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353
90 누군가의 잿불 (1)
김석훈은 몰라도, 김영호를 죽일 이유 같은 건 설록진에게 전혀 없었다. 김영호까지 처리한 건, 그날 그 자리에 김영호가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그저 운이 나빴다고 말할 수는 없다. 김석훈을 설록진에게 내민 것까지는, 완벽하게 내가 계획한 짓이니까.
하루아침에 다정했던 남편, 그리고 고생 끝에 겨우 얻었던 늦둥이 아들을 잃게 된 김석훈의 부인은 관을 끌어안고 오열하다 그대로 실신했다.
남편의 악행을 모르는 그녀에게는 이 모든 것이, 사무치게 원망스러우리라. 나는 사람들에게 실려 가는 그녀를 바라보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수도 있지.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며 말이다.
‘어쩔 수 없는 희생 같은 게 아니었잖습니까. 그냥 제가 부주의해서…….’
━그래, 부주의했지. 그래서 죽은 거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죽음을 신경 쓰지 않는 삶도 있을 거다. 결국 네놈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설록진, 그놈을 죽여 없애고 이 세상을 구하는 거 아니겠느냐? 큰일을 하면서 발생하는 부수적인 피해는 신경 쓰지 않는 게 네놈의 정신 건강에도 좋을지 모르지.
‘신경이 쓰인다면요?’
나는 위선자다. 예전부터 그랬다. 설록진이 뒤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 외면하고, 당장 내 눈앞에서 살린 목숨에 안도했다. 내 말에 레이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제대로 신경을 써야지.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레이가 내게 속삭였다.
━똑똑해지라는 말이다.
‘그렇게 말해도 하루아침에 기적적으로 똑똑해질 수는 없는데요.’
━그럼 노력이라도 해야지. 한 번 생각할 거, 두 번 세 번 생각하고 대비해야지. 이번 일만 해도 저 녀석에게까지 생각이 미쳤다면, 이런 희생은 없었을 거 아니냐.
레이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맞다. 내가 조금 더 세심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겠지.
━아예 신경 쓰지 않을 각오를 했다면 상관없겠지. 하지만 네놈은 그럴 수가 없잖냐. 그러니 그만큼 미리 신경 쓰라는 거다.
레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례식장을 벗어나며 나는 레이의 그 말을 머릿속에 새겼다.
똑똑해져라.
내 멍청함으로 잃을 사람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 머리라도 열심히 굴리라는 거지.
맞다, 레이의 말대로 나는 조금 더 똑똑해질 필요가 있었다.
장례식장을 빠져나오며 나는 그곳에 있는 국회의원들을 모두 눈에 담았다. 설록진은 물론이고 미리내당의 중역들은 모두 이곳에 얼굴을 비쳤다.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미묘한 신경전을 보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김성득에 이어 김석훈까지. 설록진은 당에서 자신을 든든하게 지지하던 사람들을 잃었다.
국회의원치고는 젊은 나이, 연예인을 연상시킬 만큼 잘생긴 외모, 거기에 압도적인 인기까지. 당내에서도 설록진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이들은 많았다. 그들이 입을 다물고 설록진을 인정해 주고 있었던 건 미리내당의 원로라고 할 수 있는 김성득과 김석훈이 설록진을 지지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설록진을 받쳐 주던 든든한 뒷배는 모두 사라졌다. 지금 당장에도 설록진을 힐끗 바라보는 국회의원들의 눈초리에 불손함이 담겨 있었으니, 앞으로 어떻게든 저 안에서 움직임이 있을 거다. 저들의 움직임에 설록진이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는 나도 모른다. 극단적으로 받아칠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낼지.
장례식장을 빠져나온 나는 곧바로 금 박사에게로 향했다. 이미 뉴스를 들어 알 만한 건 알고 있겠지마는, 나는 금 박사에게 자세한 사정을 전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쪽, 어머니에 대해서는 중국에 있는 정태석을 털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을지도요.”
