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33
12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4)
그날 이후로 한서현과 내 관계는 제법 괜찮아졌다. 적어도 전처럼 툴툴거리지는 않았다.
형에 대한 죄책감도 전부는 아니지만, 많이 걷어 낸 모양이고 말이다.
훈련도 차근차근 잘 따라왔다.
“오늘은 상체를 했으니까 내일은 하체다. 조금만 쉬었다가 스켈레톤 수업을…….”
“우웨에엑.”
한서현은 내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머리를 처박았다. 제대로 된 훈련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저렇게 힘들어하다니. 기초 체력이 얼마나 없으면 이렇게 되냔 말이다.
━그러게나 말이다. 내가 훈련할 때는 말이야, 저 정도는 식후 운동으로 가볍게 할 정도였는데.
‘기억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크흠! 왠지 그런 것 같다는 거지.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도 꼰대질하기 위해 말을 지어내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왠지 눈빛이 불순한데 말이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체력 훈련이 끝났다면 그다음 훈련으로 넘어가야겠지.
“숨 좀 돌렸으면 스켈레톤 좀 불러 봐.”
“예에?”
“체력은 바닥났겠지만, 마력은 그대로잖아?”
제대로 된 훈련을 하려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야 하는 법이었다.
한서현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스켈레톤을 불렀다. 요 일주일간 수백, 수천 번을 불러 대서인가. 확실히 소환 시간이 짧아졌다.
천천히 스켈레톤에게 다가간 나는 곧바로 단검을 휘둘렀다. 스켈레톤은 뒤로 무게중심을 옮기며 내 단검을 피해 냈다. 그다음으로 이어진 두 번째 공격. 놈의 옆구리로 날아든 공격.
텅.
스켈레톤의 팔뚝 뼈가 단검을 중간에 막았다. 나는 앞으로 발을 디디며 놈의 목을 노렸다.
오호라, 생각지도 못한 움직임에 나는 눈을 빛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스켈레톤은 곧 내 손에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방금 그 움직임.”
“아.”
“나랑 비슷했는데?”
내 말에 한서현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러면 안 되나요?”
“아니, 그래도 되지. 그냥 좀 놀라워서 말이야.”
누군가 나를 보고 배운다는 게, 나에게는 익숙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뭐, 그래도 꽤나 늘었어.”
아직 어설프기 그지없지만, 엉거주춤 서 있는 게 전부였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발전이었다.
“그럼 이, 이따가 다시 봬요. 보스.”
그렇게 말한 한서현은 뒤로 그대로 넘어갔다.
아, 한서현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보스로 완전히 고정되었다. 막상 들어 보니 열일곱 살짜리 꼬맹이한테 보스라고 불린다는 게 좀 그런 것 같아 다른 호칭을 찾아볼까 했는데 영 적당한 게 없었다.
가장 무난한 호칭인 ‘형’은 한서현에게 특별한 단어가 되었으니 말이다.
형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때마다 가뜩이나 어두운 얼굴이 더 어두워져서 손전등이 다 필요할 정도라고.
철창으로 다가간 나는 김재호에게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어이, 김재호. 배는 안 고프냐?”
내 말에 레이가 태클을 걸었다.
━언제는 행동으로 다가가겠다며?
“하지만 이렇게 말이라도 걸지 않으면 재호는 날 바라봐 주지도 않는걸.”
━갑자기 역겹게 그게 무슨 소리냐?
이 드립을 모르는 건가. 하긴 차원이 다르니까. 나는 큼큼, 속으로 헛기침을 내뱉은 뒤 변명처럼 레이에게 속삭였다.
“이제 내가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으니, 정을 붙일 차례라는 거죠.”
김재호는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다만 인간의 언어로 답변을 하지 않을 뿐이다. 혹은 못 하든가.
지금도 잔뜩 경계하는 눈으로 내 말을 경청……하고 있지는 않고 자기 발톱에 있는 때나 빼고 있었다.
━하나도 안 듣는 것 같은데.
“그래도 이렇게 얘기하다가 보면 몇 마디 정도는 닿지 않겠습니까?”
━이 정도 속도면 언제 되는 거냐?
“언젠가는 되겠죠, 뭐.”
그리고 그 언젠가는 생각보다 일렀다.
* * *
대충 스켈레톤에 대한 정보를 알아낸 나는 당연히 한서현의 다른 소환물로 관심을 돌렸다.
