 폭주가 시작됐다는 건가. 아니, 애초에 이걸 폭주라고 말할 수 있는 건가. 확실히 능력이 변질되긴 했다. 그녀의 환상이든, 뭐든, 그녀의 마력이 주변에 있던 각성자들의 마력을 모두 쪽쪽 빨아먹고 괴이한 현상을 일으키고 있었으니까.
‘그럼 일단 샤오첸을 깨우는 게 먼저일 것 같군요.’
단순히 끔찍한 꿈에 갇혀서 이 모든 일을 일으킨 거라면, 그 꿈에서 꺼내 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이 되면 좋겠다만…….
‘일단은 세 사람 사이에 연결된 마력부터 끊어보죠.’
━끄응, 알겠다.
나는 레이의 도움으로 세 사람을 엮고 있는 마력의 연결부부터 공략해 보기로 했다. 내 몸에 있는 마력을 꺼내 세 사람의 사이에 이어진 줄로 흘려보냈다. 저우샤오첸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력은 세 사람의 몸을 단단히 묶고 있었다.
게다가 연결이 단순하지도 않았다.
마치 이리저리 엉켜 버린 털실 뭉치를 푸는 것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구잡이로 뜯어댔다간, 그 반동으로 저우샤오첸이나 내가 다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니 시간이 들어도 천천히 마력의 줄을 하나하나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을 동시에 떼어 내는 건 불가능한 일인데요.’
나는 가장 바깥에 있는 금발의 여자에게 이어진 연결부터 떼어 내기로 했다.
천천히 나는 여자와 저우샤오첸을 이은 마력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연결을 잃은 마력은 주변으로 흩어졌고 그렇게 몇십 개의 줄을 떼어 낸 끝에 나는 무사히 여자를 빼내는 데에 성공했다.
“하아.”
나는 숨을 내쉬며 연결에서 빠진 여자를 바라보았다. 금발의 여자는 마치 솜이 전부 빠져 버린 솜인형처럼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숨이 이어지고는 있었지만,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숨이 약했다. 피부는 푸석푸석했고, 손톱과 발톱은 모두 빠져 버렸다. 마력이 모두 빨려 시체처럼 바짝 마른 여자를 보며 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살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저 여자를 동정할 시간은 없다. 아직도 저우샤오첸에 매인 사람이 둘이나 남았기 때문이다.
━다른 여자부터 건드리는 게 좋겠다.
‘레이디 퍼스트입니까? 역시 기사도가 있다고 해야 할지. 상태는 저 친구가 더 심각해 보이는데 말입니다.’
내 농담에 레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저 남자가 이 모든 일의 중심이다. 가장 연결이 강해. 그러니 마지막에 건드는 편이 낫다.
확실히, 그런 거라면 이해가 갔다. 나는 여자까지 같은 방법으로 무사히 떼어 냈다. 이쯤 되니 내 몸에 있는 마력이 거의 남지 않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마나석을 꺼내 마력을 충전했다. 나는 그제야 내 온몸이 땀에 젖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후아.”
여태까지 가면을 쓰고 있길 고집했던 나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가면을 벗어 허리띠에 걸어 두었다. 이마에 맺힌 땀이 속눈썹을 거쳐 아래로 떨어졌다.
‘이러다가 수분 부족으로 죽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마실 물은 챙기지 않았냐?
‘……그게 말입니다, 챙기긴 했는데 전부 에드워드가 들고 있어서.’
━하여간 보스라고 폼 재고 다니다가, 이렇게 큰코다치게 될 줄 알았다!
다음에는 나도 짐을 좀 들고 다니든가 해야지. 나는 손등으로 이마에 잔뜩 맺힌 땀을 훔쳤다.
후아, 짧게 숨을 내쉰 나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남자와의 연결을 끊고 저우샤오첸을 깨우면, 될 거다. 아마도.
━아마도?
‘저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요!’
그냥 납치된 사람만 찾아 주면 되는 줄 알았지, 이렇게 갑자기 시한폭탄 해체 시뮬레이터를 하게 될 줄 알았냐고!
마음을 다잡은 나는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마지막 남자와의 연결을 끊는 건 쉽지 않았다.
단순히 보조 배터리 역할을 했던 다른 각성자들과는 달리 이 녀석은 CPU쯤은 되어서 그런지, 연결이 확실히 많았다.