김석훈이 직접 어머니를 처리한 사람이 그라고 말해 주었으니, 그쪽에 정보를 더 캐 볼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환대한 환영 인사를 해 줄 생각이었는데, 환영 인사를 더욱 격하게 해 줄 이유가 생겼달까. 그 정보는 듣는 대로 금 박사에게 전달해 줄 생각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지 꽤 된 것 같았지만, 그래도 어머니니까. 금 박사에게는 그녀의 마지막을 알 권리가 있었다.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금 박사가 내게 꺼낸 말은, 내가 그의 입에서 들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였다.
“그 애, 내 동생.”
금 박사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어떤 애였는지 물으면 좀 그렇나? 물론 당신도 잘 모를 거라는 거 아는데, 그냥. 그 애가 죽었다니까 기분이 좀 이상해서. 얼굴도 못 본 데다가, 같이 산 적도 없는데 새삼 동생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지만 말이야. 그래도…….”
고개를 밑으로 수그린 금 박사가 제 손끝을 매만지며 말했다.
“왠지 나 때문에 죽은 것 같아서.”
“아뇨, 잘못을 했다면 저죠. 제 잘못입니다, 그건.”
내 말에 금 박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는 곧바로 고개를 붕붕 소리가 날 정도로 저었다.
“아니, 네 탓을 하려던 건 아닌데. 아니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 잘못 맞고요, 부정할 생각 없습니다. 금 박사님, 댁 동생은 나 때문에 죽었어요. 미안합니다. 사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거 알아요. 당신에게도, 그 아이에게도, 그 아이의 어머니에게도.”
말 한 마디로 이미 죽은 사람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쯤, 나는 지독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사과는 앞으로의 맹세로 이어진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게 할 겁니다. 조금 더 똑똑해져서, 조금 더 신중해져서, 그래서 이런 식으로는 더는 사람을 잃지 않게, 그렇게 노력하려고요.”
내 비장한 말에 놀란 금 박사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어, 정말로 난 네 탓을 하려던 게 아니었어. 그냥 속이 좀 복잡해서…….”
“예, 이해합니다.”
내 말에 금 박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했던 말처럼, 숨을 내뱉는 금 박사의 얼굴은 참으로 답답해 보였다.
“어쩌면 난 그 애를 미워한 것 같거든? 그 애가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쓸모가 없어져 버렸으니까, 근데……. 그 애는 잘못이 또 없잖아. 그 애의 행복은, 내 불행과 교환한 게 아니잖아. 근데 또…….”
가만히 생각하면 갑자기 미워져서. 금 박사는 두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아, 확실히 나도 그쪽이 미워하는 그놈이 좀 미워졌을지도 모르겠어.”
“예?”
“응, 그래. 우리 모두 내 동생 녀석의 죽음에는 저마다 손을 대고 있잖아. 그래도 가장 큰 잘못은 그놈이 저질렀잖아, 안 그래?”
안경 너머의 눈이 희번덕 번쩍였다.
설록진, 어쩌다 보니 금 박사에게도 설록진에게 복수해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 준 셈이 됐다.
“그러니까 나도 복수 같은 걸, 좀 해 보려고. 아마도? 그러니까 복수를 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지만 말이야.”
더듬더듬 말을 잇는 금 박사의 말에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도 다행히 이번 일로 아예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김석훈 전 대통령의 자살 전후로 저택에 들어가던 설록진의 영상을 확보해 뒀어요.”
김석훈 의원의 집에 설치되어 있던 CCTV까지는 깔끔히 처리한 설록진이지만, 내가 몰래 달아 놓은 CCTV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깔끔한 화질의 영상을 얻어 둘 수 있었다.
설록진이 김석훈 의원을 살해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김석훈 의원의 죽음에 어떤 식으로든 관련돼 있다는 증거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당장 이 자료를 쓴다고 설록진의 위치가 흔들릴 일은 없을 거다.
이 자료를 풀어도 언론을 움직여 우리의 목소리를 묻는다면 또 하나의 음모론으로 흘러가 버릴 테니까. 그러니 이 자료를 쓰는 건, 먼 미래의 일이 될 거다. 어쩌면 평생 못 써먹을지도.
그 말을 하고 있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본 금 박사가 물었다.
“너 말이다. 그놈을 어떻게 상대하고 싶은 거야?”
“어떻게 상대하고 싶냐니…….”