“이제 쥐랑 그 새를 불러 봐.”
한서현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쥐들을 불러왔다. 스켈레톤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던 한서현이었지만, 나름 쥐와 새는 잘 다루고 있었다.
“정보를 수집하는 데에는 자신 있어요.”
하긴, 이것들로 내 위치를 특정해서 찾아왔을 정도니까.
적어도 각성자 범죄 팀보다 훨씬 유능했다.
쥐라면 징그러운 것만 생각했는데, 한서현이 부른 쥐는 생쥐에 가까운 것이 좀 귀여웠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쥐보다는 햄스터에 가까운 생김새랄까. 눈도 죽은 거치고는 똘망똘망한 것이. 죽은 쥐치고는 꽤 귀여웠다.
“이름도 있어?”
“쥐돌이요.”
“…….”
내 시선에 한서현이 급하게 덧붙였다.
“나, 나중에 제대로 된 걸 부르게 되면 멋진 이름을 지어 주려고 했어요.”
“진짜?”
“네, 아주 세상에서 제일 멋진 이름으로 지어 줄 거거든요?”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떠들고 있는 사이 어딘가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어느새 철창에 바짝 붙어 있는 김재호의 부담스러운 눈이 들어온 거다.
“아이쿠, 깜짝이야!”
나는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그렇게 외쳤다. 내 외침에 뒤를 돌아본 한서현도 어깨를 떨었다.
“뭘 그렇게 보는 거야?”
나는 김재호의 시선을 따라 그대로 눈을 옮겼다. 한서현의 손바닥 위에 올라와 있는 쥐가 보였다.
“쥐가 궁금해서 그래?”
내가 김재호에게 그렇게 말을 건네자마자 한서현이 앉은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안 돼요.”
그것으로도 모자라 한서현은 재빨리 자신의 쥐를 뒤로 감췄다.
“걱정하지 마, 안 줄 테니까.”
“지, 지금도 저렇게 노려보고 있잖아요!”
한서현의 말대로 김재호의 시선은 한서현에게, 아니, 한서현이 숨긴 쥐에게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한서현이 움직일 때마다 도르르 굴러다니는 김재호의 눈동자를 본 나는 둘 사이를 가로막은 뒤 김재호를 달래듯 말했다.
“어허, 재호야. 이건 먹는 거 아니에요. 상해도 옛날에 상한 거라고. 엉? 알겠어요? 저걸 주워 먹으면 죽어요. 지지야, 지지.”
뭐지, 지금 엄청나게 한심하다는 눈으로 날 보지 않았나? 김재호 주제에 저런 눈빛도 할 줄 알았단 말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재호도 알겠대.”
“전혀 아는 얼굴이 아니잖아요!”
한서현은 기겁하며 쥐를 저 멀리로 보냈다. 김재호는 그에 실망하고 곧바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아무래도 먹고 싶은 건 아닌가 본데. 서현아, 쥐 다시 불러 봐.”
“내가 왜요!”
“그냥, 가까이만 가지 말고. 다시 불러와 봐.”
한서현은 조심스럽게 쥐를 다시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쥐가 등장하자 김재호는 철창에 딱 붙어서 다시 쥐를 바라보았다. 아주 어찌나 열심히 보는지 눈이 다 반짝거릴 정도였다.
“공격할 거 같지는 않은데.”
그보다는 오히려 좋아하는 것 같달까. 하긴 미래의 김재호도 유난히 작고 반짝이는 것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내가 줬던 사탕 껍질을 따로 모아 두기도 했었지. 쥐돌이는 반짝이와는 거리가 좀 있지만, 작고 귀엽긴 하니까.
“어차피 죽어도 다시 되살릴 수 있지 않나?”
내 말에 한서현이 기겁하며 말했다.
“손상이 심한 건 안 돼요. 게다가 한 번 죽었던 시체는 다시 되살리기 힘들다고요. 마력이 배는 든다고요.”
“그래도 한번 저 녀석을 믿어 보는 건 어때?”
“후, 알겠어요.”
내 말에 한숨을 내쉰 한서현은 쥐를 철창 근처로 움직였다. 김재호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쥐에게 가져다 댔다.
“좀만 더 가까이 보내 주자고.”
