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354
90 누군가의 잿불 (2)
‘기, 김명철 길드장?’
도채희는 깜짝 놀랐다. 김명철 길드장이 자신을 왜 찾아온 것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래간만에 보는 김명철의 얼굴은 전과는 달리 상당히 어두웠다.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거대 길드의 수장으로서 언제나 방패처럼 여유를 두르고 있던 그였지만, 지금 그의 얼굴에서는 그저 지독한 피곤과 패배감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붉은개 길드의 길드장님께서 저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리고 제의할 것도 하나 있고 말이지요.”
김명철의 말에 도채희는 눈을 깜빡였다.
“저에게 무슨 제의를…….”
아무리 머리를 뒤적거려 봐도 붉은개 길드의 길드장이 자신에게 ‘제의’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김명철은 주변을 살피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자리를 옮기죠. 여기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니까.”
김명철이 도채희를 데리고 향한 곳은 고즈넉한 분위기의 한식당이었다. 예약이 되어 있는 것인지, 뭔지 종업원은 김명철을 보자마자 익숙한 듯 어디론가 그들을 이끌었다. 안쪽 룸으로 안내된 도채희는 김명철의 맞은편에 앉아 침을 꿀꺽 삼켰다. 문이 닫히고, 바깥과의 연결이 끊겼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마력의 흐름.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이 방 전체가 거대한 아티팩트였다. 도청이나, 감시. 그 어떤 능력도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겠지.
굳이 이곳까지 도채희를 데리고 왔다는 건 오늘 할 이야기가 무엇이든, 제법 무겁다는 뜻이었다.
“불고기 괜찮습니까?”
김명철의 말에 도채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편의점을 들러 이미 배가 부른 상황이었지만, 거절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제 앞에 놓이는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보며 도채희는 침을 흘렸다. 박철완과 갈라선 이후, 무급 휴가에, 사비까지 털어 홍난희의 재판을 도운 결과 도채희는 거지 중에 상거지였다.
‘으, 삼김은 하나만 먹을 걸 그랬나. 아니, 어떻게 잘 구겨 넣으면 아직 자리는 있어. 몰래몰래 재능을 발현해서 칼로리를 태우는 거야.’
아니, 이런 태평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속으로 고개를 내저은 도채희는 다시 시선을 올려 김명철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제게 하고 싶으시다던 얘기가 뭔지…….”
“그 일 이후, 경위님은 어떻게 지냈습니까?”
“그 일이라면…….”
“호산이의 사고 말입니다.”
그 말에 도채희는 바짝 굳었다. 호산이의 사고, 정호산의 사고? 아! 맞다, 그 사람! 죽었다는 설정이었지. 도채희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재빨리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김명철이 말했다.
“솔직히 처음에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녀석이 그렇게 갔다는 게요. 겨우 그런 일에 죽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해서.”
그 말에 도채희는 물을 들이켰다. 숨이 턱턱 막혔다. 따지자면 김명철은 정호산의 양 아버지뻘은 되는 사람이었다. 천애 고아였던 그를 어여삐 여겨 제 길드를 물려줄 것처럼 다정히 굴었다지.
실제로 도채희가 정호산을 참고인 조사로 부르려 했을 때, 가장 먼저 맞닥뜨렸던 것이 붉은개 길드의 법무팀이었다. 김명철은 진심으로 정호산을 아꼈고 그를 보호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호산은 그 보호막을 뛰쳐나와 도채희에게 다가왔지.
“저를 원, 원망하시나요?”
붉은개 길드에서 미래가 보장되어 있던 정호산을 이 일에 끌어들인 건 분명 도채희였다. 김명철 길드장이라면, 분명 도채희를 원망할 법도 했다. 자신이었다면, 분명 그랬을 거다. 너 같은 여자를 만나 우리 호산이가 저렇게 되었다고. 그런 원망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도채희의 말에 김명철은 가만히 도채희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서늘한 기운에 도채희는 저도 모르게 다리를 떨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김명철이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금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어…….”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는 그녀에게 김명철이 말했다.