“그놈을 몰래 죽여 버리고 싶은 거야, 아니면 그놈이 얼마나 나쁜지 그 실체를 까발리고 싶은 쪽이야?”
“그야…….”
세상 사람들이 설록진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 알았으면 좋겠다. 과거부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에게 열광하는 이 나라 사람들을 보며, 모두가 속고 있는 그의 실체를 가장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며 나는 언제나 모두가 설록진이라는 놈의 진실을 알게 되길 바랐다.
하지만 그건 어려운 일이다. 설록진을 죽여 버리는 것보다 더더욱.
거짓말은 쉽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는 건 언제나 어렵다. 내게는 늘 그랬다. 쉬이 말을 내뱉지 못하는 나를 보며 금 박사는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생각도 안 해 본 거야?”
“아니요, 생각은 해 봤죠.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진실을 밝힌다는 거요.”
“나는 어떻게 하고 싶냐고 물었어.”
“그야, 따지자면 후자죠. 억울하잖아요. 아무도 설록진이 무슨 짓을 저지른 지 모른다는 게. 그래도 그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고…….”
“말이 기네. 그냥 딱 잘라 말하면 되잖아. 왜 이래 답지 않게.”
“끙.”
금 박사는 내 표정을 보며 깔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았어! 만들고 싶은 게 생겼어!”
금 박사는 제 머릿속에 떠오른 복잡한 생각을 모두 털어 내 버렸다. 언제나처럼, 그의 눈은 어린애처럼 반짝였다.
“좋아, 나는 역시 히어로의 편이 되고 싶었어.”
* * *
“움, 움냐, 음, 있어요?”
삼각김밥을 입에 쑤셔 넣으며 도채희가 물었다. 그녀의 입속에서 뭉개진 밥알처럼 뭉개진 발음에 수화기 너머 정호산은 잔뜩 당황한 목소리로 답했다.
[뭐라고요?]“아.”
너무 급하게 말했나. 꿀꺽, 삼각김밥을 씹어 삼킨 도채희가 말했다.
“그래서 소득은 있었냐고요.”
각범부를 맡은 박철완에게 직접 스카우트를 받아 이 대한민국을 좀먹고 있는 ‘흑막’의 진실을 캐고 있는 정호산은 최근 한 사건에 집중 중이었다.
[일단 실종된 사람들의 목록을 만들긴 했습니다. 확실히 미리내당의 정책에 반대했던 사람들 중에서 실종된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실종되지 않은 쪽은 갑자기 자신의 의견을 굽혔고요.]“흐음. 그거 확실히 이상하네요.”
[예, 우연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죠.]그 말에 도채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가 바로 입을 열었다.
“예, 우연은 절대로 아닐 거예요.”
[일단은 실종자부터…….]“아니, 실종자가 아니라, 실종되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가세요.”
[예? 일단 실종된 사람들을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아니죠, 실종된 사람들을 찾아 봤자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거예요. 이미 그쪽은 깨끗하게 정리한 다음일 테니까. 하지만 실종되지 않은 사람들 쪽은 다를 거예요. 왜냐, 그 사람들은 살아남았잖아요. 회유당했든 협박을 당했든 자신의 뜻을 꺾는 대신 살아남았잖아요. 그만큼 많은 걸 알고 있을 거예요.”
그렇게 급하게 말을 쏟아놓은 도채희는 이온 음료를 들이켰다.
“어쨌거나 실마리는 그쪽에 있을 거예요.”
[확실히 맞네요. 실종되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가 봐야겠어요.]“조심해요, 그 과정에서 꼬리가 밟히지 않게.”
도채희의 말에 정호산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이미 죽은 사람인걸요. 죽은 사람에게는 꼬리가 없답니다.]“진짜로 죽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죠?”
[그냥, 저보다는 경위님을 걱정하는 게 우선이라는 뜻이에요. 경위님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위치에 있잖아요. 그 어디로도 도망가지 않고요.]도채희는 정호산의 걱정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그의 말이 고마웠기 때문이다. 서로를 걱정하는 말을 나눈 그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통화를 종료했다.
편의점 테이블을 정리하고 도채희가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뒤에서 도채희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채희 경위?”
그 목소리에 도채희는 고개를 돌렸다.
제35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