한서현은 마지못해 손가락을 앞으로 튕겼다. 그 움직임을 따라 쥐가 김재호의 손가락을 타고 올라갔다.
김재호는 자신의 손바닥에 올라앉은 쥐가 신기하다는 듯이 빤히 바라보았다. 아주 연약한 걸 만지듯이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쥐를 쓰다듬는 걸 보니 웃기지도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곰돌이 인형이나 사다 넣어 줄 걸 그랬네.”
“그러게요.”
쥐를 빼앗아갈까 봐 뒤로 숨기는 김재호를 보며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 * *
그날 이후로 김재호는 쥐를 아꼈다. 이미 죽은 쥐에게 자신의 밥을 나눠 주는 걸 봤을 때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 붙인 게 생겨서 다행이었다.
그때 레이의 요란스러운 말이 머리를 울렸다.
━오! 좋은 생각이 났어, 좋은 생각이!
“또 뭔데요.”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이야기하지.
여태까지와는 달리 무언가 중요한 걸 나에게 말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마지못해 레이가 시키는 대로 조용한 곳으로 갔다.
“또 쓸데없는 꼰대질이나 하려고 나를 부른 거라면…….”
━말을 뭐 그리 서운하게 하나! 다 자네 잘되라고 한 말인데.
“어쨌거나 절 부른 이유가 뭔데요.”
━다른 놈의 훈련을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네놈이 강해지는 게 제일 중요하지 않나?
레이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금도 훈련은 계속하고 있잖습니까.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그렇지.”
아무리 밟아 대도 이미 정해진 마력 이상으로 빠르게 나아가는 게 불가능한 자동차처럼 내 꼴도 딱 그랬다. 아무리 컨트롤이 좋으면 뭘 하나. 그 안에 담긴 마나의 양 자체가 형편없는데.
━아티팩트의 힘을 빌리면 되잖나.
“말이 쉽죠. 마나의 양을 늘려 주는 물건은 엄청나게 희소하다고요. 그런 영약을 구하려면 몇 년은 더 있어야 할 겁니다.”
레이의 말처럼 몸에 있는 체내 마력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무협지에 나오는 영약처럼 섭취만으로 마력을 늘려 주는 것도 있었지만, SS급 상위 게이트에서나 나오는 아이템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물건도 최소 2년 뒤에나 등장한다.
━그게 아니라 마나석을 이용할 수 없을까 해서 말이네.
“마나석을?”
마나석으로 사람의 마력을 높일 수는 없었다. 마나석의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건 아티팩트뿐이다. 아티팩트에나 마나석의 마나를 이용할 마나 회로를 새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인간의 몸에는 마나 회로를 새길 수가…….
아! 나는 곧 깨달았다.
“내 몸에는 마나 회로가 엄청나게 깔려 있다고 했죠.”
마치 아티팩트처럼 말이지. 내 몸에 깔린 회로를 이용한다면 마나석의 마나를 받아들이는 게 가능할 거다.
“이거 될지도?”
지금 나에게 가장 부족한 건 화력이었다.
이론상 나는 모든 속성의 마나를, 그러니까 모든 속성의 재능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약했던 건 몸에 있는 마나의 양, 그러니까 마력이 현저하게 낮았기 때문.
하지만 그러려면 일단 마나석의 마나를 내 몸에 전달해 줄 아티팩트가 필요했다.
나는 곧바로 금 박사에게 전화했다.
“혹시 아티팩트도 만들 수 있습니까?”
[간단한 거라면 가능하지만…… 취미 정돈데?]
“아니면 장인을 소개해 줄 수…….”
막 그렇게 말하려고 했을 때였다.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냥 적당한 도구와 장소만 있으면 될 것 같아.
레이의 말에 나는 말을 바꿨다.
“아니다, 제가 사용할 수 있는 공방이 있습니까?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이면 좋겠는데요.”
[좋아, 내 집으로 오라고.]
“집이요?”
[그래! 여러 가지를 만드는 취미가 있다고 했잖아. 공방 정도야 애저녁에 지어 뒀지. 시설도 좋아.]
뭐어, 금 박사의 재력을 생각하면 시설이야 좋겠지마는……. 진짜 이 인간 집에 가도 되는 걸까?
[마침 혼자 있거든!]
30대 남자가 혼자 있다고 집으로 불러 봤자 전혀 기쁘지 않다고!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당장 가겠습니다.”
제3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