“호산이를 죽인 건, 각범부의 형편없는 운영 방식 때문이죠. 도채희 경위라면 아주 잘 알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의 각범부가 얼마나 엉망인지.”
“그, 그렇죠?”
정호산의 ‘꾸며진’ 죽음이 아니더라도 확실히, 각범부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각범부의 부장을 맡은 박철완은 누군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때문에 지원은 늘 부족했다. 애초에 제대로 된 조직을 만들 생각도 하지 않는 부장의 아래에서 각범부의 팀원들은 늘 인원 부족에 시달렸다. 거기에 탑의 빌런 탈옥 사건 때 생긴 인원의 공백. 그리고 지휘 체계의 붕괴.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정호산의 죽음은, 사실, 언제든 생길 미래의 사고를 미리 재현한 것에 가깝다. 그래서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 죽음이 거짓일 거라고는.
눈앞의 김명철 또한 그랬다.
처음에는 상황을 부정하고, 누군가의 외력이 개입하지는 않았을까 의심했던 김명철이었지만 사건을 캐면 캘수록 정호산의 사고는 예견되어 있었다는 게 명확해졌다.
“내가 도채희 경위를 찾아온 건, 도채희 경위 또한 이 시스템의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도움이 필요했던 거지요. 도저히 안에서는 해결할 방법이 보이지 않아서, 그래서 호산이의 도움까지 필요했던 거고요.”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그의 말에 도채희는 입을 닫았다. 맞았다. 그의 추측이.
“호산이는 똑똑한 녀석이었으니, 내가 보지 못했던 걸 봤을 겁니다. 그리고 기꺼이 돕겠다 했겠지요.”
실제로 정호산은 도채희를 도와 불법 게이트 건을 캐는 등, 열심히 노력했다. 그 노력으로는 부족해 결국 각범부에 직접 들어가 상황을 파악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그로 인해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저분은.’
김명철은 도채희를 원망하지 않았다. 김명철이 원망하는 대상은, 이 시스템이다. 정호산을 죽게 만든, 각범부의 부실한 시스템.
“내가 원하는 건 지금의 각범부를 바꾸는 겁니다.”
생각보다 큰 목표에 도채희는 숨을 흡 들이켰다. 도채희의 굳은 표정을 살핀 김명철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게 쉽지 않을 거라는 건 나도 잘 알아요. 그래,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지. 몇 달 전의 나라면, 이건 내가 할 일도 아니라고 했을 겁니다. 나는 헌터고 헌터면 게이트나 공략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말이에요. 그냥 가만히 두고만 볼 일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요.”
김명철의 말에 도채희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곧 생각을 정리한 도채희가 김명철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길드장님께서 그런 결심을 하신 건 정호산 씨의 죽음 때문인가요?”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죠. 그게 계기가 됐으니까.”
“이건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예요. 제아무리 붉은개 길드의 길드장님이라고 하셔도요.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어려운 싸움이 될 거예요. 길드장님께서는 지켜야 할 게 많으시잖아요.”
각범부의 시스템을 뜯어고치겠다는 건, 곧 지금의 정부를 공격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김명철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닐 거다. 붉은개 길드가 제아무리 대단한들, 정부에 비해서는 그저 한낱 길드에 지나지 않는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될 게 뻔하다.
김명철의 합류는 분명 도움이 될 거다. 하지만 이 싸움으로 김명철이 잃을 게 너무나도 신경이 쓰였다. 개인에 불과한 도채희나,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정호산과는 달리 김명철은 너무나도 먹음직스러운 먹이가 될 테니까.
김명철이 이 판에 나서는 순간, 정부는, 언론은 김명철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거다.
“모든 걸 잃으실 수도 있어요. 후회하게 되실 수도 있고…….”
“있잖습니까. 요즘 밤에 눈을 꾹 감고 있으면, 호산이의 목소리가 들려요.”
그 말에 도채희는 주먹을 꽉 쥐었다.
‘호산 씨 목소리가 들릴 리 없잖아, 완전 환청이라고요, 그거!’
도채희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김명철은 두 눈을 감은 채로 말을 이었다.