‘두 배는 되는 것 같네요.’
남자와의 연결을 모두 해제하는 데까지 한 시간은 걸린 것 같았다. 마침내 모든 연결은 끊겼다.
하지만 연결을 모두 해제한 다음에도 주변을 감싸고 있는 마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까보다 약해진 것 같긴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부담스러울 정도로 사방을 짓누르고 있었다.
여전히 저 각성자들의 몸에서 뽑힌 마력은 저우샤오첸의 지배를 받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저우샤오첸을 깨우기 전까지는 이 사태가 해결될 기미가 없는 것 같죠.’
━그래 보이는구나.
문제는 어떻게 깨우느냐 하는 거겠지. 잠깐 따끔한 번개 맛을 보여 준다거나, 아니면 냉각수로 깨운다든가. 원초적인 방식이 가장 잘 통할 것 같긴 한데…….
그렇게 저우샤오첸을 깨울 방법을 고민하던 중, 내 걱정을 덜어 주는 일이 생겼다.
“오.”
저우샤오첸의 눈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 거다. 분홍빛으로 빛나고 있는 그녀의 동공을 바라본 순간,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
기껏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저우샤오첸은 멍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엄마?]
[아, 미안하지만 내가 누구의 엄마가 되기에는 좀 부족한 부분과 넘치는 부분이 있어서…….]
━그게 무슨!
나름대로 웃으라고 한 소리건만, 레이와 저우샤오첸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차갑게 굳은 저우샤오첸의 표정을 본 순간 나는 입을 뻐끔거렸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요…….’
내 예감은 곧 맞아떨어졌다. 우리가 있던 호텔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허억.”
나는 곧바로 마력으로 몸을 띄웠다. 벽이 물렁물렁해지더니 그대로 녹아내렸다. 나는 그 틈으로 쏟아지는 세 사람을 받아냈다.
마치 모래성이 무너지는 것처럼, 호텔은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벽 틈에 갇힌 사람들만 해도 수십이다.
“젠장.”
그들 전부를 구하는 건 무리였다. 나는 눈에 보이는 몇 사람을 낚아채 호텔을 빠져나왔지만, 붕괴는 계속되었다.
내 눈에 닿는 모든 곳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황급히 몸을 뒤로 날렸다. 호텔을 잡아먹은 붕괴는, 호텔에서 옆에 있는 빌딩으로 넘어갔다. 호텔 앞에 있던 도로도, 그 위에 있던 자동차들도. 모든 것들이 ‘녹아내렸다.’
나는 눈앞의 광경에 눈을 깜빡였다.
“환상…….”
저우샤오첸의 재능은 환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환상은 나에게 통하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이 단순히 눈을 속이는 환상이라면, 말이다.
저우샤오첸은 자신의 환상을 물리적으로 추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막대한 마력, 그리고 추출.
‘이건 환상 따위가 아닙니다.’
그녀가 꿈꾸던 세상을 만들어 낸 거다.
순식간에 빌딩 숲이 사라지고 그곳에 꽃이 피어 있는 평원이 나타났다. 반경 두 블록이 완전히 날아갔다. 내가 구했던 사람들도, 모두 저 녹아내린 풍경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수천 명이 있었을 두 블록을 간단히 지워 버린 저우샤오첸은 평온한 얼굴로 풀숲에 앉아 있었다.
그녀를 보며 나는 욕을 중얼거렸다.
“젠장……, 저건 완전히…….”
괴물, 괴물이 아닐까.
저우샤오첸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내 꿈에 당신은 초대되지 않았어.]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도 저우샤오첸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저를 간단히 지워 버릴 수 있는 괴물에게 저를 살려 달라고 설득할 수 있을까요?’
━글쎄, 일단 웃어 보는 건 어떠냐? 그래도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데.
레이의 조언대로 나는 저우샤오첸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그리고 저우샤오첸의 반응은 싸늘했다.
[기분 나빠.]
[어째서! 웃었잖아!]
━아, 네놈의 웃는 얼굴이 영 형편없다는 사실을 까먹었구나.
‘그거 전혀 위로가 안 되는걸요!’
나는 나를 ‘지우기’ 위해 날아드는 파괴적인 마력을 피해 몸을 뒤틀었다.
저우샤오첸이 말했다.
[내 꿈에서 사라져.]
제28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