“호산이를 위해서 아닙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호산이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다만, 나는 제2의 호산이가 생기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도채희를 바라보며 김명철이 말을 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호산이의 복수라면, 호산이 그 녀석은 나를 말릴 겁니다. 복수 같은 거 자기는 바라지 않는다고요. 하지만 내가 다시는 너 같은 피해자를 만들지 않겠다고 말하면, 그 녀석은 고개를 끄덕여 줄 겁니다. 그런 녀석이잖아요, 호산이는.”
눈물을 머금고 그렇게 말하는 김명철의 말에, 도채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정호산은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경위님께 제안하고 싶은 건 이겁니다. 나를 도와주겠어요?”
그 제안에 도채희는 눈을 깜빡였다. ‘그’ 붉은개 길드의 김명철에게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까? 도채희의 의문을 읽은 듯이, 김명철이 말했다.
“나는 내부의 사람이 필요해요. 각범부의 시스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좋겠죠.”
“뭘 하실 계획이길래…….”
“뒤집어 놓으려고요. 그래서 어때요, 나랑 같이 저 글러 먹은 놈들을 뒤집어 놓을래요?”
김명철의 제안에 도채희는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김명철이 원하는 게 ‘정호산의 복수’였다면, 도채희는 그를 뜯어말렸을 거다. 복수에 인생을 태우는 건, 특히나, 실제로는 정말 죽지 않은 사람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불태우는 짓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김명철이 바라는 건 정호산의 복수가 아니라, 제2의 정호산을 막는 거였다. 계기는 정호산의 죽음이었을지 모르되, 김명철은 눈을 떠 버렸고, 그 눈으로 보는 세상을 더는 참을 수 없다고 결정했다.
‘으으, 정호산 씨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릴 수도 없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도채희는 일단, 김명철의 말을 들어 보기로 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인데요?”
김명철은 도채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경위님은 호산이랑 어쩔 생각이었어요?”
“어……. 수상쩍은 부분부터 수사를 시작했어요. 불법 게이트 사건이라든가, 가장 밑바닥에서 그들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사람을 찾으면, 언젠가 윗선과 이어지는 라인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이어진 선을 따라서 움직이면 언젠가 그 끈에 걸린 거물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도채희는 그렇게 생각했고 자신이 접근할 수 있는 밑바닥에서부터 천천히 훑어 올라갔다.
“그래서 알아낸 게 있습니까?”
“별로요.”
상대방은 정보를 기가 막히게 차단했다. 꼬리를 잡았다고 외치는 순간 상대방은 도마뱀처럼 꼬리를 자르고 도망쳐 버렸다. 마지막으로 얻은 청 과장이라는 단서도, 벨츠머츠에게 빼앗겨 버렸다. 솔직히 말하면 여태까지 도채희가 한 것이라고는 여기저기를 들쑤신 것밖에는 없다.
의지는 충만했지만, 결과는 영 시원찮았다.
“그 방법으로는 평생이 다 지나도 상대방의 실체에 다가갈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경위님 잘못이 아니에요. 다만 적의 체급에 맞지 않는 방법이라는 거죠.”
김명철이 말했다.
“나는 사람을 모을 겁니다.”
“사람이요?”
“말했잖아요, 체급이 맞지 않는다고. 각범부를 건든다는 건, 지금의 정부를 건든다는 거예요. 개인으로 맞부딪치기에는 너무나도 큰 상대죠. 경위님이 뭘 하든, 경위님의 행동은 묻힐 겁니다. 왜냐, 적을 움직이기에 경위님 한 사람은 너무 작거든요.”
도채희는 눈을 깜빡였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행동이 무의미하다고 딱 잘라 말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김명철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적을 움직이게 만들려면, 그만큼 체급이 큰 상대가 필요해요. 이걸 ‘문제’로 걸고넘어질 사람이 있어야 한단 뜻이에요.”
“그 사람이 누군데요?”
“일단은 나.”
김명철은 해맑은 얼굴로 자신을 가리켰다.
“붉은개 길드의 길드장 정도면, 그놈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겠죠?”
제355화